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사순절 셋째 주간

1. 새로운 성전 (요 2:13-22 찬송 208장내 주의 나라와)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첫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표적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오는 말씀이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서 성전뜰에서 장사하는 매매상을 뒤엎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 바로 뒤에 성전 청결케하는 예수님의 성전청결행위를 배치하고 있는가? 다른 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청소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전 생애가 성전청결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먼저하심으로써 모든 기독교인들이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성전제도의 개혁입니다. 예수님은 구 성전의 모든 제도를 제거하고 새로운 제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도가 바뀐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예배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예배는 어떤 성전에 드리는 예배인가? 예수님의 몸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모인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혼인잔치집에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기적사건과 성전청결 사건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물은 유대인의 결례를 따른 정결례통에 있던 물입니다. 이 물이 상징하는 것은 유대의 예배의 관습과 제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전뜰에서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경고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집 곧 성전 안에서 성전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게 운용되던 유대의 예배 제도를 경고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머물 수 없도록 한 것은 기도하는 목적이 아니라 장사의 목적으로 성전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이 점이 예수님이 분노했던 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옛 성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은 예배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것은 메시야 잔치를 맞이하는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맛을 내지 못하는 결례통의 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대전통의 결례통에 있는 물을 사용하여 혼인잔치를 흥이나게 하는 포도주를 만들어내었습니다. 3일만에 일으켜 세운 성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 예수님의 몸을 구성하는 것은 어린양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과 사랑으로 모인 모임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성전이요 유대교에서 새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모습입니다.

2. 장대 위의 놋뱀 (민 21;4-9 찬송 529장 온유한 주님의 음성)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는 불만이 있으면 모세에게 먼저 불평을 하였고 하나님에게 할 불평을 모세에게 퍼부었다(출 16장 2절).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백성들이 과거보다 더 담대해졌다. 그들의 불평거리를 모세에게 먼저 토해내지 않는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불평을 퍼붓고 그 다음에 모세에게 불평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백성들의 태도가 이처럼 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불만을 토하기보다 하나님과 직거래를 하기를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만 그들의 고통을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마음이 상당히 대담해지고 단단해 졌다고 볼 수 있다. 광야길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는 사이에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에게 반항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난이 극심해지면 그 고난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도리어 극심한 고난으로 인해 좌절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도 있다. 오늘 광야길을 통과하면서 고난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나님의 인내가 끝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번에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참으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징벌을 내리신다. 불뱀을 보내어 원망하는 백성들을 물게 하였고 뱀에 물린 자들의 운명은 죽음과 직결되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죽음앞에 두려워진 백성들은 이제야 비로소 모세에게 다가가서 제발 하나님께 기도해서 불뱀을 몰아내게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들은 모세에게 죄를 자백하면서 하나님이 진노를 풀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하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치료의 처방을 주셨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게 하였으며 불뱀에게 물린 자가 장대에 달린 그 놋뱀을 보기만 하면 누구든지 치료를 받자마다 치료를 받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무엇인가? 마력적인 놋뱀의 능력 때문인가? 그러나 죽은 자를 치료하고 살리는 힘은 놋뱀을 제시하는 자를 따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이다. 그 힘은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내려준 선물에 대한 믿음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3. 하나님의 능력, 지혜(고전 1:18-25 찬송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바울은 이 짧은 본문에서 지혜라는 말을 9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지혜라는 말을 이토록 많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핵심단어(Key Word)가 지혜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일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혜 산업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성공에 이르는 길이 지혜였기 때문에 지혜를 공급하는 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혜를 상품으로 판매하던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이같은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교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없이 추구하는 세상 지혜를 주장하거나 공급하기를 거부한다.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다. 이 십자가의 도는 헬라인들에게는 성공길이 아니고 실패에 이르는 길로 여겨졌다. 유대인들에게는 저주받은 자들이 가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를 최상의 목표로 삼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 지혜보다 훨씬 탁월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의 결과는 교만이요 바벨탑의 운명에 처할 것이나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는 겸손과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주실 것이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세상의 지혜를 자랑함으로 자신들을 홍보하는 사람들과 경쟁을 포기하고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는 십자가의 도를 자랑함으로써 역설적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지혜산업가로서 자신을 홍보하는 자들은 자신의 영광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 안에서 겸손과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걸을 때에 하나됨이 성취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4. 짐이 된 율법(출 20:1-17 찬송 529 온유한 주님의 음성)
 출애굽기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한다. 이 모든 말씀은 히브리어로는 “the Ten Words(10편의 말씀들)”이다. 이 말씀들은 곧 10계명이다. 이  말씀들은 10계명인 동시에 구약의 토라 곧 율법을 대표하기도 한다. 백성들이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고대 사회의 많은 구원사건들에서는 가장 높은 신이 주권적인 군주에게 법전을 하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 본문에서 이 법은  애굽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받고 광야로 인도받은 백성들에게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므로 이 법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신앙으로 반응하는 하나님과 백성간에 상호 관계의 도구가 된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애굽의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권리를 가진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신분으로 격상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는 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선사받은 것이다. 
 이 계명의 첫째는 유일한 하나님을 백성들이 인식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배할 대상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지 손으로 새긴 우상들이 아니라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이름을 거짓맹세하는데 사용하지 말라고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값싼 인간의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무이이다. 그러나, 사랑관계에서 이것은 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율법은 백성들에게 짐이 되어왔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은혜와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나님과 백성간에 상호관계의 도구로서 율법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존재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검증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안식일 법이다. 안식일에 안식을 함으로써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린다. 뿐만 아니라 이 날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체에게 안식을 함께 누리도록 되어 있다.  이 모든존재들이 안식하는 이유는 안식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일을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을 백성들이 예배함으로 얻는 유익은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과는 물로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유익이 안식일에 백성들이 누리는 복이다. 

5. 은혜로 주어진 선물 ( 시 19편 찬송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본 시편은 1-6절과 7-14절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것은 창조물에 기초한 찬송(1-4절 상반부)과 태양의 찬양을 노래함(4절 하반부-6절)로 나누어지고 두 번째 것은 토라(율법)의 찬양에 초점을 맞춤(7-10절)과 개인적인 탄원기도(11-14절)로 나누어진다. 겉보기에는 이 두 부분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둘이 상호간에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 관련성이 있는가?  첫 번째 부분(1-6절)에서 창조물들은 언어가 없지만 그 소리가 서로 소통하며 태양은 광선으로 지구의 구석 구석까지 비춘다. 두 번째 부분(7-14절)에서 토라(율법)는 인간의 마음의 깊숙한 곳까지 감찰한다. 첫 번째 단락에서 창조물들이 비록 언어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지식을 상호 전달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토라(율법)가 인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지혜를 전달함으로써 인간이영적인 유익을 도모한다. 그리하여 토라를 통하여 새롭게 소생을 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은혜로 주어진 선물로서 그 완전함, 확실함, 정직함, 순결함, 그리고 정결함과 진실과 의로움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접하는 자들에게 율법의 완전함은 영혼의 소성을 가져다 주며 확실함은 지혜를 준다. 그리고 율법의 정직함은 마음에 기쁨을 주며 순결함은 눈을 밝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정결과 진실함은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한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태양에서 광선이 세상을 두루 비추는 것같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은혜의 선물로 주신 토라가 백성들의 마음 깊은 속까지 하나님의 지혜를 비추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토라를 암송하고 묵상하고 순종함으로서 경고받고 축복받고 완전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축복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입의 말과 생각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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