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주현 후 첫째 주 수세주일

 

1. 정체를 드러낸 예수 (1:4-11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서 회개의 세례를 받고 백성들이 죄를 자복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세례요한이 감옥에 가고 세례요한은 옥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죄를 자복한 줄 알았는데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죽음과 함께 제사 제도와 헤롯 체제 아래서 크게는 로마의 평화 이름 아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화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압제당하고 눌리는 가운데서 병자들은 많아지고 귀신들린 자도 많았습니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우울증 등 정신질환자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세례 받으시기 전까지 유대 상황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에서 세례요한 앞에 세례받기 위해 백성들이 줄을 섰고 그리고 그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왜 당시 세계에 변화가 없었는가? 모든 노력을 강구하였을 지라도 그 땅에 오랫동안 지속된 영적 가뭄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이후 400년간 예언이 끊긴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의 가뭄이 지속되었던 여파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36개월 동안 가뭄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 가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늘이 닫힘으로써 가뭄이 온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광야에서 외칠 때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온 이유는 그동안 가뭄으로 목말라 있는 그들이 요한에게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제사에 지쳐있던 그들은 세례요한에게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서 비로소 마음이 움직여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간신히 목만 축이는 물처럼 마음에서 뉘우칠 정도에 불과하였지 그것이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는 변하는 아니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자신이 움직였다고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이 무엇과 관련 있는가? 우리의 생각으로 머리로 만족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비만을 해결하려고 무척 노력하지만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동영상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를 바보로 만듭니다. 여기에는 판단과 생각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가시기 전까지는 세상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세례 후에 세상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변화를 원하십니까? 정말 원하십니까? 변화를 정말 원하신다면 하늘 문이 열리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세례 받으셨는가요? 사람들과 똑같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후에 예수님만 올라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는 내려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인가? 하늘이 갈라진 일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내려오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올라간다” “내려온다는 말을 왜 기록했을까요? 헬라어로 올라간다는 말은 아나바이노이며 내려온다는 말은 카타바이노입니다. 여기서 바이노가 공통입니다. “아나바이노위로에 해당하는 아나와 한걸음에 해당하는 바이노의 명사형인 바시스의 합성어입니다. “카타바이노아래로에 해당하는 카타바시스의 합성어입니다.

우리가 비만을 해결하려고 할 때에 우리 몸무게가 10Kg 빠지기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비만의 해결이 되려면 변화가 있으면 됩니다. 그 변화는 1g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변화가 되려면 한 발자국부터 움직이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세례 받은 이후에 무슨 변화가 있었나요? 예수님도 한걸음성령님도 한걸음움직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희망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변화의 선물입니다. 한 발자국의 변화가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다 하신 일인데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요? 오늘이 무슨 날인가? 주현 후 첫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하나님이 나타난 날을 기념하여 예배하는 날입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이 주현절에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가정에는 촛불을 켜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촛불을 켜는가? 예수님 세례 받으신 후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의 세례를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촛불을 보면서 무엇을 기억하라고요? 우리가 세례 받은 날을 기억하기 위해 촛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물속에 들어갈 때 우리가 죽었던 경험을 했던 것을 기억해 야 합니다. 우리가 물속에서 올라왔을 때 우리가 죄로 인한 죽음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은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하늘이 다시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셔서 우리와 한 걸음씩 변화의 길을 걷게 하시고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 것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2024. 1. 2. 화요일 아침 수정교회 담임 문철영 목사)

 

2. 엘리제사장의 재평가(삼상3:1-10 찬송가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 제사장은 그 최후가 비극적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섬겨왔던 하나님의 법궤를 이방나라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이 전쟁에서 최후를 맞이하였고 엘리 제사장 자신도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과 아들의 사망의 비보를 듣고서 98세의 나이에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나 겨우 씨로 남겨졌던 혈육의 씨인 갓 태어난 손자에게도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뜻을 가진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떠났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불운의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하여 엘리의 아들들이 행실이 나빠 여호와을 알지 못하더라”(2:2)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우리들은 엘리는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전수하는 데 실패한 모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두 아들들이 건달이었으니 엘리는 사람들에게 그같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 제사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노경에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앞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이 어두워지는 것에 대하여 문자대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본문의 앞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사로서 소명을 다했던 엘리 제사장의 영적 감각이 노경에 흐려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같은 이유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사사요 제사장으로서 그는 부패해 가는 정치적 종교적 시스템 속에서 권력과 부를 보존시키려는 기회도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이 노년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혜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제사장이 가족을 비롯하여 자신의 측근들에게 권력과 부를 세습시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가 누리던 권력과 부를 물러주기 위하여 호방 부대에 자녀들을 빼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전쟁터에 두 아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엘리 제사장은 노년에 눈이 어둡고 영적으로 감각이 희미해진 처지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무엘에게서 하나님 음성 듣기를 수용한 분이었습니다.

