2023년도 성령강림 스물두째 주간


1.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하는 생활 (시 107: 31-37 587장 감사하는 성도여)



지난날 어려울 시기를 돌이켜 볼 기회가 있어서 오늘의 현실과 비교할 때에 참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백성들에게 속량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속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גָּאַל 까알”로서 “값을 주고 사다(ransom)”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포로민으로 전당잡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함으로 풀려난 그 백성들이 속량 받은 백성들입니다.
이 속량 받은 백성들이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값을 지불하시고 빼어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107: 31을 찾아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영어로 “steady love”로서 “견고한 사랑,” “영원한 사랑”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행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인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먼 후손들에게까지 그대로 이행하시는 그 사랑이 헷세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백성들의 충성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백성들이 불충성할지라도 하나님은 헷세드의 사랑 때문에 감금된 자리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면 죄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때에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몸값인 속량물로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현실적으로 감사할 일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상에서는 코로나로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직장을 잃고 실업자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달리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이 가지지 못하는 기쁨과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천국에 소망을 두고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넘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구원받고 천국백성이 된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했는데 이제 거주할 성읍에 당도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방황하다는 말은 “길을 잃다”는 말입니다. 목표와 방향이 없이 살던 백성들이 목적지에 도달한 것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는 굶주리고 목마른 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배부르고 마실물로 채움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목표가 생기고 의미있는 삶이 주어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들이 목적의 땅에 당도하여 파종을 하고 포도원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추수할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당도하여 파종하고 재배하고 추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환경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걷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합니다. 한 때 오른 발을 다쳐 오랫동안 걷기가 불편했으나 걷기가 편해짐으로 감사를 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걷기가 편해짐으로 인해 몸의 자세가 펴지고 활력을 되찾게 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지만 작은 일에서부터 근본적인 감사를 할 때에 우리의 삶에서 활력이 솟아나도록 합니다.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요단 강물이 먼추는 순간 (수 3:7-14 찬송가 347장 허락하신 새 땅에)



출애굽하여 40년 만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요단강 뚝을 밟았습니다. 문제는 요단강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출애굽 시에 홍해 바다가 앞으로 막아서고 있었듯이 오늘 여호수아와 백성들 앞에 요단 강물이 그들의 진행을 막고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은 출발과 끝이 한 덩어리로 붙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과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건이 한 덩어리입니다. 출애굽 지도자는 모세였던 반면에 지금 약속의 땅에 들어갈 지도자는 여호수아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과 야속의 땅 그리고 출애굽 지도자와 약속의 땅 지도자를 연결하는 연속의 끈은 무엇인가요?
출애굽 시 모세와 함께 하셨고 광야 여행 시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신앙의 삶의 출발과 끝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연속의 끈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그들의 신앙의 삶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의 표를 확신할 수 있었나요?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 율법은 어디에 새겨졌으며 그것은 어떻게 보관하여 이동했는가? 두 돌판이며 그 두 돌판은 하나님의 언약궤 속에 보관되었으며 그리고 언약궤를 항상 앞세워 백성들은 이동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차지하기 위해서는 요단 강물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강에 물이 가득하여 넘실거렸기 때문에 그 요단강을 백성들이 건너간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통과해야 할 그 요단강을 그들은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놓고 약속의 땅 지도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음성은 법궤를 멘 제사장들로 하여금 먼저 강물이 넘실거리는 요단강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 강물을 밟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순간 흐르던 강물이 멈추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언약궤의 위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함께 하였으며 그리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함께 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가 요단 강물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을 뒤따라 마른 땅이 된 강바닥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의 리더십 (마 23:1-12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자리는 최고의 권좌였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리더십은 모세의 자리에서 나오는 리더십이었습니다. 모세의 권세는 국가적 사회적 종교적 권세였으며 바리새인들이 그 권세를 독차지 하였습니다. 그들이 유대사회 안에서 어떻게 사두개파를 비롯하여 여러 종파들을 평정할 수 있었는가? 사두개파에게 성전파괴의 책임을 물으면서 바리새파가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교 안에 여러 종파들을 바리새파 중심으로 통일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종파들이 바리새파에 통합되어가는 과정에 나사렛파가 그들에게 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유인즉 기독교인 나사렛파는 바리새파가 주도하는 유대교 통일운동에 거부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핵심적인 이유는 안식일법과 정결법 그리고 유대예배의식에 대해 나사렛파는 바리새파가 요구하는 방향대로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왜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파의 문제점을 강조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백성들을 두고 바리새파와 나사렛파가 보이지 않는 리더십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리더십 경쟁에서 바리새파의 리더십의 문제가 심각할 정도에 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는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는” 기술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그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탁월한 경영술로 바리새파가 백성들을 유인하는 데 성공할지 모르나 그 백성들은 지옥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잔치 윗자리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 그리고 랍비라 칭함받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왜 그들은 높은 자리와 인사받는 것 그리고 랍비라 칭함받는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확보하려고 하였는가? 먼저는 백성들과 차별화된 계층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계층 구조의 고착화를 통해서 엘리트주의 곧 권위주의의 시스템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셋째 조직 가치를 우선적으로 여기고 사람은 수단적 가치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리더십은 무엇인가? 바리새파가 행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되 그들의 말은 행하는 것입니다. 조직을 위해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해방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계급에 따라 백성들을 차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평등하게 바라봅니다. 선생과 아버지는 한 분 하늘에 계신 분이고 지도자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모두가 다 동등한 형제 자매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한 아버지의 자녀된 형제 자매들을 어버이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 리더십입니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가든지 백성들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파와 나사렛파 사이에서 백성들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절)”


4. 바울 복음의 진정성 (살전 2: 9-13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이라는 기독교의 중요개념의 모델이 되었던 교회입니다. 이방지역에서 바울이 개척하였던 교회 중에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만큼 신실한교회였습다. 그런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울은 권면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의 방식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권위적이거나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앙양심에 호소하는 방식입니다. 권면에 의하면 바울의 복음을 처음 들을 때에 데살로니가인들은 인간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에 바울의 복음을 듣고 우상 을 버리고 돌아온 데살로니가인들은 구원받은 감격을 고백적으로 간증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울과 일행들 앞에서 간증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증언하였습니다. 그 때에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바울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들을 바울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문제는 지금 그들 중 몇몇이 바울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바울의 복음을 잘 믿고 따랐던 그들이 바울을 의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바울은 3:5에서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울의 복음을 왜곡하고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비난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들은 기금으로 생활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바울이 어겼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자비량으로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며 선교하는 바울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을 사깃꾼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소문을 퍼트리는 자가 교회 안에 있었으며 그들이 퍼트리는 소문에 의해 데살로니가 신자들 중에 바울을 의심하는 자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 때문에 생겨난 문제를 바울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신앙양심에 호소하는 길 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의 진정성을 당시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흠없고 거룩하게 행한 것을 그들이 목격한 증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도 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절)”.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5. 여호와께 감사해야 할 이유

(시 107:1-7, 33-37 찬송가 3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여호와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여호와가 선하시며 그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원한 사랑은 그 백성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속량하여 주신 것입니다. 포로된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셔서 그들이 기적적으로 거주할 성읍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로로 있던 백성들을 속량해 주신 하나님께 그들이 감사하고 예배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2절)”
그렇다면 거주할 성읍에 들어오기 전에 그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그들은 주리고 목말랐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피곤하여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서 주리고 목말랐던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거주할 성읍을 찾을 수 있게 되었는가? 근심 중에 있었던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광야는 못으로 마른 땅은 샘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들이 밭에 파종하여 포도원을 재배할 수 있었으며 풍성한 소출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35-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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