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대림절 셋째 주

1. 메시야가 보이지 않는 이유 (1:6-8 19-28 찬송가 138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

태양을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바로 빛의 세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양빛은 아주 강한 세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광에는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과 같은 여러 가지 빛이 나오는데요. 여과되지 않은 빛이 바로 눈으로 들어오면 눈에는 큰 자극이 되어 눈이 부셔 직접 볼 수 없게 됩니다.예수님을 만나러 온 공회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질문합니다.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가르침을 얻으려고 왔다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는가요?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가요?” 되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답을 알려주어도 그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을 만들고 자기 것에게로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니고데모의 대답 가운데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하는가? 육신의 눈으로 내가 좋아하는 쪽만 바라보고 그것을 믿게 되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 사람과 특별한 차이가 없습니다. 인기 면에서도 세례요한이 더 인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고 사람의 눈에 숨겨져 있는 분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눈으로는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는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빛이신 것을 알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빛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권세를 얻게 되는데. 어떻게 빛을 알아볼 수 있을까? 소경의 상태로서는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어도 영적으로는 소경과 마찬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증거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는 사람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증거자가 와야 했습니다. 그 증거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세례요한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바라보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예루살렘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조사관으로 왔습니다. 세례요한에게 그들은 심문을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엘리야냐”, “네가 선지자냐고 질문합니다. 그 때에 세례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무슨 권세로 너가 세례를 주느냐?” 세례요한은 내 앞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이 서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준비하는 길을 닦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보내는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그 지지율은 나중에 오실 그 분에게로 돌려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는 뒤에 오시는 그 분을 증거하는 증거자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였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은 내가 신발 끈도 풀기에 감당치 못할 분이다”. “나는 물로 세례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은 성령을 세례를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그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을 믿고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사람들은 모두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얻어야 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주님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알려질 것인가요? 증거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증거자로 부름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요 나도 피조물이요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2.빛을 증거하는 사명자 (1: 6-8 19-28 찬송가 502장 빛의 사자들이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점에서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차이가 명백합니다. 세례요한은 인간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지만 세례요한은 그 빛이 아니라 그 빛을 증거하러 온 자라고 합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달빛이나 별빛처럼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기 위해 온 자라는 말입니다. 우주적 말씀이신 근원자 로고스를 세례요한은 증거하는 자입니다. 세례요한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면 그 끝지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는 이것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확신을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부터 질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세례요한은 나는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냐? 세례요한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라는 제사장들의 질문에 그는 이사야의 예언으로 대답합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세례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바로 앞에 오고 있는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신보다 훨씬 능력이 많은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오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탄을 기다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세례요한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세례요한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야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확신있는 믿음이 있다는 점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로서 생명과 빛과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빛과 생명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6-8)”

 

3. 희년선포 ( 61:1-4 8-11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영이 자신에게 내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로 구성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도록 여호와의 영이 자신에게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백성들에게 전할 소식이 아름다운 소식이 될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전하는 소식은 세상의 소식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선언하게 될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란 무엇인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희년의 선포입니다.

레위기 25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 갈지며희년이란 안식년 주기에서 50년이 되는 해에 땅 주인이 모든 종을 해방하고 모든 부채는 탕감해 주는 제도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과 자연에서 하나님의 창조된 사람 모두에게 죄와 부채의 탕감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해가 희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바벨론 포로 생활에 지쳤던 유대 백성들에게 예언자는 희년선포를 통해서 포로에서 해방의 당위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너진 성읍과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선지자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는 왕과 제사장의 권세를 가지게 되며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선언할 것입니다. 포로생활에 지치고 절망에 빠져 있는 백성들은 선지자의 위로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솟아오르고 무너진 성읍을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찰 것입니다.4장에서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사 61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강론하시면서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언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가난에 지친 백성들에게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희년의 선포로 출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치료하며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받고서 사람들이 일어나고 눌린자가 자유케 되고 귀신이 나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사랑과 의와 화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사랑의 능력 의의 능력 그리고 화평의 능력으로 백성들을 만나 준 것입니다.

 

4.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생활(살전 5:16-24 찬송가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면서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준비하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날은 우리들이 예측할 수 없고 도적같이 찾아 올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예수 안에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낮에 속한 자들입니다. 낮에 속한 자로서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정신을 차리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희노애락의 감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희에 해당하는 기쁨의 감정을 사람이 항상 지속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에 고통거리가 없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고통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며 고통과 씨름하는 자리를 피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와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서 기쁨이 솟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것이 가능한가요? 우리에게 고통의 씨가 되어 늘 우리를 찌르는 악의 세력과 죽음을 뒤집어엎고 부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믿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늘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기 때문에 늘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도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하는 단순한 종교적 행사나 경건활동이 아닙니다. 기도할 필요성이 약화되거나 종교행사의 기간이 끝나면 중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생명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생명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몸이 쉬지 않고 호흡을 하듯이 하나님과 생명관계를 유지하는 우리에게서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영적 호흡이 기도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피조물들은 차선적인 것이며 생명과 복지를 위해서는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선물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세 번째로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우리가 자격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관용의 수혜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감사할 이유입니다. 공로 없는 은혜, 받을 자격 없는 관용, 설명할 수 없는 선물에 의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계산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에게 넘쳐서 흘러내려 온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이번 대림절에 낮에 속한 자로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생활을 통해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풍성한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5. 남방의 시내처럼 돌이키소서 (126편 찬송가 496)

시인은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때 감격과 고백을 과거사건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그들은 기쁨이 가득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본문에서 지금 시온의 포로를 남방의 시내처럼 돌이키소서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인데 시인은 왜 그들을 돌이켜 달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아직도 포로상태에 있다고 하는가요? 그들은 돌아온 것인가? 아니면 돌아오지 못한 것인가? 그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이킬 때에에서 돌이키다שׁוּב)슈브)”동사는 완료형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 있는 파괴된 성읍과 파괴된 성전을 바라보는 순간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자신들이 거주할 주거지도 마련하지 못하고 경제생활을 위한 정착된 일도 없는데 성읍과 성전을 건축해야 할 부담감이 크게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낙심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포로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시인 과거의 포로에서 돌아오면서 기쁨과 웃음이 가득하고 꿈이 부풀어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격적인 고백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때 큰일을 행하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현재 살아계신 동일한 하나님이신 것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어로 יְהֹוָה)야웨)”be 동사의 1인칭 단수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그들에게 큰일을 행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I AM"이었고, 지금도 동일한 ”I AM"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백성들이 어떤 처지에 있다고 보는가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하는 처지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폐허가 된 성읍과 파괴된 잔해만 남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시작부터 힘든 일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겠다는 정신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농부가 싹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는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성읍과 성전건축에 착수하는 일은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사막의 땅에 떨어진 씨가 싹이 나고 열매 맺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에게 큰 일을 행하신 동일한 하나님이 그 큰일을 다시금 백성들에게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큰 일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하시게 될 큰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망연자실하게 손을 놓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사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의 확신을 백성들이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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