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스물일곱째 주간

1. 모험이 따르는 복음전파 ( 25:14-30 찬송가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주인의 재산을 당분간 의탁 받은 가신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주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이들에게 금 다섯, 금 둘, 금 한 달란트를 각각 맡겼습니다. 주인이 결산 때가 되어 돌아와 결산을 할 때 금 다섯 개 받은 자는 5개를 두 개 받은 자는 둘을 남겨서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이 둘은 주인으로부터 충성되다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임을 받고 바깥 어두운 데로 던짐을 받게 됩니다.

주인으로부터 똑같이 인정을 받고 주인의 막대한 재산을 위임받아 두 사람은 충성되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거래하였는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을 파고 한 달란트 금을 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도 오룻소(ὀρύσσω)는 파다(to dig)는 의미이고. 아포크립토 (ἀποκρύπτω)는 숨기다(to hide)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24-25)”

이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역부족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한 나머지 달란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산능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각각 그 사람의 재능대로 금 5, 2, 1달란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금을 달란트로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주인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주인으로부터 칭찬과 책망은 주인의 달란트의 생산능력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릴 때 3 번이나 모두 실패하는 땅을 만났습니다. 길가 밭, 돌 밭, 가시 밭, 그리고 네 번째 옥토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이같은 모험을 한 이유와 달란트를 남긴 자들이 거래한 이유가 공통점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이 만났던 그 실패의 밭을 생각한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손해를 가져 올 밭의 위험의 측면을 본 나머지 씨의 능력의 차원을 보지 못하였던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금 한 달란트는 재능이 아니라 엄청난 돈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이라고 가정할 때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6억의 가치가 됩니다. 그런데 마태의 당시 유대 사회의 맥락에서 볼 때에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나님이 이방지역에 알려지면서 정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을까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달란트와 하나님을 손실로부터 보호하려고 숨겨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을 보호하겠다고 하는가? 잘못 투자했다가 하나님의 재산이 손실 당함으로써 돌아오게 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그의 행동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적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사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불러져야 한다고 믿었고 하나님의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놓았다가 도로 그 원금을 하나님께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복음 전하는 자를 통해서 전달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우리들 또한 복음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파묻어 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생명인 달란트를 잘못 투자하다가 시간적 재정적 손실을 입을까봐서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오늘날 교회에 소속된 우리들은 교회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 올 사람도 아닌데 왜 시간을 투자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나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달리 매일 같은 시간에 그리고 호주의 시드니 조지 스트릿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40년간 변함없이 같은 시간에 복음을 전하였던 한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젊은 날에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였으나 예수 믿어 구원받고 완전 해방을 받은 데 감사하여 하루 10명씩 전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의 전도 방법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친절하고 상냥한 말로 실례지만 당신이 오늘 죽으신다면 천국에 가실 자신 있습니까?”

그는 안타깝게도, “40년 동안 매일 빠짐없이 하루 10명에게 전도를 했는데, 자기의 전도를 통해 구원 받았다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소천하기 2주 전에 한 영국의 침례교 목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호주 여행중에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들의 고국 영국 호주 미국 인도로 돌아가 현지 교회에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영국목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서 2주 후에 그 흰머리 Mr. Jenner라는 노인 전도자는 평화롭게 소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은 우리가 계산하는 것처럼 의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하나님의 생명은 복음을 통해 전달됩니다. 그리고 복음이 뿌려진 이후에는 우리의 계산을 초월하여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지고 자라나서 그 영혼을 구원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25:14-30 찬송가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왜 감추어 두었는가? 그 돈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사업을 한다고 투자를 해놓고 장사가 안 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니 차라리 주인에게 원금만이라도 돌려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땅속에 파묻어 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사업하여 5달란트 남겨온 사람은 칭찬하고 한 달란트 원금을 그대로 가져온 사람은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 원금을 손실시키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 주었는데 주인은 그를 칭찬하지 않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주인은 그 한 개를 빼앗아다가 다섯 달란트 남긴 자에게 주어라고 하였습니다. 이 주인 특이합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재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개 받은 자가 숨겨둔 것이 주인이 적게 주었기 때문에 숨겨두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달란트는 재능이 아니라 엄청난 돈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이라고 가정할 때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6억의 가치가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나님이 이방지역에 알려지면서 정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에 의해 더럽혀질까봐서 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달란트와 하나님을 손실로부터 보호하려고 숨겨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을 보호하겠다고 하는가? 잘못투자했다가 하나님의 재산이 손실당함으로써 돌아오게 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그의 행동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적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사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져야 한다고 믿었고 하나님의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어 놓았다가 도로 그 원금을 하나님께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복음전하는 자를 통해서 전달받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우리들 또한 복음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파묻어 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생명인 달란트를 잘 못 투자하다가 시간적 재정적 손실을 입을까봐서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오늘날 교회에 소속된 우리들은 교회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 올 사람도 아닌데 왜 시간을 투자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나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은 우리가 계산하는 것처럼 의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하나님의 생명은 복음을 통해 전달됩니다. 그리고 복음이 뿌려진 이후에는 우리의 계산을 초월하여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지고 자라나서 그 영혼을 구원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0-21)”

