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나의 삶, 두 경계의 길

  • 입력 2024.04.11 21:10
  • 수정 2025.10.2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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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길


여명을 앞 둔 그 시간은 더 어둡고 고요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보면 온 세상은 나를 위해 하루를 준비해 놓은 듯 희망과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솔바람이 얼굴을 씻어주고 숲에서 나는 냄새를 깊숙이 담고 서재로 들어와 '시카고 선물시장'에 접속한다. 밴쿠버 새벽 4시면 시카고는 아침 7시로 벌써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세계의 모든 원자재가 여기서 거래되며 가격도 결정되어 소비자 물가에도 반영된다. 원유, 금, 외환, 곡물 .커피, 주가 및 국가지수 등 수 백가지가 넘는 기초상품들이 거래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선물시장이다. 갑자기 미국달러가 하락해 원유와 금 거래를 체크해 본다. 그 사이 채팅창이 깜박거린다. 하루가 마감 된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퇴근을 못한 홍콩 사무실에서 온 내용은 중동의 정세와 미 연준 지방행장들의 금리인상대립으로 내일 어떤 영향이 미칠 수 있는지 묻는 질문들이다. 며칠 전 부탁해 놓은 기업탐방에 대한 리포트가 막 도착했다. 수많은 내용 중 이슈가 될 만한 자료들을 분류하고 급한 내용은 답장을 보낸다.

내가 분석한 채권이나 주식에 대한 리포트에 대한 의견과 새로운 내용들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한 고정칼럼에 발표한 글들에는 어떤 광고들이 실렸고, 독자들의 질문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인기 기사들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으로 광고가 실린다. 그 광고만 보면 내가 발표한 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숨 가쁘게 이른 아침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특별한 이슈가 없으면 차실로 가 차를 우린다.

이른 새벽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습관은 열네 살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껏 일상화 되어 있다. 조간신문을 일찍 돌리고 학교에 가야했던 그 때 나의 하루하루는 희망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다시 직장생활을 할 때도 사무실에 다섯 시에 도착하기 위해 늘 그 시간에 깨어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 도착하여 컴퓨터를 켜고 시카고 뉴욕거래소, 유로존, 호주 쪽 금융시장의 시황을 대충 훑어본다. 전날 밤 전 세계금융시장의 흐름을 보고 사무실을 나왔기에 잠든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어 수 십 통의 메일을 확인한다. 연구소, 언론, 금융기관과 유료로 받아보는 자료들도 속속 도착해 있다. 특별한 이슈가 없는 날은 한 시간 넘게 세계금융시장동향을 본 다음 찻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7 시가 가까워지면 하나둘씩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현직에 있을 때나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나의 하루는 변함없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수십개의 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지만 일주일에 최소한 하나의 주제로 리포트를 쓰고 있다. 금융시황과 미래전망에 대해 분석하고 거시경제, 미시경제는 물론 회사 채권과 주식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글을 발표한다. 실용적인 글은 객관적인 근거와 경험을 토대로 내 주관을 명확하게 얘기해야하기 때문에 쉼 없이 공부하고 변화를 따라가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신기술과 산업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를 결정할 때도 반드시 그 회사를 탐방하여 담당자들과 미팅을 하거나 경영진을 만나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내 리포트 하나 보고 수 천 만원에서 수십억을 투자하는 지인들이 대부분이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일반인은 참여하지 않은 10년 넘게 함께한 멤버(투자자 및 파트너)만 극히 제한된 인원이나 기관투자가들로 한정된 헤지사모펀드를 운영하고 있기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일체 없다. 현재 리츠, IPO, 채권, 부동산, 전환사채, 미술품, 선물, 공매도, 영화, 드라마제작, 스타트업, 파생상품, 주식 등 다양한 상품에 투자하고 있다. 일주일이 멀다하게 도착하는 스타트업의 투자제안서, 사업기획서, 비상장, 기존상장사들의 다양한 투자의향서들을 보는 것도 반복되는 일과다. 현재 일반인들은 제외한 극히 제한된 인원만 참여하는 사모펀드를 운용중이며 여러 기관투자가들과 협업하고 있다. 
 
