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주현 후 셋째 주일

 

1. 제자를 부르신 예수(1:16-20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갈대아 우르지방에 넓은 땅과 여러 친척들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브람입니다. 무작정 그 많은 농토며 재산을 처분하고서 고향을 떠나는 아브람을 보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즉시 시행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재산이 아무것도 없는 데 무엇을 바라보고 고향의 땅의 재산을 버리고 갔는가? 그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믿고 소망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에게 발견된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아버지 세베대와 동료 일꾼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무슨 결정을 내릴 때에는 우리들은 생각할 시간을 두고 결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신중한 결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계를 이어가는 데 있어서 안정된 일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안정된 일자리를 가지고 일하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 일터를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즉시 따르지 않으면 안될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요?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체포되어 활동을 못하면서 그 바통을 예수님이 이어받아 갈릴리에서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은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면서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즉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즉시 따른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가?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신뢰도 없는 모르는 사람이 나를 따르라고 하기 때문에 무작정 따라간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따라가는 것이 먼저인가? 믿는 것이 먼저인가? 무엇을 먼저 하는 것이었을까? 믿는 것이 먼저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었다고 보는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천국복음을 갈릴리 땅에서 전파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으리라고 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먼저 접하여 듣고 믿는 일이 있었다고 봅니다. 고기를 잡는 사이에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가? 고기 잡으러 배에 오르기 전에나 퇴근 후에 갈릴리 동네에서 그들이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즉시 주님을 따른 이유를 추적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고기 잡는 어부인데 사람 낚는 어부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기로 한 이후에 주님께서 주신 약속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즉시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일터를 고수할 것인가? 일터를 내버려 둘 것인가? 명령을 받아들이면 일터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도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떠나가라는 말을 강한 명령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일터를 지키느냐 떠나느냐의 결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들이 생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가?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어떻게 이해되었는가? 때가 차서 가까이 오게 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정보를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부였기 때문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의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비록 율법연구자나 제사장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가르침을 상기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예수가 세례요한의 가르침과 동일 선상에서 천국의 도래를 가르치고 있음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천국의 도래의 때가 성취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하나님나라가 임한 때가 성취되고 있는 때라는 것을 어부인 그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모두 다 세례요한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3: 2).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3:11)“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그들은 스승인 세례요한의 가르침인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를 이미 실천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이 가리켰던 세례요한 뒤에 오실 능력 많으신 인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이 예수 앞에 부름을 받고 있는 순간이 일생동안을 두고 볼 때에 마지막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런 때와 같은 기회로 받아들였던 적이 있었는가?

 

주님의 부르심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제자들

2002년도 월드컵 4강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당시 독일까지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직장을 휴가내고 그리고 비행기 값 숙박비 등 비용을 감수하고 그들은 독일로 갔습니다. ? 그들은 월드컵 4강 경기를 직접 관람하는 것이 평생에 다시 오기 힘든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터에 열심히 일하는 그들에게 주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주님의 복음을 듣고 믿었던 그들에게 주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선주와 동료들을 버려두고 즉시 주님을 따라가게 된 이유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간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그들이 사도가 되었으며 기독교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사는 동안 모든 생활은 하나님께서 책임 지셨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두고두고 영원히 기억되어지는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주춧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믿은 우리에게도 다시 찾아와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은 자라면 즉시 순종한 사도들처럼 순종하여 주님의 쓰임을 받은 복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 내 백성을 다 회개시킨 설교 (3:1-5, 10 찬송 281장 요나처럼 순종않고)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41절에서 요나는 매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내가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나음이니다고 한다. 요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요나는 니느웨 성읍 동편 높은 언덕에 올라가 니느웨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멀찌감치 살펴보는 중에 있다. 그런데, 요나가 왜 몹시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하룻길을 다니면서 니느웨 거리에서 설교한 그 설교를 듣고서 백성들이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전한 설교는 불과 다섯 마디에 불과하였는데, 니느웨 성읍의 12만 명의 백성들이 모두 다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고 회개하는 삼베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왕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가축들까지도 모두가 다 금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이만큼 큰 결과를 얻는 일은 설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그렇게 짧은 설교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각성시키는 경우가 드문 일이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장면이 왜 몹시 싫었는가? 하나님이 니느웨에 재앙을 내려주시기를 그가 바라고 있었으나 그의 설교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이 재앙을 면하였기 때문이다. 요나의 분노는 하나님 앞에서 분노처럼 보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분노였다. 그가 고국에 있을 때에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기 싫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이유가 니느웨에 일어나는 이 장면을 미리 내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관용이 많으신 분이라 노하기도 더디 하시고 뿐만 아니라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않는 분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니느웨 백성들을 회개시킨 요나의 설교는 무엇이었는가? 그 다섯 마디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였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미지출처 : biblestudy, Nineveh Repents
이미지출처 : biblestudy, Nineveh Repents

 

3. 참 예언자 (18:15-20 찬송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이스라엘이 다문화적 다신교적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었다. 그 때에 문제는 여러 종교의 말씀중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기준을 알려준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참예언자인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4. 회개와 복음 (1:14-20 찬송 449장 예수 따라가며)

메시야를 대망하고 기다리던 유대사회가 배경이 된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례요한이 메시야적 소망이 성취되는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세레 요한이 체포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자 유대사회에서 메시야에 대한 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와 함께 도래하게 될 메시야 왕국의 성취가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압제 아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로마를 정복하고 유대 나라를 해방시킬 지도자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 지도자로 지목되었던 세례요한이 감옥으로 가자 그들은 새로운 인물을 메시야로 대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인물이 있다. 유대인들의 마음에 그리던 메시야가 세례요한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메시지의 핵심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다.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은 예언서가 기록한 예언이 성취할 때가 찼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역사의 정점이 도래했다는 의미다.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 정점을 기점으로 새로운 장을 펼칠 것이고 모든 질서가 뒤바뀔 것이다.

마가복음의 교회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에서 진행하는 지점에 있다. 그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며 그들은 요한을 제외하고는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다. 위대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사도로 시작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권능을 맛보며 메시야의 나라의 성취를 경험하고 있는 때에 독자들이 알고 싶은 것은 영웅적인 지도자들의 소명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하는 예수를 따르기 전에 모습과 따르기 시작할 때의 모습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마가복음은 이같은 관점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였다. 예수님의 말씀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결과로 사도들은 역사의 기점에서 거룩한 제사장과 같은 신분의 사람으로 전향이 되었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부름에 순종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제사장의 신분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며 하나님 나라의 제물이 되는 거룩한 순교자가 되었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

불순종의 사람들이

거룩한 나라의 제사장 같은 사람으로

 

5. 생활윤리 절제(고전 7:29-31 315장 내 주되신 주를 참사랑하고)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바울은 이같은 말을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생활의 윤리는 무엇인가? 절제인 것 같다. “그 때가 단축해진 고로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바울은 재림하시는 주님을 바람직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모든 생활요소들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제를 통해서 가능하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불필요한 이해관계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적 절제생활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은 열광주의자들처럼 일상생활을 포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지나갈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김으로써 재림하시는 주님과의 영적관계가 무디어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믿음이 식어지고 사랑이 식어지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윤리적 생활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바울은 재림하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단정한 생활을 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바울은 재림의 때가 단축되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신랑 앞에 선 신부처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주님 앞에 단정한 모습으로 설 것을 권면한다. 믿음과 사랑과 절제의 옷을 입고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것처럼 재림하실 신랑되신 주님을 맞을 준비하기를 권고한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