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교회력 주현절 6째 주간

1. 모험 신앙의 보상(막 1:40-45 찬송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오늘날이나 고대 사회에서 나병환자(문둥병자) 사회적으로 격리한다. 그 이유는 전염성의 이유이다. 우리나라에도 나병환자촌이 있다. 소록도가 그 중에 하나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서 그곳에서 촌을 이루며 살아야만 한다. 유대사회는 나병환자촌은 부정한 지역으로 지정했다. 레위기 13-14장에서는 나병환자가 건강한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정결법에 규정되었다. 오늘 본문에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에게 와서 꿇어 엎드렸다고 했다. 이 사실은 나병환자가 정결법을 어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그 일행들 모두는 부정해질 위기에 처하게 되고 사회적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감시망을 통해서 나병환자는 정상적인 사람들 모인 곳에 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당시 유대땅에 그같은 이유로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가까이 오는 자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늘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대사회의 통제의 장벽을 허물고 예수님 앞까지 접근해왔다. 정결법 규정과 시행으로 통제가 엄격한 유대사회에서 이 나병환자는 어떻게 통제의 벽을 허무는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이 나병환자는 다른 나병환자와 달리 특이한 점이 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는 간구 속에 그 점이 있다. 이 나병환자는 지금 오시는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험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50대 50으로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적 모험이다. 그가 깨끗해지지 않으면 그가 접근한 모든 자를 부정한 그룹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그가 깨끗해져서 정결한 그룹의 한 사람이 되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그의 모험은 자신은 물론 그를 만나는 개인이나 그룹이 그같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같은 행동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우리의 번역본에는 문둥병자의 반응에 대하여 예수님이 단순히 불쌍히 여겼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찾아낼 수 없다. 단지 43절에서 “엄히 경고하사”라고 한다. 여기서 ‘엄히’는 영어로 ‘sternly(엄히)’ 또는 ‘angrily(분노하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라틴어 초기본과 베자본에서는 분노의 반응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 부정한 그 몸에 손을 대는 일을 감히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문둥병자가 간구하는 내용의 말인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졌다.” 

본문에 나타난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치병선언을 받고 치료를 받게 되는 요소가 그 나병환자에게 있었는가? 아니면 전혀 없었는가? 예수님의 선언은 나병환자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예수님앞에 나오기 위해 모험할 자가 누구인가? 자존심 사회적 시선 명예 지위를 넘어서지 않고서 그같은 모험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주변에서 통제의 울타리가 되는 모든 장매물에 도전하는 모험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그 결과 나병환자는 그의 믿음대로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 그는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다. 

2. 낮아진 자의 보상 (왕하 5:1-14 찬송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대표팀을 4강까지 끌어올린 축구지도자는 외국인 감독 히딩크였다. 그가 훌륭한 지도자였으나 막상 선수가 경기에 임하기 전에는 국내 축구관계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선수들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선수들 중에는 “축구는 안 가르치고 무슨 짓인가?”라고 하면서 불만을 터트린 선수도 있었을 것이다. 히딩크가 감독직을 맡기전 최고의 스타플레이였던 한 선수가 그같은 태도 때문에 대표팀에서 탈락하기도 했다는 소문이다. 그의 훈련방식은 초등학교 졸업자 수준의 무식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25m 간격으로 말뚝을 박아 놓은 후 하루 종일 왕복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새로운 축구 기술이나 전략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강인한 체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둔 훈련이었다. 선수들이나 축구관계지도자들에게 가장 시시하게 보였던 감독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런식으로 훈련을 마친 한국 대표선수들은 16강에 들어가기도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시시하게 보는 감독 히딩크를 믿고 따랐던 선수들에게 행운이 따라왔다. 그것은 그들의 우려와 기대를 뒤엎고 우리 선수들이 4강에 돌입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에는 용기와 예견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주변국들과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둔 나아만 장군은 주변국에서 아람이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는 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왕의 신임까지 얻어 국가에서 왕 다음으로 최고의 명예와 지위가 되는 군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위대한 권세를 가진 인물에게 하루아침에 권세조차도 무너져내려앉을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찾아온 문둥병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는 공인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성공에 필요한 확실한 정보만을 손에 거머쥐는 데 익숙하였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확실한 정보가 아니면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였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확실하고 가시적인 것이어야 했다. 크고 강력한 군사력 크고 강력한 경제력 그리고 크고 강력한 정치력에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힘이란 막강하게 큰 것과 높은 곳에서 자연히 흘러내려오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그의 치명적인 병을 고치는데 필요한 확실한 정보를 따라 치료를 위한 노력을 다하였으나 해결의 길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된 정보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취하였다. 그것은 가장 불확실한 적국의 포로로 잡혀온 부인의 가사일을 돕는 계집종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였다. 그동안 그가 능력을 얻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길만 추구했던 그에게 가장 그럴듯하지 않는 정보가 이제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잡이가 될 줄을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그가 살아오면서 가장 불확실한 정보에 의존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불확실한 길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왕의 친서와 많은 선물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을 밟았다.

