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대림절 둘째 주간

1. 하나님의 은혜의 빛의 도구 ( 막 1:1-8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된 첫 부분에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세례요한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사야 선지자와 세례요한을 복음의 시작부분에 배치하는 것일까요? 지금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무대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적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먼저 배경음악과 무대 설정과 배우들의 이름이 나온 후에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배경 이야기가 없이 결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영화가 없는 것은 그렇게 되면 관객이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우리에게 복음의 흥미를 돋구기 위해 복음의 무대 설정을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이사야의 예언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세례요한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는 복음에 대하여 예언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예언대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예언대로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람 세례요한이 복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언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세례요한 행동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리키는 그 방향에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말씀을 외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요한의 이미지는 강성이미지입니다. 세례 받으러 오는 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고 앞으로 오실 메시야는 물로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이름의 의미는 그런 이미지가 아닙니다. 여호와(יְהֹוָה)ㅋ하난(חָנַן)의 합성어입니다. 하난의 의미는 ”to be gracious, show favour,“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은혜를 보여주시다“입니다. 그 부모가 이름을 지을 때 제사장인 아버지 사가랴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란 요한의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생애는 은혜롭다는 그 이름과 달리 이복동생의 처를 아내인 제수씨를 자기의 아내로 취하는 헤롯왕의 부절절함을 지적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강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면서 그를 반대하는 많은 적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백성들이 바치는 짐승을 잡고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제사장들을 실직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물에서 세례받는 것이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비용 또한 무료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저명한 설교자는 대림절을 맞아 세례요한에게 새로운 직장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을 그대로 두면 많은 적들이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처형할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과연 말을 들을까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권력을 뒤집어 엎기 위해 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심판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세상 정부의 관리와 권력자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이 심판관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그가 베푸는 세례를 통해서 시급하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이 가까이 왔으니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회개하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까이 임했으니 지금은 은혜 받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회개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까이 다가 온 복음을 만나기 위해 우리의 몸과 방향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통해서 하는 역할은 복음을 가리키는 이정표 역할입니다. 세례요한이 베풀고 있는 세례의 몸짓은 신호등 없는 도로 복판에서 교통경찰관이 손가락으로 교통 정리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우리에게 화재 경고로 울리는 비상벨입니다. 들으면 생명이요 듣지 않으면 죽음이 되는 것처럼 복음을 맞이하면 구원이요 놓치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맞을 준비에서 세례요한이 외치는 회개란 무엇인가? 우리가 진행하는 삶의 여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도덕적인 잘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회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180도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 ”메타노니아“로서 의미는 “자신이 결정한 목적이나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히브리어는 “슈브”라는 말로서 “우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돌이키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백성들이 가던 길에서 180도로 돌아서게 만드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온 유대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시편에서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할 때에 먼저 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돌이키사입니다. 주의 얼굴빛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 우리가 돌이키는 것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주의 얼굴빛을 받고 구원을 받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9월 3일 태풍 마이삭이 지나갈 때 강원도 평창군 송정리 앞에 다리가 붕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를 통과하려던 자동차가 다리의 절반 지점에서 후진하여 다리붕괴 30초전에 사고를 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 주민인 박씨가 다리에 살짝 금이 간 것을 확인 후에 다리 앞에 서서 손을 흔들어 그 다리로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긴급신호를 보내었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가지고 오는 메시야를 누군가로부터 신호를 받지 못하면 메시야를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관세업무를 보고 있었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목인 여리고 사거리에 서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여리고를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길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목을 지켜 서면 지나가는 메시야를 맞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왜 그 곳 뽕나무에서 메시야를 기다려야 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메시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고 있고 여리고로 지나간다는 소문을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삭개오에게 그 소문은 빅뉴스로 크게 들려왔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이 곳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전달받은 삭개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세례요한의 외침이 청천벽력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마침 지나가던 예수님은 뽕나무에 매달린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다가와서 그를 확인하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부르자 마자 그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누가 회개하고 앞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회개한 사람이요 복음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은혜의 빛을 비추는 자였습니다.