나의 어릴 때 꿈은 농협직원이 되는 거였다. 초등2학년 때 선생님 심부름으로 농협에 갔다가 농협직원이 책상에 돈다발을 쌓아놓고 돈세는 것을 보고 금방 그렇게 정해졌다. 농협직원이 되면 저 돈을 가져가 엄마 병을 고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내 꿈은 그렇게 쉽게 결정된 것이다. 그 돈은 농협직원의 것인 줄 알았기에...

첫 번째 꿈이 돈과의 연관이었는지 사회생활 대부분은 자금과 연관된 부서에서 일했고 결국 자본주의 최중심인 투자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명함엔 늘 M&A전문가(기업인수합병 및 기업 가치평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녔지만 지금은 IPO와 투자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투자의 세계는 오직 한 길 흑백처럼 분명한 결과만 존재한다. 중간도 없고 반드시 상대를 이겨야 내가 살 수 있는 이 명백한 게임의 법칙이 너무나 좋다. 하여 난 단순하고 간결하며 뒤 끝이 깨끗한 것에 익숙해져 있다. 아무리 큰 딜을 성사시키고 수십, 수백억 큰 수익을 낼 때도 안도감과 잠시의 성취감뿐이다. 반대로 큰 손실을 입거나 큰 딜에 실패해도 하루이상 담아두지 않는다. 투자는 내 일이자 성장을 위한 과정이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길이기에 항상 긴장되고 성취에 대한 설렘으로 즐겁다.

하루에 최소한 8시간을 책상에 앉아 일한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있을 때는 늘 기업을 탐방하고 그 회사가 생산한 제품들이 어떻게 판매되고 있는지 슈퍼나 도매상 등을 돌아보는 것도 일과다. 캐나다에 있을 땐 걷는다. 하루 3시간 빠르게 걷고 1시간 이상은 휄스를 한다. 오랜 시간 책상에 앉자 있는 시간과 균형을 유지하게기 위해서다.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을 볼 시간에 기업들의 사업보고서(재무제표)를 검토하거나 거시경제와 주요 국가들의 금융시장을 모니터링 해야 하고 다양한 주제의 글을 쓸 자료들을 검토하고 취합하기에도 늘 시간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낮 시간이나 주말이면 꼭 순수 문학작품을 읽거나 습작한다. 실용적 글을 쓰는 것과 순수 문학에 대한 거리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 집은 언제나 숲을 볼 수 있는 큰 산 아래에 있다. 틈나면 산행을 가는데, 길가다 초연히 피어있는 야생화를 발견하곤 탄성을 지른다. 좋은 시나 음악을 접했을 때 정신이 아득해져 그만 눈가에 이슬이 맺혀 가슴이 먹먹해 진다. 조금 쓸쓸함이 느껴지는 숲에서 가만히 나무를 보듬고 그들의 소릴 듣는다. 비로소 내면의 울림과 자연이 동화되어가는 이 카타르시스는 진정한 혼자가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다. 투자활동에서 아무리 큰 수익을 내고 만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아도 이런 희열과 내 감성의 충만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열다섯 사춘기는 쑥 지나가버렸고 사랑이니 꿈이니 하는 감정들은 사치였다. 스스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학업을 이어가야 했기에 그 고운시간들은 무심하게 지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감성들은 그대로 가슴에 저축해 두었다. 그 때의 감성과 빛바래지 않은 순수를 온전히 지켜온 내 자신에게 무한한 감사와 경외를 느낀다.

