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스물세째 주간


1. 기름이 준비된 사람( 마 25:1-13 찬송가 175장 신랑되신 예수께서 다시)


간절함으로 신랑을 만나기를 고대하였고 신랑이 더디 올 때까지 혼인집 문 입구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들도 다른 여인들과 똑같이 등불을 들고 있었고 기다리다 지쳐 함께 졸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신랑이다”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신랑을 맞으려고 등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열명 중 다섯은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집 대문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나머지 다섯 여인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다같이 등불을 들고 있었고 더디 오는 신랑을 맞이하려고 다같이 졸면서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왜 저 사람들만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 집으로 들어가고 이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였는가?
다같이 등불을 들었는데 이 여인들이 들고 있었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너무나 당황하면서 슬기 있는 여인들에게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들은 대답은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였습니다. 여기서 신랑의 맞이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등도 아니요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도 아니요 모자라게 된 기름에 있었습니다. 등불은 열명 모두 다 들고 있었습니다. 더디 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인내심도 열 명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신랑이 올 때 사람들을 신랑과 함께 들어간 잔치집 대문 안과 대문 밖으로 서로 갈라져 서도록 만든 것은 기름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름의 여분이 있는 등불을 켠 여인들은 신랑과 함께 잔치집 안으로 들어갔던 반면에 꺼져가는 등불을 들고 있는 여인들은 기름을 구입하러 동네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비록 늦었지만 그들도 기름을 구입하여 등불을 켜서 들고 문을 두드렸을 때 꽁꽁 닫힌 잔치 집 대문 안에서 들리는 신랑의 소리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등불 준비할 줄은 알면서 그리고 더디 오는 신랑을 기다릴 줄도 알면서 여분의 기름 준비는 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등불은 보이는 것인 반면에 기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등불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다른 활동을 하다가도 등불이 있는지 없는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올 때가 가까이 되었다고 하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등불을 들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날도 여럿이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다고 햇 등불을 그 여인들이 등불을 들고 나간 것입니다. 집을 나설 때에 등불이 켜지는지 안켜지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불을 켜 보니 등불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름통에 기름이 있는지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늘 보이는 곳에 두었던 등은 어디에 있는지 눈감고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기름까지 점검할 만큼 꼼꼼함과 여유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불이 켜진 등을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 등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켜져 있으려면 여분의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들은 왜 기름 준비하는 데 시간을 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꼼꼼하게 점검하지 못하였는가?
그들이 분주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등불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정도만 시간을 할애하고 나머지 그들의 바쁜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육신의 생활에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먹고사는 일을 하는 데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그렇다면 등불과 기름의 상징적 의미는 각각 무엇인가?
등불이 비치는 빛은 착한 행실입니다. 등은 사람의 종교 활동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보이는 종교 활동과 그리고 종교 활동을 통하여 착한 행실 곧 선행하며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면 종교적 활동을 통해 하는 선행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출세의 길도 열립니다. 그 다음에 기름이 무엇인가요? 그 기름은 그 착한 행실을 만들어내는 동기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인 마음의 영역에서 나오는 동기입니다. 사람에게 착한 행실을 하도록 마음에서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않으면 착한 행실인 선행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재림 할 때에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갈 기름이 준비된 등불을 켜고 있을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을 따라 선한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기름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오실 때에 재림하는 예수님을 맞이할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종교생활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등만 들고 있고 성령의 기름으로 태워지는 불빛인 착한 행실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성령에 의해 감동받고 변화된 생활로 착한 행실을 가지는 사람이 주님을 맞이하여 혼인 잔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언제 주님 오시든지 준비하는 자

(마 25:1-13 찬송가 175장 신랑되신 예수께서 다시)


마 24:44-51장의 충성된 종과 악한 종 비유에서는 주님이 기대보다 일찍 오셨던 반면에 오늘 열 처녀 비유에서는 주님이 기대보다 늦게 오십니다. 두 비유에서 공통점은 주님이 반드시 오신다는 것과 그 날에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열처녀들은 모두 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고 등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다섯은 지혜로운 자가 되어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으나 다섯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지혜로운 자의 그룹과 어리석은 자의 그룹을 판가름하였는가요? 먼저 오실 신랑에 관한 지식입니다. 둘째로 불이 꺼지지 않도록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왜 신랑이 도착할 가까운 시점에서 기름이 모자라게 되었는가? 그들 신랑이 그렇게 더디 올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지혜로운 자들과 똑같이 기름과 등불을 가지고 있었고 신랑이 오기 직전까지 밤새 그들이 가진 등에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다섯 처녀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랑이 왔을 때에 가지고 있는 등에 켜져 있어야 할 불이 꺼져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처녀들이 동네로 가서 기름을 구입하여 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혼인집 문은 닫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다섯은 신랑의 맞이하기 위해 사전에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이 올 길목에서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여분의 기름까지도 준비하는데 신경을 썼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의 오시는 알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반드시 주님의 날은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대하고 계산한 때에 도래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불붙는 등을 들고 있는 중에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등만이 아니라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할 그 기름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이며 그리스도와 우리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고 있어야 할 등불 곧 빛의 상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반사하는 선한 행실입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1-13절)”


3. 넘치는 풍요가 왜 유혹인가?

(수 24:1-3, 14-25 찬송가 586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세겜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헷세드의 사랑으로 그들의 조상과 그들이 비록 불충하였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헷세드의 사랑으로 약속의 땅을 밟는 복을 입은 자들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세겜에 모인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든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둘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의 말을 듣는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수아에게 대답하기를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올 만큼 믿음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여호수아가 다른 신들이나 하나님 둘 중에 섬길 자를 선택하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들이 들어온 약속의 땅은 넘치도록 풍요한 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땅의 넘치는 풍요는 도리어 백성들에게 유혹과 위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혹과 위험이란 풍요 속에서 다른 신들과 다른 생활양식을 선택할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백성들의 신앙고백은 구변좋은 말로서 헌신을 대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헌신입니다. 반면에 다른 신들을 섬기겠다는 결정은 이웃을 희생하여 취하게 될 부의 축적과 직결됩니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완전 헌신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 백성의 삶의 양식 (시 78:1-7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시편은 감추어진 비밀 이야기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 비밀의 이야기는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서 후대들이 반드시 전달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후대들은 왜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요? 왜냐하면 후대들에게 이스라엘 조상들이 실패하였던 길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조상들이 실패한 길은 무엇인가? 그들 조상 에브라임은 완고하고 패역하여 마음이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과 기적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시편에 소상한 기록은 없을지라도 조상들의 실패로 인해서 그들이 나라 잃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요?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로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에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하신 기적들을 잊어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5-7절)”


5. 소망없는 자에서 소망을 가진 자로

(데살전 4:13-18 찬송가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박해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소식을 디모데로부터 들은 후에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박해시에 몇몇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소문을 퍼트린 자들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신자들이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소망을 두고 마음에 위안을 얻고 있었던 박해 시 순교자의 유족들이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말에 그들은 모두 슬퍼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슬픔의 기운은 온 교회를 덮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상황에서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절)”. 핵심은 소망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족들과 함께 슬퍼하되 소망없는 자로서 슬퍼하지 말고 소망을 가진 자로서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족을 잃은 유족들과 친한 친구들이 소망있는 슬픔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소망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을 때 생깁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주님을 따라가고 그 다음에 우리가 따라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6-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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