그는 선지자의 집이 있는 이스라엘의 사마리아까지 도착하였으나 적국의 평민의 한 사람 선지자에게 분노를 느끼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가 예언자의 집앞에서 그 하찮은 평민 예언자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예언자의 종을 통해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명령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맞이하는 예언자의 태도에 대해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이 몹시 손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를 가라앉히고 말머리를 돌려 예언자에게 자신을 굴복시킨 것은 그보다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왕의 명령이 아니라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그의 종의 소리였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가 하찮게 여겼던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복종하는 순간에 한번에 날려버릴 뻔 했던 평생 쌓은 모든 업적과 권세 그리고 건강을 되찾는 기적이 왔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3. 겸손한 자의 상 (고전 9:24-27 찬송 150장갈보리산 위에)
지금 동계올림픽이 평창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들 금메달을 향하여 4년동안 준비했고 그 준비한 결과 상을 타기위해 열심히 경주에 임하고 있다. 임효준 선수가 쇼트랙에서 금메달을 땄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금메달을 받기위해 신앙의 경주를 준비 하고 있다.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준비되어 있고 누가 받든지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 상을 받기위해서 경주하기 위해 부름받은 선수와 같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은 썩지 않을 면류관이다. 그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절제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이것 저것 다 즐기고 구경하고서는 얻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양보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얻는다. 절제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위한 영적 삶은 교회생활 속에서 훈련되고 향상된다. 이 교회는 우리의 영적경주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기도회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교회를 멀리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험 나의 자랑거리 나의 지위와 명성 나의 교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베들레헴 예수탄생 교회에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문이 있다. 그 문은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다. 겸손한 자만이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에 들어갈 수 있고 천국에도 겸손한 자만이 들어갈 수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문이었다.

또한 겸손한 자는 내면의 목표와 방향인 하나님 앞에서 받을 면류관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유연성 또한 가지는 자이다. 나의 옳음을 주장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배타주의와 율법주의로 몰아갈 가능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절제하는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중시하는 유연성을 가지는 사람이다. 나의 내면은 자유를 누리되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유연함을 가지고서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다.

“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4. 자기 발견의 때와 장소(막 1:9-15 찬송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요한에게 받으신 후에 예수님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과 동시에 예수님은 하늘의 갈라짐과 성령이 자신에게 임하심을 본 것이다. 세례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가 드러난 예수님은 하늘의 왕으로서 왕궁으로 인도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 몰린다.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광야로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광야는 야생 세력들과 기적들의 원초적 장소이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40년간 방황하였던 시험 장소이다. 유대나라를 로마에서 해방시킬 혁명적 청년이라면 누구든지 먼저 광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당시 유대사회의 상식이었다.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세례요한도 광야로 가서 야생의 생활을 하였다. 광야의 생활의 특징은 단순성과 신뢰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광야는 압제적 세력과 투쟁이 있는 장소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광야에 기다리고 있는 세력과 싸움을 싸워 승리한다. 광야를 통과한 후에 예수님은 귀신이 두려워 허둥대며 도망간다. 광야를 통과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사역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치료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광야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할 장소는 바로 외로운 투쟁을 해야 할 우리의 내면세계이다. 여기는 압제의 세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존재하는 곳이다. 이 내면의 광야를 통과할 때에 자유와 온전성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반드시 만나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 몰았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부드럽고 온화한 방식으로 내면의 투쟁장소로 인도한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능력과 에너지를 얻었다면 우리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능력과 에너지를 얻게 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예수님처럼 40일간.

5. 치료받는 자의 감사 (시 30편 찬송 471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
 본 시편은 감사시다. 눈물이 변하여 춤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불치의 병에서 하나님이 치료를 주셨기 때문이다. 시편은 개인이 불치의 병을 치료받은 것에 대한 감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 집의 봉헌의 시와 노래 ([A Psalm and Song at the dedication of the house of David])”로 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솔로몬 성전, 포로이후 에스라성전, 또는 기원전 2세기 마카비 성전) 봉헌과 관련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치료받은 개인의 상징적 의미는 성전일 가능성이 높다. 본 시는 하나님께서 상처받은 성전을 회복해 주시고 봉헌하게 해 주심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에서는 나아만의 치료 이야기의 이미지를 풍기기도 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였나이다.” 스올로 가는 영혼이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덕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찬송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불치의 질병 중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노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치료받은 이후에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평생이라고 한다. 끝으로 시편기자는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할 것을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믿음과 간구로 치료받은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간구하여 영과 육의 병이 치료함을 받는 간증자가 되자.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성전 봉헌감사를 드리는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앞에 하나님의 성전되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자.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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