 

2. 세례요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막 1:1-8 찬송가 179장 주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직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복음을 말하기 위해 무대 설정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먼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고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왜 복음을 말하기 전 무대 설정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세례요한이 등장하는가? 예언서에서 표현되고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세례요한의 행동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누구인가? 제사장 스가랴의 아들이지만 그는 제사장이 되기 위해 성전으로 가지 않고 유대 광야로 갔습니다. 그는 광야근처 요단강에서 백성들을 불러 모아 회개의 세례를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 인근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많은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나 낮은 자든지 모든 유대의 백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전으로 향하지 않고 세례요한이 있는 요단강으로 오게 되었는가? 세례요한의 세례는 절차가 단순했고, 경제적 비용이 적게 들었고 그리고 도전적이었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에게 복종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나 양을 바치고 제사장이 그 제물을 피흘리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 세례요한에게 굴복하여 물속에서 죄를 자복하고 두려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의 입으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불과하다고 하였고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가 자기 뒤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전 단계로서 죄를 자복하고 죄의 생활에서 180도로 방향을 바꾸는 회개를 가져오게 하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강압적인 물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오실 메시야를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2-4절)“

 

3.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사 40:1-11 찬송가 179장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에게 다음을 외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람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함께 보리라“.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선언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명령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긴 포로생활에 지친 나머지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신앙도 꿈도 용기도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반세기가 넘도록 지나는 사이에 부모 세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다가 죽어가고 다음 세대들도 50-60대를 바라보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정세 정통한 선지자는 유대 백성들이 해방을 맞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습니다. 당시 바벨론의 패권이 신흥강대국 페르시아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을 선지자는 확신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문을 모르고 선지자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 앞에 반역죄에 대한 벌을 받아 포로로 있는 우리가 어떻게 풀려날 수 있는가? 그리고 군대도 없고 오합지졸이 된 우리들이 제국의 손아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선지자는 백성들의 이런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제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가 복역한 햇수를 다 채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너희는....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두 번째로 백성들의 질문은 복역기간이 지나서 해방이 된다고 할지라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로도 없이 험한 길을 하나님이 어떻게 오시겠는가? 선지자는 이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습니다. 길을 닦는 자들이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는 작업을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길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그렇다면 선지자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소망을 잃고 낙심해 있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난날 백성들의 불충성과 배반과 상관없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를 위해 백성들에게 충성으로 일관하며 영원한 사랑(헷세드)을 베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것인가요? 회개하고 순종으로 돌이킬 때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롭게 자신의 임재로 우리 가운데 활동하실 것입니다. 여기 우리들의 중심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의 연약함과 변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7-8절)”

 

4.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추는 때(시 85:1-2 8-13 찬송가 179장 주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본 시편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1-3절은 과거, 4-7절은 현재, 그리고 8-13절은 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과 백성들의 현재의 상황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을 지라도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는 때를 만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고 있는데도 그 백성들에게 왜 하나님은 숨기시는가요? 백성들은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로 생각하는 대로 마음과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일이 잘 안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라고 간구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에 시인은 죄 가운데서 백성들을 하나님이 돌이켜 주시키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회개시키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현재의 회개불능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회개가 가능하다고 믿는가요? 과거에 하나님이 조상들과 자신들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해 내는 데 실마리가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야곱의 포로들을 돌이켰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시기 때문에 오늘 배반하고 불충성한 우리들의 죄악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헷세드)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습니다. 시인과 백성들은 과거를 반추하여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한 후에 하나님은 얼굴빛을 우리에게 향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 곧 살롬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미래에는 회개한 우리가 하나님과 살롬 관계 곧 구원 관계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머물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8-9절)”

 

5. 다시 오는 주님의 날 대비 (벧후 3:8-15 찬송가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초대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날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주의 약속을 더디다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사람들은 주님 오시기까지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룩한 행실이나 경건이 당장 필요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보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물질 명예 등 세상가치가 더 급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는 삶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의 약속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우리 모두가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9절). 게다가 주의 날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도둑같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9절).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0절). 주의 날이 오는 그 날에는 모든 것이 풀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기존의 시스템이 흔들리고 해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삶의 기초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이 마치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의 날이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날이 올 것에 대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요? 성경은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합니다. 성경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절)”고 합니다. 성경은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절)”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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