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대림절 셋째 주간

1. 오늘의 말씀(눅 1:26-38 찬송가 115장 기쁘다 구주오셨네)
우리가 올 성탄에 주님의 고향 사람들 중 만나고 싶은 인물이 누구일까? 스스로 한번 질문해 봅니다. 여러 인물 중에서 이번에는 마리아를 만나고 싶습니다. 마리아는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성탄을 준비하면서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좋은 지혜를 마리아가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지혜를 그녀가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도 공유하고 싶어집니다.
마리아는 누구인가? 눈지붕 아래서 구유에 누인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꺼집어 내어서 보는 소상과 같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가톨릭에서마리아의 이름이 들어간 수도회는 무엇인가? 영원한 도움의 여인 수도회, 은혜의 여인 수도회, 우주의 여왕 수도회, 선한 상담의 여인 수도회라는 단체에 그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내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이름이 들어간 수도원의 이름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마리아의 딸 수도회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세 때에는 마리아의 영향력이 어떠했는가? 백성들의 기도생활에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백성들의 곤경을 불쌍히 여겼으며 용서를 중재하는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마리아는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인물로 보았습니다. 마리아 숭배는 문제가 되지만 마리아는 영향력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지금 마리아는 몇 살쯤 보입니까? 12-14살 사이의 소녀입니다. 14살이면 우리 사회에서는 중학교 1학년입니다. 중학교 들어가자 아이를 배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아이가 학교에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이 민감한 시기에 아이를 배었다는 것은 난감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밴지 6달이 되던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은혜를 입은 자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이 일이 어찌 된 일인가?”하고 놀라서 곰곰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어서 천사가 반응하기를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마리아가 심리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몹시 무서워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문화권에서 이해가 안되는 점이 있습니다. “너 은혜입은 자여“란 ”너 복받은 자여“라말과 같다고 봅니다. ”복받았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면 우리가 감사하고 좋아할 일이지 놀라거나 무서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말을 천사로부터 들은 마리아는 그 문화에서 누구에게 말하는 무엇으로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예언자로 사람을 부를 때에 그 때 그가 첫반응하는 모습입니다. 구약 예언자가 부름을 받을 때에 4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반대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반대하는 그를 무시합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설득과 순종입니다. 오늘 마리아에게서 예언자를 부르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여“라는 문안인사를 하며 마리아에게 천사가 하는 말은 하나님이 마리아를 부르는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두 번째로 마리아가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름에 저항 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로 천사는 아이가 없던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배게 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함으로써 마리아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넷째 그 때에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아멘으로 화답함으로써 예언자로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마리아의 소명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인가? 그것은 먼저 마리아에게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로 사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어 살아가는 일은 예언적 소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소명의 삶은 엄청나게 힘든 삶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뒷담화와 수군거림을 감당하는 일이 힘든 일입니다. 그를 낳은 후에 돌보고 양육하는 일이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장성한 후에 메시야의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아들 예수님이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을 때에게 그녀는 감당하기 힘든 심적 고통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메시야의 어머니로서 걸어가야 하는 마리아의 길은 주님의 제자의 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예언자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첫 제자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뱃속에 잉태하였을 뿐인데도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의 선언을 듣고 마리아는 주님을 찬양하는 찬가를 부르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46-50절)“.
아직 성별도 확인할 수 없고 형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천사의 말을 믿고 그의 몸 속에 찾아온 메시야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리아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한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는 듣산 난감한 처지에서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어려운 현실에 처한 가운데서 성탄을 준비하는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주님을 이번 성탄에 맞이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의 계집종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가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의 말씀(눅 1:26-38 찬송가 120장 오 베들레헴 작은 골)
세례요한을 밴지 여섯째 달에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천사의 문안인사는 “은혜받을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문안 인사말을 듣고 마리아는 몹시 놀란 나머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던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 부터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은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겨우 14살밖에 되지 않은 처녀였으며 요셉이라는 총각과 정혼상태에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남자도 알지 못하였는데 천사로부터 들은 것은 임신소식이었습니다. 어린 마리아가 받은 충격이 어떠했으리라고 상상이 됩니까?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었다면 멘붕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바로 즉시 질문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에게 대답하여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였던 네 친족 엘리사벳도 아이를 밴지 여섯달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친족 엘리사벳은 결혼 후에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이를 갖지 못한 케이스인 반면에 마리아는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아이를 가질만한 때가 이르지 않은 처녀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엘리사벳이 아이를 밴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듯이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남자를 가까이 한적이 없는 처녀가 아이를 배는 것도 동일한 기적이라는 논리로 비약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스런 처지에 빠져 있는 마리아는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순종적 표현을 하는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모습의 마리아를 상상하기 원하십니까? 메시야의 어머니 권세있는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마리아는 뜻밖에 임신으로 정혼한 남자의 이해를 얻지 못하면 파혼으로 갈 수 있는 소녀에 불과합니다. 힘없고 연약한 소녀였으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평안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아기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생명인가? 마리아처럼 연약하고 곤경에 빠진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찾아온 것이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이번 성탄은 우리속에 하나님이 개입한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축하하는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오늘의 말씀(눅 1:46-55 찬송가 121장 우리 구주 나신 날)
가브리엘 천사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난후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을 문안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순간 마리아의 복중에서 뛰노는 아이의 소리를 듣고서 엘리사벳은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의 축복 선언을 듣고서 마리아가 그녀의 뱃속에 잉태된 구주를 향하여 올리는 찬양이 오늘의 본문 마리아 찬가입니다. 마리아가 찬양을 올리고 있지만 마리아가 현실적으로 어떤 처지에 놓인 것인가요? 14세 경의 그녀가 정혼한 남자와 아직 결혼예식도 올리기 전에 처녀의 몸으로 임신이 된 것입니다. 결혼 전 순결을 엄격하게 요구했던 유대사회에서 정혼한 남자로 부터 “아니요”라는 퇴짜를 맞으면 평생 처녀과부로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급히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유대의 한 동네까지 갔다는 것이 자신에게 온 문제를 그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알려주는 단서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뱃속의 아이를 구주라고 찬양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직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인물됨인지 알기도 전에 천사의 말과 엘리사벳의 말만 듣고서 마리아가 마음에 평안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구주를 높이는 찬양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에 내 구주를 기뻐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비천한 여종의 신분에 불과한데 그녀의 몸에 구주가 들어오시는 은혜를 입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스캔들에 휩싸여 파혼의 위기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비천한 몸에 구주를 모신 영광스런 몸이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곤경의 현실을 만난 마리아가 두려움이나 걱정과 같은 부정적 생각에서 벗어나 기쁨과 평안 가운데서 소망의 생각을 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천사의 말을 듣고 “주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있다고 선언하는 엘리사벳의 축복선언을 아멘으로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48-50절)”

