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프롤로그(prologue)

2018년 12월 1일 저녁. 한 모임에 참석했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옛 교우들과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갖고 푸짐한 저녁 식사 후에 귀가했다. 주일 준비를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갑자기 교회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한 지역에서 36년을, 그것도 척박한 디아스포라의 이민 상황에서 한 교회를 33년 섬기며 아직도 설익은 영혼의 잔상이 스마트폰의 이상 증상처럼 뚜렷해 조금은 놀란 마음에 자판을 두드린다. 온전한 변화에 동떨어진 형상이 너무도 익숙지 않아서다. (글을 마무리하니 새벽 3시 33분을 지난다.)

천국이 실현되는 무대, 교회

내가 아직도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머리 되신 주님 때문이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시라면, 주님이 반석 위에 이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다면 내가 교회를 굳이 사랑해야 할 이유는 달리 따로 없다. 구속 받은 성도들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교회의 출발은 단독자가 아니라 반드시 두셋 이상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saints)라 부르심은 우리 각자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주님과 관계를 갖는다. 교회는 그래서 성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자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전으로 삼위일체적 자기정체성을 갖는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us)가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길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그 본의(本意)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사랑이 반드시 교회 사랑으로 구체화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가 주장한 것은 교회지상론이 아니라 교회애정론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 사랑을 실제로 체험하고 그 사랑을 서로 간에 나눈다.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 연결된 지체들이 서로 사랑을 실현하는 영적 삶의 무대다. 교회 안에서 구현되고 경험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천국 사랑의 그림자인데 그러지 못한 현실에 괴로워한 적이 그 얼마였던가! 얼마나 자주 지체로 인해 기뻐했던 우리인데 역시 그 기뻐했던 지체로 인해 얼마나 많이 가슴 아파 흐느끼는 우리들인가! 애증의 시소를 타면서 환희와 비탄 속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시계추의 진자 운동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머리되신 주님과 지체의 연합을 이루는 교회

지체의 아픔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내가 과연 주님의 지체이기나 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지체가 다른 나무에 붙은 가지이기 때문에 내게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가? 같은 우리 안이 아닌 다른 우리에 속한 양들이 서로 모일 때면 사랑이 무르익는데, 같은 우리 속에 거하는 양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쉬 휩싸이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관계가 서먹할수록 가장된 모습이 너무 은혜롭고, 가까우면 가까운 만큼 경박하고 오만불손하기까지 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으로 위안 삼는 것은 말씀을 오용(誤用)하는 잘못을 범함이다. 마귀의 역사로 인해 그렇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마귀마저 불쾌해할 정도의 해묵은 전가(轉嫁) 행위에 해당한다.

문제는 내게 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너와 내가 어우러진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주님을 손수 머리로 자리매김하신 교회를 사실상 너무 우습게 여겼다. 세상은 교회를 박해했지만 교회의 숨통을 막아버린 것은 정작 교회의 지체인 우리 자신이었다.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서 세상에 그 온전함과 순전함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교회의 각 부분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닌가! 아니라고 반박할 자가 어디 있는가! 있으면 머리 되신 주님을 위해서라도 변명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오늘 주님을 자신들의 상층부에 계신 머리로 여겨 그분의 수위권과 통치권을 인정하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눈과 귀와 입이 역사하는 교회

두뇌를 제외하더라도 머리엔 눈과 귀와 입이 달려있지 않은가? 교회에는 주님의 눈과 귀와 입이 있다. 이는 비유인 동시에 사실이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한 순간도 빠짐없이 살피시고 쉼 없이 들으시며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데 교회 안에서 불법이 난무함은 웬 까닭인가? 마음의 은밀한 생각마저 놓치지 않으시는 세미한 주님의 청력이 우주에 가득한데 함부로 지절거림은 무슨 영문인가? 만물을 태우는 불,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이 쉼 없이 선포되는데 도시 경청할 태도를 보이지 않음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교회 안에 도사린 죄의 덩어리가 주님의 시선을 압도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말들로 가득한 인간의 말들이 주님의 귀를 손상시키며, 거룩한 말씀을 멸시하는 신자들의 당돌함이 말씀이신 주님을 침묵케 만든다. 주님의 눈과 귀와 입이 있음에도 전혀 저어하지 않는다.

