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주현후 다섯째 주간 

1. 낙심하는 이유(사 40:21-31 찬송 64장 기뻐하며 경배하세)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부모가 다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다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심지어 부모에 대하여 우리 부모 맞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자식과 부모 관계에서 이해하면 이해가 잘 됩니다.
오늘 성경에 청중은 백성들이고 청중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알지 못하였느냐? 청중들이 유다 백성들입니다. 바벨론에 포로생활하고 있습니다. 50년이 지나도록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일 큰 제목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외우고 살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할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백성들이 몹시 피곤한 상태에 있습니다. 
 열심히 믿으려고 했는데 예언자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깨닫지 못하는가? 왜 예언자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까요? 이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앞날이 열리지 않고 앞이 깜깜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일에 대하여 관심을 쓰지 않는 것 같다고 봅니다. “내 길이 하나님 앞에 감추어졌으며 내 송사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아예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믿는 사람에게 있는 말입니다. 그들이 지치고 낙심해 있습니다. 백성들이 낙심한 것을 보고 예언자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왜 낙심하고 하나님을 찾다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구하지 않겠다고 주저앉게 되었는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백성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 우리에게 관심없어. 하나님은 우상보다 힘이 없나봐. 일이 잘 안되어 가면 자식은 부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예언자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포기하니까 하나님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과학이론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 앞에 곳곳에 세워진 것이 금으로 된 우상입니다. 그들이 그 신들을 보는 순간 그 신들이 이렇게 크니까 우리 하나님을 이겼나보다 생각합니다.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낙심되니까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그것이 해결 안되는데 나보다 저 사람들이 잘되는 것이 저 사람들이 믿는 우상이 너무 힘이 세니까 그렇게 하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들이 믿음이 바닥이 되니까 그렇게 됩니다. 믿음이 바닥이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 대대로 믿어왔는데 믿음이 좌절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포로중에 낙심하여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나에게서 감추었다고 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은 하나님 없다는 말은 안합니다. 나에게는 왜 길을 안보여주나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믿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나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대하여 부실하게 대우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처럼 낙심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들과 비교할 때 나에게 적은 것을 줄 때 하나님이 힘이 약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존재하는 데 나에게 용돈을 적게 주니까 왜 아버지는 가난할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데 왜 이렇게 우리에게 힘을 주지 않는가? 그 바탕에는 하나님을 이 우상 신들 중에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종교 중에 우리가 믿는 종교가 하나님의 종교라고 할 때에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도 여려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신 중에 하나이다라고 할 때 낙심할 때는 비교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힘을 왜 주지 않는가?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우상신들이 존재하는 것은 인정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모든 신들을 창조한 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들 위에 최고의 신으로 통치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모든 일들은 신들의 경쟁에서 오는 결과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는 우주의 모든 신들 보다 가장 크고 그 신들을 만든 분이니 그 창조주를 다시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들을 동원하여 너희들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라고 합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 경험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를 가지고 바라볼 때 놀라운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막강한 군대와 세력을 가진 나라가 바벨론이지만 그러나 그 나라가 뿌리채 흔들릴 수 있는 정세가 보이는 것입니다. 주변에 작은 나라 부강해질 것 같은 일이 있습니다. 얼마있지 않으면 이 바벨론 나라가 새로 부강해 지는 그 나라에 의해 무너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힘이 센가요? 하나님이 한 번 입김을 불면 이 나라의 왕도 장군도 장관도 날이 간다고 합니다. 여름 가뭄에 더운 열기에 의해 나무가 뿌리채 마르고 시들어 죽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한 번의 입김에 의해 큰 나라도 백성도 날아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언자는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여러우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다른 신들을 보니까 믿음이 약해집니다. 대마도에 갔을 때 구름다리를 탄 적이 있습니다. 구름다리 중간에서 옆을 보고 아래를 보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됩니다. 오직 줄을 잡고 위로 앞만 보면 통과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경우 너무 지식이 많으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적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이것 저것 계산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힘을 주십니다. 영어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그들의 힘을 새롭게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힘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그 힘을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낙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더 문제가 생깁니다. 삼손의 힘은 어디에서? 머리카락에서 나옵니다. 머리카락은 꼭대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여야 합니다. 내속에 있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과 부디칠 때에 그 힘으로 일을 해냅니다. 마치 전기 스위치를 켜는 순간에 불이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스위치를 켜기 전에도 전기는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스위치를 예언자가 켜주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을 주어 용기를 내게 합니다. 
