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사순절 둘째 주간

1. 오늘날의 제자도(막 8:31-38 찬송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때에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수난예고를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최초의 제자였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그 자리에서 어떻게 또한 그가 어찌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베드로의 모습은 바로 인간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항상 깨어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을 때 그의 머리 속에 그리스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윗같은 왕이었을 것이다. 로마를 정복하고 유대백성들을 해방시킬 왕 곧 다윗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찾아온 메시야가 로마를 정복해야 하고 유대백성을 해방시켜야할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먼저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또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짖는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지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제자가 가야 할 길 곧 제자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제자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여할 것인가? 마가의 박해 상황과 달리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길을 부인하는 것에 관하여 주석가 윌리엄 로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 쉽게도 다음과 같은 묘사로 깨달음을 가진다: 존재의 긍휼과 관용에서 드러나기를 추구하는 우리들 안에 있는 성령의 삶을 부인하는 것.”
그러나, 오늘날 제자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삶을 사는 것이다.

 

2. 언약이 성취된 곳 (창 17:1-6, 15-16 찬송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창 17장의 1-7절과 15-16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는 언약을 이야기한다.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세워진 언약이다. 이 언약 중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명령을 내린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 없었던 때이다. 아브라함은 계집 종에게서 나은 자녀나 모든 집안에 있는 종들에게 까지 할례를 베푼다. 할례는 개인적으로는 고통과 투쟁의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축복을 영원토록 보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는 영원한 언약으로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될 아브라함이 왜 고통과 투쟁의 경험을 하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로서 필수적이었다. 하나님은 영원한 축복과 구원을 약속하였으나 그 언약의 수혜자인 아브라함과 후손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고통의 댓가를 몸소 치루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아브라함이 가족들에게 할례를 시행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사순절 둘째 주를 보내면서 묵상하고 나가야 할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메시야 고백을 하자 마자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선언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넘겨져서 장차 십자가의 죽음을 볼 것이며 그리고 난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선언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부활을 약속하는 언약을 체결하신다. 사순절 기간에 죄와 허물로 죽어야 마땅한 우리를 위해 아무 죄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주시기 위해 가신 그 주님의 고난의 흔적을 묵상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언약으로 베풀어 주시는 구원과 축복의 수혜자가 치루어야 할 댓가로서 고통과 투쟁의 경험이 되는 할례를 시행하는 것과 일치한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도록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이라면 그 놀라운 영광의 복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는 표로서 우리가 댓가를 치루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리의 인간사에서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가 있을지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약속을 선물로 받은 믿음의 사람들은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에 대한 표로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 앞에 바쳐진 자(시 25:1-10)

 

시 24편 4-5절에서 시인은 그의 영혼을 허탄한 데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들어올린다. 히브리어로 ‘נָשָׂא 나사 들어올린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에게 내 영혼을 들어 올린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נָשָׂא 나사“로서 들어올리다 ”lift up“의 의미가 있다. 들어올린다는 말은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복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다.

누가 하나님에게 영혼을 들어 올릴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영혼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우리 번역에는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진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생명과 몸을 맡기고 사는 사람이다. 오늘 시인은 원수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그는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오늘 시인은 어려운 곤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경건한 시인이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과거에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큰 것을 알 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 하소서”(11절) 죄가 크지만 오늘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이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8절)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에서 ‘이름’이란 명성 또는 영광의 의미가 있다. 시인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이 사해 주시기를 간구할 뿐만 아니라 사함을 주실 줄 확실히 믿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하나님에게 맡기고 사는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감싸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6절).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실히 믿는다. 시편 23편 3절처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4.율법과 은혜( 롬 4:13-25 찬송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바울은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이며 그는 유대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장 중요시 하며 율법을 암송하고 다 지키는 자였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 율법을 엄수하는 바리새인의 수가 6000명이었다고 한다.  바울은 대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 공 수제자였다. 그런데, 그처럼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바리새인 바울이 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는가? 

바울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장소는 고린도이다. 편지를 쓰고 있는 장소는 고린도이며 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 문제는 바울이 세운 교회마다 바울을 악평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바울이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까지도 바울을 험담하고 경계하는 유대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바울을 험담하는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예수를 믿은 근본주의 유대 기독교인들로서 성경과 율법을 문자적으로 엄수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주장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바울을 문제삼는 것은 바울이 율법과 성경의 가치를 손상시킴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의 가치까지도 깍아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에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믿은 이방인들조차 율법의 가치와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할까봐 근본주의 유대기독교인들은 매우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세운교회마다 그들은 반드시 방문하여야 했고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가르침과 동시에 바울의 사도성에 의구심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지적하였다. 신약 주석가 윌리엄 로더가 위의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Others however had suggested that he had watered down scripture's demands and in the process betrayed his heritage - and worse, God! (그러나 다른 이들은 제안하기를 바울이 성경의 요구들을 무시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유산을 배반했다 -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까지도!” 

그들에 대한 반응으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은 것이 율법 준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도리어 이방 기독교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이 구원받은 온전성(wholeness)은 믿음에근거한 관계이며 이 믿음은 인식적인 믿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과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헌신적인 충성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도리어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며 오직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상속을 가능케 하는 기초임을 분명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창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때에 100세의 할아버지요 90세의 아내의 태가 죽은 것같음을 아는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한 아들을 주실 것을 의심치 않고 믿는 견고해진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것이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5.참된 성전(성경 요 2:13-22 찬송 208장 내 주의 나라와)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성전청결 행동이 예수님의 공생생애 초기에부터 시작된다. 오늘 본문은 성전청결의 사건(14-17절)과 사건에 대한 논쟁(18-2절)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 엎는다. 그리고 하시는 말이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유대인들 곧 종교지도자들은 “네가 무슨 표적을 보이려고 이런 일을 하느냐”고 예수님에게 질문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였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반문하기를, “이 성전은 사십육 년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만에 일으키겠느냐?”고 한다.
 

“성전을 너희가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도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이 성전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이 어떻게 3일 만에 성전 공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이같은 어려움은 오늘 본문에 성전을 이해하는 자들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헤롯 성전을 두고 이야기한다. 그 성전은 46년 동안이나 걸려 견고하게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고 했을 때 그 성전이 지칭한 것은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허물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의 몸을 허물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할 수 있었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님 자신을 죽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즉시 그 일을 시행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예수님은 3일 동안에 그 성전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3일 만에 살아나게 될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서는 백성들이 예배할 성전은 더 이상 없다. 예수님의 몸이 예배하는 성전이다.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믿는 자들은 성전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성전이 없는 대신에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멤버들로서 믿는 신자들이 모인 모임이 성전이 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곧 성전이 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머물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참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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