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주현후 둘째 주간

1. 편견의 벽이 무너질 때(요 1:43-51 찬송가 90장 주예수 내가 알기 전)
  현대인들은 어느 시대보다 편리를 누리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힘든 시대를 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정신적으로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가? 몸으로 직접 현장과 부딪히기보다 상상 속에 갇혀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는 독립적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나 자신이 사는 지역을 우월하다고 보고 다른 사람이나 단체나 다른 지역을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을 가지는 것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고 여기는 것입니다. 편견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특정집단에 대한 한쪽으로 치우친 의견이나 생각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지나친 경우가 망상증입니다. 현실공간이 없는 상태인데도 사이버 공간에서 나누는 모든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확인하기 전에는 속아 넘어가기 쉬운 것이 사이버공간 상에서 일어나는 위험성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당시 유대 사회도 사람들이 심한 편견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후에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그가 만난 예수를 알리는 중에 나다나엘이 편견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인도를 받아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발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발견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모두 다 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찾고 있던 인물은 누구인가?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 오시기로 예언된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찾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빌립이 오늘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한 말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찾고 있는 분을 만났다고 한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고 한 것입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의 질문은 무엇일까요? 나다나엘은 “그 분이 어디 출신인데?”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 때 빌립의 대답은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말을 톡 쏘아 붙였습니다. 이런 말이 튀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나다나엘도 유대 땅에 선한 자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유대 땅에 선한 분이 올 것이라고 믿지만 나사렛에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렛을 바라보는 나다나엘의 눈의 기준은 높았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 사람들에게서 인물이 나올 리 만무하다며 나사렛을 깔보는 편견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흐름으로 볼 때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계신 곳으로 인도하리라는 상상이 됩니까? 아마도 오늘날 이런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우리는 그를 교회로 인도하기를 아예 포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몇 절 뒤에 가보면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른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처럼 도도했던 나다나엘의 콧대가 꺽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완전히 납작해져서 예수님 앞에서 메시야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사렛에 대하여 콧대 높고 도도하게 굴던 나다나엘의 콧대를 꺾어놓은 것이 무엇인가요? 그가 이 나사렛 사람 앞에서 굴복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먼저 그에게 예수 계신 곳까지 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는 지혜있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친구 빌립이 편견이 강하고 도도한 나다나엘을 예수 계신 곳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빌립은 나다나엘과 이론적으로 논쟁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보여준 지혜는 “와 보라”는 초대장 제시였습니다.
그 다음에 초대를 받아들인 나다나엘이 나사렛 예수 계신 곳에 도착하는 순간에 예기지 않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자 마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처음 만난 예수에게서 먼저 “야, 이 사람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 구나”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당신은 오늘 초면입니다.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를 언제 보셨습니까?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나다나엘은 자신이 서 있던 높고 견고한 자리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본적이 없는데. 나를 어떻게 알지 나를 어디서 보았지? 내 예전의 모습을 다 아는 초능력을 가진 분이란 말인가?” 그 때에 예수님의 말이 청천벽력같이 내려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당시 유대사회에서 고상한 지식을 가진 수준 높은 사람이라면 무화과 나무아래서 율법을 암송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그들 중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가 나무 아래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율법을 묵상하였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화과 나무아래서 메시야를 대망하며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보았다고 말하는 순간 나다나엘의 편견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앞에 서 있는 자신이 생각하는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나사렛은 선한 것이나 인물이 날 수 없는 후진 동네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과 다른 자기만의 망상이었다는 것을 그는 깨달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앞에 서 있는 그 분이 크게 보이고 자신이 작아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랍비여”라고 최고의 존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찾고 있었던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그 메시야가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굴복시킨 것인가요? 그가 기다리고 찾던 분을 그가 발견하였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가 메시야를 기다리고 찾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친구 빌립의 인도를 받고 예수 앞에서 걸어왔고 그리고 그가 예수를 확인하고 이제 내가 찾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인가요? 그가 발견된 것인가요?
그가 발견한 것 같지만 사실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가 예수에게 발견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예수 앞에 나오기 전에 이미도 예수는 장소를 초월하여 나다나엘을 먼저 알고 있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다나엘이 나아오고 있는 그 과정도 예수님은 다 지켜보고 계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에게 먼저 발견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들도 교회를 출석하여 예배하고 있지만 우리가 스스로 잘 살던 사람 아닙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바로 오늘날의 나다나엘입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 믿고 내 발로 교회를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변에 교회가 많지만 내가 먼저 수정교회를 선택한 것 같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고 우리가 예수를 선택하여 발견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태로부터 핏덩이로 태어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않고 일어서는 것을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메시야 고백을 하였음에도 나다나엘이 본 것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듣습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장차 네가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보게 될 이스라엘 임금 하나님의 아들보다 더 큰 것은 무엇인가?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에게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게 될 것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중재하는 중보자로서 인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자가 무엇인가? 다니엘에서 예언되었던 장차 오게 될 인자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신적인 능력을 가진 성육한 하나님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게 될 예수님이십니다.

