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예사말로 낯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낯이란 말은 ‘민낯을 드러냈다’거나, ‘낯이 두껍다’는 등과 같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 외에도 낯 뜨거움, 낯가죽, 낯부끄럽다, 낯가림, 낯내기, 낯바닥, 낯간지러움, 낯익다, 낯설다, 낯살, 낯붉힘 등으로 쓰인다. 
순수한 우리말인 얼굴은 ‘얼을 나타내는 굴’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나이 사십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처럼 얼굴을 통해 감정과 인격이 드러난다. 얼굴은 살아온 인생을 나타내는 거울과 같다. 얼굴 모습은 살아온 삶의 발자취며, 가꿔온 성품의 결정체다. 

   얼굴은 타고난 바탕에 자신의 개성을 더한 인생작품이다. 얼굴은 자신의 인격으로 빚어낸 예술품이다. 즐거운 마음은 웃는 얼굴을 만들고, 고통과 슬픈 마음은 찡그린 얼굴을 만든다.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마음은 짜증스럽고 불만 가득한 얼굴을 만든다.
성경은 스데반의 얼굴에 대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말씀한다. 스데반 얼굴의 굴을 따라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49~50). 그의 내적 심령에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다.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용서하는 아량의 풍성함이 넘쳤다. 

   내가 책임져야할 얼굴, 그 얼굴에 나는 어떤 얼을 담고 있는가? 오늘도 내 민낯을 보이며 살아 갈 건가, 아니면 가면무도회에 출연한 배우처럼 낯 두껍게 철면피로 살아 갈 건가를 생각하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아무리 낯가죽을 두껍게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면을 벗어야한다.   
나이에 따른 화장의 변천사가 있다고 한다. ‘10대는 치장, 20대는 화장, 30대는 분장, 40대는 변장, 50대는 위장, 60대는 포장, 70대는 환장, 80대는 끝장’이라고 한다. 아무리 변장, 위장, 포장을 해도 얼굴에 나타난 내면의 얼은 숨길 수 없다. 
얼굴의 굴속에 숨어 있는 내 내면의 얼이 무엇인가? 병든 영혼인가, 아니면 주님이 주시는 샬롬의 평강인가? 영혼의 햇빛이신 주님의 햇살을 받아 따뜻하고 화사하고 찬란한 얼을 간직하는 낯으로 살자. 

임동헌 목사(광주첨담교회)
임동헌 목사(광주첨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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