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사순절 4째주간 

1. 하나님 언약의 세가지 약속(렘 31:31-34 찬송 393장 오 신실하신 주)

예레미야는 렘 17:1에서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라고 하였습니다. 렘 4:6에서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렘 6:22-23 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북방의 나라 바벨론을 심판의 몽둥이로 사용하여 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이 징벌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언약을 깨트린 백성들에게 새언약을 통해서 징벌이 아니라 용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동일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 속에 징벌과 용서를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징벌과 새언약의 약속이 상반되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간에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예레미야의 오늘 본문의 예언의 말씀이 선언되고 기록되던 시기는 B.C. 586년 예루살렘성전 파괴 시기의 전후입니다. 예레미야는 왕과 고관들로부터 평안과 축복을 약속하지 않는다고 항상 미움 받은 예언자입입니다. 그는 줄 곧 깊은 우물 속에 갇혀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예언하였으나 예레미야는 왕앞에서와 고관들 앞에서 유다가 바벨론에 짓밟히고 성전은 파괴당하고 왕과 고관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비록 유다가 바벨론에게 정복을 당하여 왕과 고관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갈지라도 몇 년이 못되어 하나님이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면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자식을 낳고 오래 살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70년을 채운 후에야 하나님이 유다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유다백성에게 하나님이 갱신된 새언약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세가지 약속을 합니다. 첫째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실 것이며, 둘째는 백성들 각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하나도 없게 하시겠으며, 세 번째는 하나님이 이전의 죄는 기억지 않고 조건없이 백성들을 용서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유다백성과 새롭게 체결한 갱신된 언제 성취되는 것인가? 그들이 예루살렘땅으로 돌아온 이후가 됩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게될 것이며 그들이 모두가 다 마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인가요?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의 몸으로 이방땅에서 생활하면서 무수한 수치와 부끄러운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신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원망하던 시점은 죽을 정도의 단계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지경에 놓였을 때에는 모세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앞에 기도하여 불뱀을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언제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경험을 할 것인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을 하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깨달아 알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갱신된 언약의 효력이 발생하는 순간이 바벨론포로생활을 통과한 후에라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제 하나님의 새언약의 효력이 발생하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인가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믿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닫는 순간부터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방법 (요 3:14-21 찬송 151장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유대인의 공회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겠거늘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는가?”고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후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 인자도 들려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모세가 광야에 든 놋뱀이 십자가에 달리게 될 자와 같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인자(the son of man)은 누구인가? 하늘로부터 오기로 되어 있던 메시야로서 다니엘 7:13에 하늘로부터 오시기로 된 예언된 인물이다. 사도 요한은 이 인자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언한다. 왜 하늘로 부터온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 길만이 죄에 빠져 죽을 주 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죄를 가진 인간에 대한 심판을 피하는 길이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피흘리신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희생하기까지 죄인인 우리들을 사랑하신다. 그런데,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기적이다. 

 

3. 고난과 감사(시 107:1-3, 17-22 찬송 65장 내 영혼아 찬양하라)
 본 시편은 전형적인 공동체 감사시다. 이 시편 안(4-32절)에서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던 백성들을 살피고 있다”(Howard Wallace). 지금은 그들이 구속을 받아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었던 조상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시편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관들, 궁핍한 자들, 정직한 자들, 사악한 자들 그리고 미련한 자들과 지혜있는 자들이다.  그 중에 강조되는 것이 미련한 자들(the foolish)은 히브리어로 에빌(אֱוִיל)이다(17절). 이 말에는 지혜를 경시하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입맛이 없고 사망직전까지 갔다가 하나님의 치료를 받았던 병들었던 중환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는 시편 공동체의 백성들은 중환자실에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치료를 받아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 중환자들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치료를 받고 돌아왔다. 그들이 누구인가?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배하는 자리에 감사를 드리는 백성들이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왜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 이같은 배경에서 볼 때 선명하다. 치료받고 속량을 받아 이 자리에 오게 된 데는 그들에게 어떤 이유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편속에 백성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난 후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배할 수 있는 자리에 온 것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깨달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인자하시다는 교리적인 암송으로만 읊조리기 위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번영의 자리에서 부와 권력을 누려도 보았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들의 번영의 장소는 불모의 광야로 변하게된 현장에서 입맛이 떨어지고 죽음직전까지 갔다.  뿐만 아니라 사막과 같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아 풍요의 땅으로 돌아왔다. 성공과 실패, 축복과 저주의 자리를 널뛰기 하듯이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이제 살아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니 그 감격과 감사를 무엇을 표현하겠는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4. 마음에 새긴 율법 (렘 31:31-34 찬송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예레미야가 오늘 본문의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던 시기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이나 직후일 수 있다. 하나님의 성전이 왜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파괴되고 짓밟히게 되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포로가 이방나라로 이끌려 가야 했는가?
예레미야는 이같은 질문을 마음속으로 하면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이방신들보다 힘이 약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 원인이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고 축복하겠다는 한 언약을 성실히 이행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을 파기한 데 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 시킨 이유 때문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장된 보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노략질을 당하기까지 그리고 포로가 되어 이방나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는 장차 이 백성들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 근거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몸과 일체가 되어 잘 준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는 백성들이 율법을 파기할 수 없고 율법을 온전히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백성들이 외부적으로 율법을 주어서 지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백성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율법을 기록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로 백성들 각자는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 의지인 마음을 통해 실행에 옮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각자가 소유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오는 재앙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의 때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는 외부의 전통이나 외부 교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는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5. 피흘려 죽기까지 구원하는 사랑(엡 2:1-10 찬송 260장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세상에는 야망이 있다. 이 세상에서 야망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지도자들이 야망을 가지고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통치를 확대하려고 한다. 사람이 목적이 아니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람을 어떠헥 이용하는 것이 목표이다. 세상의 야망은 이익을 철저히 계산한다. 이해관계속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야망 아래서 사람들은 죽어간다. 이런 문화속에서 지배하는 영은 죽음의 영이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뒤에 있다. 오늘 에베소서에 신자들은 교회로 오기 전에 이전에는 그런 세상 야망의 희생물로 죽음의 위기에 있었다.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던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비젼속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거대한 비젼은 1:23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비젼이다. 이 하나님의 비젼의 다른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일 뿐만 아니라 만물을 품기 위해 온 우주까지 뻗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우주 만물들에게까지 통치권이 미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만유보다 크시고 만유를 심판하시는 만유의 왕이신 하나님이 만유중에 하나인 인간 가운데 오셨을 뿐만 아니라 피흘려 죽으셨다. 만유를 품기 위해 피흘려죽으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위에서 피흘려 죽어가는 연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했는가?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을 포함한다. 배타성으로 인해 한 자리에 먹고 마실 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집의 한 식구로서 “우리”가 된 것은 예수의 피의 능력 때문이었다. 허물과 죄로 죽어야 마땅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 때문이었다. 피흘린 예수가 만유의 왕이요 하나님으로 믿어지는 것은 기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피흘려죽기까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가? 먼저는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였던 본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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