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사순절 첫째 주간 묵상

 

1. 광야로 가야하는 이유 (1:9-15 찬송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생활을 한 것도 광야가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앞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광야 생활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축복의 땅에서 도달하는 데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목격하고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취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왕이신 예수님은 세례 받은 후에 이스라엘의 왕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가고 있습니다. 40일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 광야로 가야 하는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대로 나아갔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자들과 비교 경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검증받고 광야 생활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를 습득하게 됩니다. 첫째는 생활의 단순성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는 들짐승도 있으나 마귀도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마귀와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을 광야에서 이기시고 승리하십니다.

그런데 광야 시험을 마고 승리한 예수님에게서 어떤 모습을 볼 수 있는가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가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곳에 귀신이 나가고 병마가 나갑니다. 억눌린 자가 풀려나게 됩니다.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온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실화되는 증거로 자유와 평화(건강)를 맛보게 됩니다.

40일간의 사순절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광야 길을 체험하는 선물로 주어집니다. 광야의 기회는 우리들에게는 영적 훈련의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단순성과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인받는 일을 먼저 하시고 하늘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기 바랍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광야 길에

우리를 초대해

이미지 출처 https://kevincars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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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자도 (8:31-38 찬송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때에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수난 예고를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최초의 제자였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그 자리에서 어떻게 또한 그가 어찌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베드로의 모습은 바로 인간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항상 깨어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을 때 그의 머릿속에 그리스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윗 같은 왕이었을 것이다. 로마를 정복하고 유대 백성들을 해방시킬 왕 곧 다윗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찾아온 메시야가 로마를 정복해야 하고 유대 백성을 해방시켜야할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먼저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또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짖는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다음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지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제자가 가야 할 길 곧 제자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제자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여할 것인가? 마가의 박해 상황과 달리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길을 부인하는 것에 관하여 주석가 윌리엄 로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 쉽게도 다음과 같은 묘사로 깨달음을 가진다. 존재의 긍휼과 관용에서 드러나기를 추구하는 우리들 안에 있는 성령의 삶을 부인하는 것.”

그러나 오늘날 제자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삶을 사는 것이다.

 

3. 언약의 성취 (9:8-17 찬송 321(날 대속하신 예수께)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겠다고 결심한 것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악함을 보셨기 때문이었다(6:5).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 이후에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언약을 세워 주신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그런데, 11:4에서는 그 후손들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홍수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의 악이 제거된 것은 아니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은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다음의 질문이 생긴다. “사람의 죄악과 악한 생각을 보시고 심판을 결심하였던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사람의 마음에 악이 완전히 제거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영원한 언약을 주셨는가?“

죄 때문에 사람을 홍수로 쓸어버리겠다고 결심한 분도 하나님이요 사람의 마음에 악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노아의 언약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은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 지신다는 의미가 된다. 이 언약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준행할 때에만 언약이 유지되는 창 17장과 시내산 언약과는 다른 성격의 언약이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고 하나님 앞에 행해야 할 어떤 조건도 없다. 하나님은 왜 이같은 결정을 하셨는가? 인간의 죄 문제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다룰 수 있고 오로지 하나님이 노아와 체결한 언약에서 죄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이 성취된 곳은 어디인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세례 받으셨고 십자가 지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사면에는 어떤 조건도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받아들이고 믿고 용서받은 자로서 삶을 누리는 것이 할 일이다.

 

4. 영혼을 들어 올리는 생활 (25:1-10 찬송 354장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244-5절에서 시인은 그의 영혼을 허탄한 데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들어올린다. 히브리어로 נָשָׂא 나사 들어올린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에게 내 영혼을 들어 올린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נָשָׂא 나사로서 들어올리다 ”lift up“의 의미가 있다.

들어올린다는 말은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복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다.

누가 하나님에게 영혼을 들어 올릴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영혼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우리 번역에는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진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생명과 몸을 맡기고 사는 사람이다. 오늘 시인은 원수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그는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오늘 시인은 어려운 곤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경건한 시인이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과거에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큰 것을 알 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11) 죄가 크지만 오늘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이다. “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8)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에서 이름이란 명성 또는 영광의 의미가 있다. 시인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이 사해 주시기를 간구할 뿐만 아니라 사함을 주실 줄 확실히 믿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하나님에게 맡기고 사는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감싸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6)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실히 믿는다. 시편 233절처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5. 애매한 고난을 극복하는 법(벧전 3:18-22 찬송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실히 살고 있는 사람에게 고난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해석을 할까요? 오늘 베드로 전서의 독자들은 그리스의 말씀대로 법을 지키며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 법과 도덕에 위배됨이 없는 성실한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행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같은 모범적인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행조차도 칭찬을 받기는커녕 구설수에 오르고 욕설과 비방거리가 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 있는 독자들에게 베드로서는 격려와 권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먼저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한다. 비방자들과 맞서서 말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으로 견딜 것을 권고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토록 애매한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베드로서는 바라보아야 할 고난의 모델로서 둘을 제시한다. 첫 번째 모델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둘째 모델은 홍수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방주를 짓자고 하였으나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면서 고난을 겪었으나 방주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두 모델의 첫 번째 공통점은 의인이 불의한 자들에게서 비방과 핍박의 고난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물과 관련이 있다. 물에서 건짐을 받는다. 베드로서는 이것을 세례라고 하고 있다. 세 번째로 물로 상징하는 세례가 대표하는 것은 부활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이 득세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무고하게 압박하려고 할지라도 모든 세력들이 부활하시고 하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고난을 이긴 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 받게 될 칭찬과 상을 소망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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