4. 오늘의 말씀(삼하 7:1-11 16 찬송가 119장 옛날 임금 다윗성에)
주변의 모든 원수를 무찌른 이후에 다윗이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되었을 때 선지자 나단에게 성전건축의 뜻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왕의 말을 들은 즉시 선지자 나단은 왕에게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날밤 선지자 나단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더러 성전 건축하지 말라고 다욋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왕궁보다 더 좋은 성전을 건축해 드리겠다는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후로 장막과 성막에서 백성들의 구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정 된 집에 얽매이지 않고 이동 가능한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고정된 장소에서 갇히기 보다 보다 활동이 용이한 자유였습니다. 다윗은 왕궁보다 더 화려한 성전에 하나님을 모시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다윗의 정치적 공간에 예속되기 보다 인간의 정치적 관심을 초월한 자유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하겠다는 다윗의 소원을 거절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하는 표로서 성전건축하겠다는 다윗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여 그 백성의 주권자로 삼고 그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11절)”

5. 오늘의 말씀(롬 16: 25-27 찬송가 635장 하늘에 계신)
로마서의 결론부 15:14-16:27에서 바울은 로마교회 방문계획과 이방선교 전략 그리고 스페인에 대한 선교의 비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부탁하고 개인적인 인사를 하고 거짓 교사들을 경고한 후에 25-27절의 영광송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기도를 마칠 때나 편지를 마칠 때에 항상 영광송이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초대교회의 관습대로 편지의 말미에 영광송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영광송(doxology)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광송은 삼위일체 하나님 곧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께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도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빼먹고 우리의 필요만을 요구하는 기도만 할 경우 우리에게 공허함이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것을 관습화와 생활화하는 경건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복음에 맞추어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었던 하나님의 변함없는 영원한 진리가 드러난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진리는 신비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된 진리입니다. 이 복음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믿음을 통하여 오는 의를 가져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세상 사람에게 들어 올 수 있는가?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롬 1:5에서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으며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순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래로 하나님과 멀어졌던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순종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에게 저주와 사망이 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 모두에게 의와 생명이 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순종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 속에 들어오도록 부름을 받은 생명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5-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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