어느 부분에도 이입되지 않는 내 영적세계는 절대 일과 연관시키지 않은 것이 내 삶의 원칙이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도 한 송이 야생화에 감탄하고, 음악, 한줄 시에 감동을 느끼는 여린 내 감성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늘 꼬리표처럼 달고 살았던 면도날. 샤프. 차가운 이미지가 나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나는 지금도 공과 사를 분명한 두 경계로 갈라놓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며 살고 있다. 그랬기에 이 살벌한 투자세계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매일매일 감사함과 고요함 속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려는 것도 자본주의 최 일선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함이다. 선하고 부드러움 그 여유가 강함을 이기고 냉철함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을 투자세계에서 터득한 나만의 이치이다.

 


 번째 길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군부독재시절 동아리나 토론회조차도 쉽지 않아 스스로 문학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어디 꿈은 그대로 이뤄지는가.

결혼 후 아내가 첫아이의 우유 값이 없어 쌀을 갈아 이유식을 대신하는 걸 보고 심한 충격과 자괴감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선배가 하는 사업에 보증을 서서 모든 것을 잃은 결과였다. 방 한 칸 얻을 수 없어 아파트 대피소에서 비닐을 치고 얼마간 살아야 했던 절박한 순간들이었다. 그 때 동인활동을 하던 문우들과도 단절했고 문학서적도 불태웠다. 가장은 무조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몇 가지 목표를 위해 문하과 단절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모든 목표에 도달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가족의 권유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 한국문인협회 주관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에 당선되어 작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하지만 한 번도 작가라고 내세워 본적이 없다. 난 문학인과 투자가라는 두 경계에서 투자전쟁에서 살아남은 투자가의 한 사람 펀드매니져, 에널리스트로 기억되길 원한다. 하지만 투자를 벗어난 사람들과는 여과 없이 나의 순수 감성을 공유하며 오랜 우정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실천해 왔던 지식기부활동에서 인연 맺은 사람들과 내 경험을 공유하고 투자하면서 그들의 자산이 커가고 보다 윤택한 노후를 준비하는데 힘 보태며 함께 가길 원한다.

나는 이 투자의 세계를 천직처럼 좋아하고 즐긴다. 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는 삶의 활력을 주고 내 정체성을 찾게 해 준다. 무엇보다 늘 깨어 있어야 하고 항상 공부해야 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세계가 너무 너무 좋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정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어 최고다. 하루에도 수억 수백억의 큰 자금을 움직이지만 항상 내 지갑엔 몇 만원이 전부다. 인터넷에서 옷을 사 입고 일반석 비행기를 자주 타며 어떤 자리에도 청바지를 입고 나간다. 겉치레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게 있어 돈은 컴퓨터상에 나타나는 숫자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분명한 나만의 색채를 지니고 나로 살고 있다. 체면치레나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다. 보편적인 상식과 에티켓을 중시하고 겸손하며 배려하는 자세를 소홀히 하지 않는 다는 것도 내 삶의 원칙이다.

꼭 해보고 싶었던 꿈이 몇 가지 있다. 한국의 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선진국 금융시장에 상장시켜 그 기업들이 세계적기업으로 성장하도록 주춧돌을 놔 주고 싶은 꿈이다. 또한 아직도 금융문맹 한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금융기법 교과서를 펴내는 것이다. 선진금융시스템의 이해와 파생상품, 대체투자, 거래시스템 등 새로운 금융지식을 배울 수 있는 책을 펴내는 것이다. 지금 운용하는 한국에 거점을 둔 헤지사모펀드를 잘 키워 후배를 양성하고,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 꿈도 진행형이다. 그러다 무언가 번잡하고 잡다한 생각이 들때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바람처럼 여행을 떠나 낮선 곳에서 떠도는 나그네이고 싶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내 본질의 정체성은 어디에도 걸림 없는 바람처럼 보헤미안으로 돌아가는 길. 영원한 로멘티스트가 되어 한쪽 경계의 길에 남고 싶다.
 

자명
자명

글쓴이: 자명
블루애플자산운용주식회사
블루애플리츠펀드운용주식회사
CEO & 이사회 의장
M&A전문가(기업인수합병 및 기업평가)
Capital of Golden Bridge
아시아지역 투자총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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