가라지의 넓은 길에서 벗어나 알곡의 좁은 길로 들어선 빛의 자녀들이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바라보면 황송한 모습에 감히 고개 들 수가 없다. 죄악을 차마 보실 수 없는 주님의 순전한 시선은 붉게 충혈 되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한 소리를 듣고파 양 귀를 쫑긋 세우신 모습 대하기가 너무 죄스럽고, 목이 터져라 외치느라 부르튼 그 입술을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머리되신 주님께 순응하는 교회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한결같이 자신 안에 거하기를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것이 생명 관계의 시작이요 마지막이요 실제의 모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 거하면 뿌리에서 공급되는 진액으로 인해 모든 가지는 산다. 뿌리에서 전해진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땅의 질서에 반하며 하늘의 질서에 순응하도록 되어 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사는 때가 되면 하나님은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함과 같은 이치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머리의 지시에 순응함이 매우 자연스럽다. 죄를 짓기는 거북스럽고 불순종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어둠을 본능적으로 싫어해서 늘 태양을 좇는 해바라기처럼 빛을 따라 사는 것이 몸에 뱄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태양 빛에 녹거나 쪼그라드는 해파리처럼 파리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늘 교회 안에 해바라기 신자는 찾아보기 힘들고 해파리들이 득시글거림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영(令)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왜 교회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돌팔매질의 대상이 되었는가 생각해보라! 의와 진리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것은 핍박이지만 교회답지 못한 이유로 인해 세인에게 지탄받음은 당연한 부끄러움이다. 지체들의 잘못으로 인해 머리 되신 주님의 이름이 모욕당함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주의 긍휼에 집중하는 교회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이름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이름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음을 탄식했는데, 오늘 우리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신의 안일을 도모키 위해 주님의 이름을 가벼이 여김은 씻지 못할 죄악이다. 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삯군을 정죄했던 자신의 지난 삶이 결과적으로는 삯을 위해 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분명히 이리는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선한 목자로 자부할 수도 없다. 주님을 본받던 바울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일생의 목회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숱한 말씀을 매일같이 암송하면 할수록, 기도의 무릎을 자주 그리고 오래 꿇으면 꿇을수록 바울처럼 성도들에게 권할 수 없다는 자괴감만이 선명해진다. 그러니 어찌 부끄럽고 통탄할 일이 아닌가!

나의 의로움은 세리나 창기의 의에 미치지 못하고 나의 경건 능력은 바리새인의 경건 훈련에도 한참 쳐지니 새삼 무엇을 말하랴!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선하신 주님의 긍휼을 끝없이 바라보는 것이며,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고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도 여전히 살아 꿈틀대는 자신에 대해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한 상호 임재의 삶을 부단히 확인하며 예수 죽음이 내 죽음이요 예수 생명이 내 생명임을 믿음으로 긍정하고 매순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바탕이 없다면 내가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비록 허물이 너무 커서 내 존재를 모두 감싸는 처지에서라도 주님의 겉옷 한 자락이라도 매만지고 싶은 것은 주님께서 베푸실 긍휼이 한없이 크고 넓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나의 기도는 온통 긍휼에 집중되었다.

엘리야의 능력과 솔로몬의 지혜, 에녹의 동행과 다윗의 믿음이 태산처럼 쌓이고 대양처럼 사위(四圍)에 그득하다 해도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모두 허사일 것이기에 그러하다. 한 티끌의 긍휼이라 해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생명을 불사를 마음이다.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의 그릇이 되기 위해, 에발산이 아닌 그리심산에서 저주 대신 축복의 선언자가 되고 싶은 것은 주님이 부어주신 긍휼의 눈물 한 방울을 그나마 내 병에 채웠기 때문이다. 그 많은 허물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음은 바로 이 자그마한 긍휼 한 조각 때문이다. 이제라도 오늘의 교회들이 주님의 긍휼에 집중하기를 절박한 심정으로 하소연한다.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영광, 교회

군림하는 바로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되었지만 해방자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되지 않았던가! 교회는 세상에서 다스리려는 위치에서 내려와 자기를 버리고 세상을 섬기려는 종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힘을 길러서가 아니라 본래적인 능력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허비하면서까지 교회 밖에 머문 자들을 섬김에서 비로소 실제의 강함을 키워갈 수 있다. 그것이 곧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가 사는 이치다. 교회는 세상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필요에 응해서 자신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굳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을 머리로 한 교회가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하는 이유(raisons d'être)다.

우리가 천상교회에서 교회의 원형을 친히 보게 될 때면 교회의 무궁한 영광이 얼마인지를 제대로 가늠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자기 피로 사실 정도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시고 세우신 교회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주”라는 신앙고백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영속성은 지상 교회가 무너져도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영원한 교회임은 엄연한 사실이다. 교회는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구속 받은 성도들을 통해 사탄과 그의 졸개들을 책하시는 하나님의 자존심이다. 진리의 터전, 영적 전쟁의 최전선,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노아의 방주, 광야의 성막, 예루살렘의 성전, 에스겔의 새 성전을 거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그 형태와 존재 방식을 달리 하면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장구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천년의 미몽에서 잠을 깬 것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방망이가 있어서였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면 깊은 못의 이무기로 머물고 말듯이 교회가 끊임없는 개혁으로 자신을 재형성시키지 못하면 영적 비상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세상 곳곳에 흉물스런 자태로 남겨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교회 안에 잠재된 개혁의 씨알 때문이다. 단연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 이미 개혁된(reformed) 교회는 지금 재형성되는(re-forming) 교회다.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 재형성되어 다시 형성되는(re-formed and re-forming) 지상의 모든 교회에 무궁한 주님의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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