 그 때에 페르시아가 새로 강대국으로 일어나 바벨론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2. 인생을 바꾼 정보(왕하 5:1-14 찬송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힘센 전사로서 나아만은 그의 용기와 예견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주변국들과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둔 사람이다. 아람을 주변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는 데 일등 공신이 나아만이다. 강력한 나라 아람나라 왕도 나아만의 작은 요청도 거절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진 자가 나아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장수 나아만에게도 말못할 고통스런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자칫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업적과 권세를 하루 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온 몸에 살이 썪어들어가는 문둥병이 그에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아만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는가? 그는 유능하고 성공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능력을 획득하는 일이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이다.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그가 원하는 능력과 권세를 얻을 수 있었고 왕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최고의 군사령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평범한 병사로서 용기와 예견을 발휘하여 군대의 최고의 지위에 오른 군총사령관이 된 나아만은 이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능력을 추구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는 능력은 어디에서 온다고 믿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확실하고 가시적인 것이어야 했다. 크고 강력한 군사력 크고 강력한 경제력 그리고 크고 강력한 정치력에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힘이란 막강하게 큰 것과 높은 곳에서 자연히 흘러내려오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명예와 권세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자신만이 아는 문둥병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가 찾을 능력이 있다고 하는 곳에서 그 능력은 오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추구하기 위해 바라보지도 않았고 전혀 생각지 않는 곳에서 왔다.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의 실마리는 전쟁포로로 잡혀와 그의 아내의 몸종으로 일하는 하찮은 이스라엘 소녀가 전달해 주는 정보에 있었다. 그동안 그가 능력을 얻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길만 추구했던 그에게 가장 그럴듯하지 않는 정보가 이제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잡이가 될 줄을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그가 살아오면서 가장 불확실한 길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고 왕의 신임을 받은 그는 많은 선물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을 밟았다. 
  문제는 그의 문제를 해결받게 될 최종 종착지에서 내면의 큰 갈등의 시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의 질병을 치료해 줄 나라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고 그리고 치료자가 평민의 한 사람인 예언자다. 그런데 그는 예언자의 집 앞에서 그 하찮은 평민 예언자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예언자의 종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명령을 따른 후에야 예언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 남아있었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는 돌아가려고 그가 탄 마차의 말 머리를 아람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것이 시험이었다.   반전은 나아만이 이 시험대를 통과하고 다시 말머리를 돌려 예언자에게 자신을 굴복시킨 것은 그보다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왕의 명령이 아니라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그의 종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가 하찮게 여겼던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복종하는 순간에 한번에 날려버릴 뻔 했던 평생 쌓은 모든 업적과 권세 그리고 건강을 되찾는 기적이 왔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3. 충전받는 기회(막 1:29-39 찬송 364장 내 기도하는 이시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이를 치료하는 분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갈릴리 온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 분은 예수님이었다. 안식일이 저녁 해가 떨어지자 마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안식일이 끝나는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밤새도록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마자 예수님은 그 모든 병든 사람들을 남겨두고 한적한 곳으로 몸을 숨기셨다. 아직도 치료받지 못한채 기다리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지 않고 예수님은 왜 한적한 곳으로 갔을까? 예수님은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바쁜 일정을 다 소화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왜 기도를 꼭해야 하는가? 그것도 하나님이신데 왜? 이것은 예수님만의 비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이 일보다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을 통해서 그많은 일들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충전받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라 뒤따라오는 제자들과 후대의 우리들을 위한 모범을 주기 위함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봉사와 전도와 교육과 치료 등 할 일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즌 자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필요로 한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그 모든 일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정제성을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좀 냉정하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보다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4. 바울이 받는 보상(고전 9:16-23 찬송 520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
  지금까지는 바울이 계속 수세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부터는 바울이 자기 변호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자기 변호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바울과 달리 고린도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성과 바울의 권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울이 자비량으로 천막을 기우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까지도 그들에게는 꼬투리 잡힐 일이었다: 왜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이 그 필요를 채워 주시지 않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빌립보에서 연보를 많이 거두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느 곳에서는 천막을 깁고 어느 곳에서는 연보를 많이 거두어들이는 일관성없는 사람으로 보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방의 사도로서 모델이 되는 바울에서 흠집을 발견하기 위해 바울을 추적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율법 준수의 전제아래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유대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대로 믿는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여하튼 간에 바울은 보수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사도임이 분명하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아무 보수도 요구하지 않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바울에게 보수는 무엇인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개인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이 받는 보상은 무엇인가?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으나 바울의 참된 보상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바울이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바울이 여러 모양을 사람을 다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바울이 유연성을 추구하는 바울의 방식이다. 바울은 투자를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생명을 빨아먹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바울은 그가 받은 복음을 통해서 받은 생명을 순수하게 복음으로 고린도 신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함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5.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시 147:1-11, 20 찬송 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시 146-150편은 찬양시편으로 본 시편은 영광송에 속한다. 찬양하라는 명령문으로 된 할렐루야가 시 150편에서 10번 그리고 본시편에서 3번 나온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는 자기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과 자연과 우주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전반적인 사랑 사이에서 번갈아 나온다.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 이름을 부르신다. 뿐만 아니라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비를 내려주시며 들짐승과 까마귀새끼에게도 먹이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은 저자는 누구이며 언제 작성되었는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 성전과 관련된 일을 하는 자이다. 이 저자는 제 3이사야 (사 55-66장)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이다. 그런데, 본 시편에서 찬양하는 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기뻐하는가?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말의 힘이 세거나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고 기뻐하지 않는다. 곧 마병이나 보병의 힘을 자랑하는 강한 군대를 가진 강력한 백성이나 나라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가난하고 연약할 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인자를 신뢰하고 소망하는 자를 기뻐한다. 하나님 앞에서 순종과 경외하는 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를 기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요소를 반드시 확인하고서 찬양을 드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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