 

3. 힘센 장수보다 더 강한 자 (4:1-7 찬송가 179장 주예수의 강림이)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정복을 한 후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안정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누리고 살았던 약속의 땅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생존해 있었던 가나안 토착민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공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왕 야빈이 철병거 900대를 앞세워 20년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정과 평화와 그리고 번영을 약속해 주셨던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극심한 고통으로 시련을 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번영의 땅에서 시련을 받게 된 이유는 불순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불순종의 죄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에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것,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부족한 것 그리고 하나님과 언약을 파괴한 것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번영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책망 아래 오기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경고음을 느끼지 못했는가? 성취와 번영에 도취되어 그들이 우상 신과 하나님을 분간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들이 우상 신과 하나님을 구분하지 않고 혼합적으로 믿고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가까운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심한 학대와 압제를 받게 됩니다. 그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서 학대와 압제를 받던 초기에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책망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햇수가 길어지고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게 될 때에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벌을 받게 되는 것인 줄 깨달음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이 점점 증가할수록 그들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오는 생존의 불안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안이 찾아올 때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평안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이 되었을 때에 평화가 왔습니다. 그 때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중에 그들 앞에 여선지 드보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선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여선지 드보라가 선두에서 지휘하고 그 뒤를 따라 이스라엘의 장군 바락이 따르고 군사들이 뒤따르게 됩니다. 가나안 장수 시스라를 제거하는 영광이 장수 바락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락이 적장 시스라를 죽이려고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를 먼저 죽였는가? 헤벨의 아내 야엘이 적장 시스라를 유인하여 잠들게 한 후에 그가 잠든 사이에 여인 야엘이 죽였습니다. 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적장의 목숨을 빼앗는 영광을 장수 바락에게 주지 않고 여성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적장의 목숨을 여인의 손에 처분하도록 하신 것은 강한 장수 보다 순종하는 여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8-9)”

 

4. 갑자기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나요? (살전 5:1-12 찬송가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성경은 임산부에게 해산의 고통이 찾아오듯이 주님의 날이 갑자기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같은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소문을 퍼트리는 자가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소문을 듣고 믿음이 흔들리고 슬퍼하는 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이미 부활이 지나갔다고 소문이 있었으며 주님의 부활도 재림도 없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닌 것입니다. 부활과 재림에 대한 의혹이 생겨났을 때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는가? 영적 지도자들을 존경하지 않는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부활의 진리를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게으르게 지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적구원에 대한 감격이 식어지고 세상의 부와 육신의 안일과 행복에 도취되어 사는 데 만족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생겨난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요? 주님은 부활하셨고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 시에 맞이할 자와 그렇지 못할 자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임하실 때 왜 주님을 맞이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그 날과 시기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은 마치 임산부에게 해산의 고통이 찾아오는 것 같이 그리고 도적같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갑자기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둠에 속하지 않고 빛의 자녀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낮의 아들은 낮에 활동하는 것처럼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세상의 유혹과 죄악에 빠지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닌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우상숭배를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랑이란 지도자를 존경하고 신자들 간에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눈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7-8)”.

 

5. 택한 백성이 멸시받는 자리에 있었던 이유 (123편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받고자)

신분 사회에서 종의 신분은 주인의 소유물과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종은 남성이든지 여성이든지 경매시장에서 주인에게 팔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들의 운명은 상전의 손에 그리고 여종들의 운명은 여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청중들과 종살이 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남종과 여종의 눈이 그들의 주인의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는가요? 주인과 종들의 관계가 하나님과 포로에서 속량받은 이스라엘 자손의 관계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포로민이었기 때문에 제국민에게서 멸시와 경멸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에 패배자가 승자 앞에서 겪는 멸시와 수모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그토록 심한 멸시를 받는 자리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숱한 세월동안 나라 잃은 설움의 고통 속에 방황하다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의 영혼이 교만한 자들에게 받는 멸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인이 성전에 오르면서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포로에서 속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죄의 종에서 자유케 되어 성전에 오를 수 있는 것을 영광스런 특권으로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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