https://www.freebibleimages.org/illustrations/samuel-listens/
https://www.freebibleimages.org/illustrations/samuel-listens/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세 번이나 부름을 받아 자신의 방문을 두드릴 때 그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전수시켜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 사무엘의 입을 통하여 자신에게 하는 비판적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엘리는 자신이 누리던 권력과 부를 사적인 재산으로 축적할 욕심을 포기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 앞에 공적으로 계승할 후계자에게 양보할 용기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사익을 포기하는 용기있는 행동은 40년의 사사생활을 마감하는 노인만이 할 수 있는 지혜였습니다.

 

3. 여호와를 예배해야 할 이유(29편 찬송가 327장 주님 주실 화평)

본 시편은 모든 시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라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표제어는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권능 있는 자들에게 그 권능과 영광을 여호와께 돌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라고 시작합니다. 이어서 2절에서는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를 예배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며 여호와를 예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으며 영광의 하나님이 강력한 물들 위에 우렛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NIV에서는 “the mighty(강력한)”이라고 표현합니다. 물은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강력한 물이란 악의 세력이 강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리와 영광의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짓누르는 더 초강력의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휘하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이 있고 위엄차서 백향목을 꺾어 부술 만큼 능력이 있습니다. 소리는 히브리어에서 천둥의 의미로도 쓰입니다. 전능하신 권세를 가지신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시므로 예배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큰 임을 얻게 되며 평강의 복을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한다는 말과 본 시편은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수면위에 운행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란 루아흐’, ‘호흡의 의미가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 그리고 심연의 흑암 위에 하나님은 숨쉬며 살아 계셨다는 말입니다.

 

4. 하나님의 택한 종(1:4-11 찬송가 317장 내주 예수 주신 은혜)

마가복음은 인쇄술이 발달한 오늘날처럼 쉽게 책을 출판할 수 있는 때에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독자층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값비싼 양피지로 된 종이에 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한권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수백 마리의 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만큼 한 권의 책의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 한권이 오늘날 물가로 환산할 때 집 한 채에 해당하는 값은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실감나게 느끼지 못하는 현대 독자들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밋밋한 복음을 값비싼 양피지에 기록하여 당시 독자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자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독자들은 오늘날과 달리 마가복음을 회람용으로 읽었을 때 실감나게 느꼈고 감동을 받았다는 점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에서 당시 독자들이 그토록 감동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이미도 학습된 기초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아마도 이사야서와 시편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읽은 예언서와 시편서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 점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마가복음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약속으로 알고 있었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예언서와 시편서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신 분으로 다윗 같은 메시야보다 훨씬 능가하는 존재입니다.

64:1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늘을 가르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 42:1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택한 종입니다. 당시 아람어와 헬라어 번역에서는 종과 아들은 의미상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가복음에서 내 아들은 이사야서에서 나의 택한 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의 대관식 때에 낭독하는 시편 2:7 말씀대로 예수님은 대관식을 치루고 등극하신 왕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감히 뒤에 오시는 그 분 곧 예수님 신발 끈도 메고 푸는 종이 될 자격도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뒤에 오시는 그분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을 자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은 자 역시 성령의 세례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5.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19: 1-7 찬송가 381장 나 캄캄한 밤 죄의 길에)

바울이 에베소에 들렀을 때에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제자라고 했을 때 그들은 에베소교회에서 기독교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하였을 때 그들은 우리는 성령의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는가?” 그들의 대답은 요한의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질 때에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모르고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 믿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세례를 모르고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는가? 이방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었으나 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도 그들에게는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방지역에서 그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를 구분하지 않았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요한과 예수가 이방인들 모두에게는 유대 종교에 속한 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기독교인이 된 것이 유대종교로 개종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세례요한과 예수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분들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영향력이 유대 사회를 넘어서 이방세계까지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방인들은 예수의 세례인 성령의 세례를 모르고서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세례요한의 세례만 가지고도 이방 세계와는 차별이 있는 탁월한 종교생활을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세례를 전했으며 예수의 세례를 받는 자는 성령의 받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세례, 성령 받음, 그리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음의 말은 서로 관련성을 가집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주로 믿을 때 세례를 받고 동시에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 세계 속에서 유대교와 차별성을 가진 기독교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생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메시야 곧 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예수 세례를 받는 동시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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