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성탄절 첫째 주간

1. 예배 자리를 지키는 믿음 (눅 2:21-32 찬송가 116 동방에서 박사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실 때 마다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고 했습니다(창 12;7-9).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야곱도 제단을 쌓는 사람이었습니다. 형 에서가 공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도망할 때 야곱은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고 나서 그는 하나님이 꿈속에서 그곳에 나타난 경험을 합니다. 그가 돌 배개 배고 잠잤던 그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야곱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번성하여 그 허리에서 나오게 되는 왕을 보게 될 복을 약속 받습니다(창 35:15).
아브라함과 야곱이 제단을 쌓을 때에는 위기의 때 현실이 막막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단을 쌓고 나서 마음에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음성을 듣고 막막하게 보이던 미래의 비전을 보게 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도 어린 소녀의 나이에 임신을 한 것이라든지 걸어서 6일 넘게 걸리는 거리를 여행하자마자 출산을 한 것도 인생에 큰 위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위기의 순간에도 마음에 우울과 두려움이 없이 잘 견디어내었던 것은 마리아의 믿음에서 밖에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임신한 14살 소녀가 그 아이가 장차 메시야 세상을 구세주가 된다는 말을 천사를 통해 듣고서 평안을 되찾은 것은 그녀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태어난 아기가 8일째 되는 날을 맞았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루살렘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호적을 끝내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 출산한 몸, 그리고 8일되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나사렛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출산 후 마리아는 8일 만에 아기에게 할례도 받게 하고 초 태생 남자 아이를 바치는 제사의식을 치루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했습니다. 유대의 모세의 율법에는 초 태생을 난지 8일만에 들리라고 했고 그 때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출 13;11-13)
초 태생을 드려야 할 이유는 장자 남자아이를 죽이는 대신에 양의 피로 대속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양의 피가 묻은 집의 이스라엘 장자를 하나님이 지나가고 애굽의 장자만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양 대신에 집비둘기 두 마리나 산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 드리게 했습니다 (레 12:8). 성경에 모세의 율법대로 비둘기를 드렸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린 아기를 안고 먼 거리까지 모세의 율례를 따라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성전까지 온 것입니다.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마리아가 모세의 율례를 지키고 성전에서 할례와 제사의 의무를 다하게 된 것은 마리아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마땅한 도리를 한다는 믿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는 성전에서 예기치 않았던 위로와 확신을 경험합니다. 성전에서 아기를 안고 할례를 거행하고 제사를 드리고 난후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곳에는 나라의 해방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며 성전을 지키는 의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를 보기 전에는 눈을 감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그 의인 시므온이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본 그의 반응은 너무나 놀라운 반응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29-31절)” 이스라엘을 속량할 구세주를 보았으니 눈을 감아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아기가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락 하였습니다(32절). 그리고 84세 된 여선지 안나라는 분이 아기 예수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스라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구세주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다시 한 번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만난 이 두 분들이 고난 속에 받은 아기가 천사의 말대로 구세주라는 데 확신을 가지도록 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장성할 때까지 어려운 과정과 성장기에 겪어야 할 많은 일들이 남았는데 메시야로 키워야 할 마리아는 큰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듣고 믿은 이야기지만 현실 속에서 어려운 일들 속에서 의심부분을 제거하고 확신을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를 모신 사람들 믿음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의심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도 불확실성 속에 의심의 유혹이 있을 수 있는데 마리아는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의심의 유혹을 이기고 확신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마리아가 하나님을 경건하게 예배하는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므온과 안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올 수 있는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사 60: 1-3)
여름철 불빛을 보고 나방이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방 못지않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빛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은 청정 자연이 보존된 관광지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일본 대마도를 갔더니 그곳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하루에도 부산에서 대마도로 오는 사람들이 약 2500명 정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대마도로 사람들이 모여든 주된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마도가 자연이 파손되지 않고 잘 보존된 것이 제일 주된 이유라고 했습니다. 대마도는 특별한 자원이 없는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마도 영주가 조선 땅에 대마도를 편입시켜달라고 요청해 온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에서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마도는 아무 도움이 안 되고 돈을 들여서 돌보아야만 하는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마도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관광수입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모여드는가? 대마도가 자연 보존을 잘하는 섬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도 돌아와서 확인한 예루살렘 땅은 광야요 완전폐허였습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백성들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이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이 예루살렘에 재물이 몰려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이 어둡고 캄캄하여 앞뒤가 보이지 않는 는 혼돈에 빠질 것이지만 예루살렘이 빛을 받아 대낮처럼 밝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빛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어 예루살렘이 새로운 빛을 비추는 존재로 거듭날 것이라고 합니다.