 

2. 백성을 다 회개시킨 설교( 욘 3:1-5, 10 찬송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요나는 코미디적 인물이다. 그 특징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가라고 명한 곳과 반대방향으로 배를 탔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교를 피하기 위해 가급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였다. 하나님이 처음에 부탁하였던 것을 행하면서 그의 뜻에 아주 반대되는 자리에 서 있는 요나를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가장 그의 비범한 행동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이후의 일이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는 선교명령을 들은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북동쪽으로 향하는 대신에 그는 서쪽 다시스로 항해하였다. 다시스로 항해하는 그 배가 폭풍을 만나 깨어지기 직전에 이르렀던 것은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그 배의 밑창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배가 바다 한 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누구 때문인지 알게된 것은 그들이 제비를 뽑았던 제비가 배밑창에 자고 있었던 요나애게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바다위에 폭풍을 보내었을 때에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에 자신을 숨김으로써 배애 탄 사람들이 모두 다 죽기보다는 차라리 배위에서 바다로 내던져 풍랑이 멈추는 편을 택하기를 원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 아노라”. 요나는 그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 자신 때문인줄 알 이미 알고 있었기 자신을 바다에 내 던지면 바다가 잔잔해 질 것을 확신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 성읍까지 직통으로 갈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셨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동안 있었던 요나는 니느웨 성읍의 바닷가에서 토해낸 물고기에서 나와 니느웨 성읍을 바라보고 서게 되었다. 
  두 번째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서 하루동안 다니면서 그 백성들에게 설교하였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백성들은 놀라운 반응을 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소식을 들은 왕까지도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놀라운 반응을 하였다. 그들은 일제히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면서 회개를 하였다. 그들을 이토록 변화시키는 요나는 누구였는가? 요나는 관용의 하나님의 말씀이 그 백성들에게 들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전했다.  요나의 설교는 오늘날 설교자들의 설교와 완전히 다르다.