황무지와 같은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몰려올 수 있는가?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재물을 놓고 갈 수 있는가?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특색 있는 곳으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무지와 광야 같은 예루살렘이 어떤 특색을 가질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머무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특색 있는 장소로 바뀌는 것은 그곳을 하나님 붙잡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3. 할렐루야(시 148편)
본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시편의 중심적 관심사기 때문이다. 찬양으로 초대받은 시편의 청중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다.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로 확대하며 우주적으로 하늘과 땅에 모든 존재들에게로 확대한다.
 오늘날 우리들에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만 그것도 그들 마음에서 믿음이 솟아나는 사람들만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수한 일이 아닌가? 왜 모든 사람들과 하늘과 땅에 모든 존재들이 찬양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이다. 시편에서는 그 이유가 뚜렷하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스스로 된 것인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우연히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창조에 의해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모든 피조물들은 각각의 종과 경계가 분명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된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5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모든 신들보다 가장 높으신 자리로 오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주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셨다. 그러므로 모든 신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들에 속한 존재들까지도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하고 찬양을 드려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 나심이로다”(13절).
창조자요 올리심을 받아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창조물들을 직접 통치하시는 그 분은 누구인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다. 크리스마스 날에 우리가 모여 찬양하고 베들레헴에서 온 세상에 예배와 찬양의 장면을 방송으로 내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갓난 아이 속에서 발견한 메시야(눅 2:21-40)
오늘날 연로한 어른이 갓난 아이 앞에서 존경과 찬송을 드린다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것은 왕손을 중시 여기던 적어도 1세기 이전의 왕조 시대의 사람들이 왕자가 태어날 때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경건한 어른이 정결예식에 참여할 목적으로 성전에 들렀던 마리아에게 안긴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에 반응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그 어른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리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올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자이다. 
그의 믿음은 성령의 지시를 따라 되었다고 한다. 그가 성전 안에 마리아의 품에 안기어 들어온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제 눈을 감을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그동안 숱한 장군들 앞에서도 당당하던 의롭고 경건한 그 어른이 갓난아이 앞에서 이처럼 고개 숙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아기 예수 속에서 발견한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였기 때문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이어서 그 어
른은 마리아에게 이같이 말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메시야를 만난 감격을 오늘날 어디에 비유해야 할까? 우리가 만나기 위해 수 십 년을 기다려온 사람이 있는가? 남북의 분단 상황에서 이산가족들이 상봉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수 십 년 동안 기다리던 신부가 신랑을 만나 혼인예식을 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의로운 어른 시므온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만나고도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를 발견했다고 감격하고 있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로마 총독아래 극형을 선고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그 분이 이스라엘의 경건한 어른 시므온이 감격해 하였던 그 메시야였다.
우리가 믿는 메시야는 누구인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나 부활하여 살아난 그리스도이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온 우주와 세상을 그 분의 발아래 두고 통치하시는 그 분이다.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면서 성탄절을 통해 그 분이 오시는 그날을 예고편을 맛보는 예행연습을 하였다.

5.제자의 길(갈 4:4-7)
바울 사도는 때가 차 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와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율법아래에서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속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인 자유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일행도 한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아래에서 종노릇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자유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아래 종노릇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과 다름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 모두의 삶에서 공통적인 것은 참자유가 없고 얽매임이다. 예를 들면 율법주의자들이 문자적으로 지켜야한다는 강요하는 할례나 정결례 그리고 안식일 등에 얽매여서 생활하는 
것처럼 우상숭배자들이 또한 육체의 일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일들에 얽매인 생활을 한다. 
 그렇다면 바울로부터 이같은 위험성을 경고 받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인가?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인가? 놀라운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 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우상 숭배적 요소를 버리고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유를 완전누리고 생활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종의 멍에가 되는 우상 숭배적 요소를 버리지 않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바울과 일행들이 예수를 알기 전에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과 일행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른 이후에는 종이 아니라 아들의 명분을 가지고서 자유자의 삶을 사는데 더욱 철저하게 되었다. 오직 예수 안에서 자유는 율법적 강요의 길이라기보다 성령의 감동에 따른 제자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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