“아르바임 욤 베 니느웨 니하파케트(אַרְבָּעִים יֹום וְנִֽינְוֵה נֶהְפָּֽכֶת׃)” “Yet forty days, and Nineveh shall be overthrown.”(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다섯마디! 니느웨 청중들의 심령을 회개와 금식과 참다운 예배 자리로 이끌어낸 요나의 설교 다섯마디의 영향력의 근원이 무엇인가?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그의 설교를 전하는 동안 설교를 듣지 않고 회개치 않으므로써 하나님이 내리는 심판대 앞에 서기를 원했다.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이방 백성들이 사는 니느웨 도시는 40일이란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았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킬 만큼 니느웨 백성들이 일제히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서게 한 것은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설교자 배후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판 하나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3. 창조의 빛 (창 1:1-5 찬송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우리는 태양이 먼저냐? 빛이 먼저냐?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것인가요? 우리는 상식적으로 태양에서 빛이 나오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태양이 떴기 때문에 하루가 시작되어 낮에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 비추는 것이 달빛이요 별빛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빛과 태양중에 무엇을 먼저 창조하셨는가요? 창조의 순서에서 첫째 날에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집고 빛이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의 질서에서 빛의 창조가 태양의 창조보다 앞선 이유가 무엇때문인가요?
일단 우리는 빛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빛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물리적인 빛만이 아닌 빛이라는 것을 알 때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물리적인 빛은 분명히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첫째날에 명하여 생긴 빛은 단순히 물리적인 빛만이 아닙니다. 그 빛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명력이요 하나님의 신적 에너지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거룩한 에너지는 이 세상에서는 초월적인 힘입니다. 왜냐하면 그 빛이 옴으로서 땅이 생기고 하늘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빛을 주시기 전에 모습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빛이 창조되기 전의 땅의 모습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했습니다. 혼돈하며 공허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형체가 없고 텅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심연에 흑암이 있었습니다. 형체가 없이 텅빈 것과 심연은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위험이었습니다. 창조이전의 이 혼돈하고 공허함과 깊은 심연의 흑암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 모습은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을 받기 전에 사회적 정신적 심리적 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만나기 전에 우리들의 내면의 심리적 모습을 생각해보면 에너지는 많으나 방향없이 목적없이 좌충우돌하며 진행하는 에너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분주하지만 그 결과는 텅비고 허무한 결과만 거둬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빛을 만나기 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그같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세력은 심연의 흑암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심리적 상태는 흑암의 세력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돈과 공허와 심연의 흑암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이란 히브리어 “루아흐”로 ‘호흡’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의 뜻은 그 혼돈과 공허와 심연의 흑암 세력을 억누르는 힘으로서 하나님이 그 세력 위에서 살아 숨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는 명령과 함께 창조된 빛은 존재하게 됩니다. 이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물리적인 빛이 아닙니다.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창조한 빛입니다. 이 하나님의 에너지로서 이 빛은 하나님의 호흡의 생명력을 지닌 빛입니다. 이 빛이 창조되는 순간부터 땅을 덮고 있던 흑암은 벗겨지고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하늘과 땅이 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땅에는 바다와 육지가 구별되고 하늘과 땅 바다에 각종 식물 생물들과 짐승들이 그 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빛의 창조로 인해 무형체 공허와 그리고 흑암에서 바뀌어지는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 보시기 아름다운 선으로 간주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빛을 토대와 배경으로 창조되는 모든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창조물은 질서와 방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허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집니다.
새해에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빛을 받아 질서와 방향을 되찾고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4. 와 보라 (성경 요 1: 44-51 찬송 90장 주예수 내가 알기전)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인 벳새다 사람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의 말을 듣고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므로 나사렛 지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고정관념이 센 나다냐엘은 얼마되지 않아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고백한다.  무엇이 나다나엘의 편견을 벗기고 메시야 고백을 하게끔 하였는가? 그는 빌립에게서 “와서 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이미 가지고 있던 선입견으로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빌립의 말대로 그가 직접 나사렛 예수를 만나 보는 순간에 그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다. 예수에게서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가? 빌립을 보자 마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이 사람에게서 간사함이 없도다” 그리고 이어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노라”였다. 아직 만나보기도 전에 자신의 정체를 먼저 파악하고 있는 예수 앞에서 선 그는 굴복하였다. 

 

5. 하나님의 성전인 몸 (고전 6:16-20 찬송 331장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고린도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성령을 따라 자유로운 생활을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은 사회질서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다르다. 성령을 따라 자유의 생활을 하는 것이 제한이 없는 무절제한 생활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도리어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무절제 구체적인 사례를 보고 있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구조속에서 만연해 있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음란 생활이었다. 신전창기와 관계를 가지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도리어 그들이 섬기는 우상신에게 충성을 하는 일로 여겼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신전 창기와 결합하는 자는 반드시 돈을 지불하였다. 그것은 우상신과 결합을 위한 헌신의 표로서 비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신전창기와 결합을 하는 것을 하나의 세리머니로 여겼고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르다. 우리의 몸이 우상신과 결합을 위해 성적 결합의 절차를 통과의례로 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피흘린 값으로 하나님이 산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값을 지불한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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