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말씀과 기도, 부드럽지만 강한 병기

어떤 사람이 강자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너그럽고 부드러운 남방의 강(强)과 무장하여 죽음을 불사하지 않는 북방의 강(强)을 예로 들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관용의 강함을 배우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용기의 강함을 배울 것을 가르쳤다. 지금의 세상에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가? 불법이 성하고 패역한 세대가 아닌가? 주님 당시도 그러했거늘 지금은 더욱 악이 기승을 부리는 극악무도의 때가 아닌가? 평화의 메시지보다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가 필요한 시대다. 넓은 사랑과 아량으로 세상을 품어야 하지만 세상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교회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하나님의 진노를 외칠 예언자가 요구된다.

영적 전쟁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적 용력을 갖춘 지혜가 돋보여야 한다. 영적 용맹함은 말씀과 기도로 갈고 닦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막강함의 경지다. 강자라 해서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총칼은 인간의 강약을 구분하지 않는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진정한 강자다. 말씀과 기도는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어떤 죽음의 위기도 극복할 생존을 위한 병기다. 말씀과 기도의 절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부드러움이다. 진정한 강함이다.

약함으로 위장하신 절대강자 주님

노자는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강함이라 보았다. 바울은 약함이 곧 강함이라 믿었다. 이사야는 총칼을 가진 메시아가 아니라 약함으로 위장하신 주님을 노래했다(사 53장). 아굴은 그의 잠언에서 작고도 지혜로운 것 넷을 말하면서 바위 사이에 집을 짓는 토끼(coney)를 언급했다(잠 30:26). 약하면 강한 것 사이에 거하면 된다. 반석이신 주님을 터 삼아 거하는 자가 강자다. 사람의 강함은 때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남을 방해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해, 성령의 능력은 사람의 연약함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세상적 관점과 다른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주님이 스스로 약함을 취하신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함이시다. 절대강자이신 주님을 모시면 겉사람은 약해도 속사람은 날로 새롭고 나날이 강하다. 유다의 아사 왕은 창병 30만과 궁사 28만으로 구스의 세라가 이끄는 백만 대군과 스바댜 골짜기에서 마주쳤다. 그는 군사작전을 펼치는 대신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대하 14:11) 하나님이 그들을 치시자 한 사람도 살아남은 자가 없는 완승을 거뒀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사랑의 본체 하나님

탈무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열두 가지를 말하지만 정리하면 여덟 가지가 뚜렷하다. 돌은 단단하나 쇳덩이를 당할 수 없고 쇳덩이도 불에 녹는다. 불은 물로 끄고 물은 증발되어 구름에 흡수되나 구름은 이내 바람에 흩어진다. 사람이 비록 바람을 견디나 죽음 앞에 무릎 꿇는다. 솔로몬은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다 노래했으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을 건너뛸 만큼 위대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기에 가장 강하다. 항상 있을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 사랑이기에 가장 강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영웅이나 위대한 정복자가 아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온 세상을 이긴다.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인 사탄을 이기는 것은 믿음의 기도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는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라고 불같은 기도를 토했다. 메리 여왕은 백만 대군보다 그의 기도를 더 무서워했다. 강한 것은 믿음과 기도다.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든 바울

적당히 강하면 견고하나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太剛則折).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무장은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맹장으로서 난세의 산을 깎았다. 그보다 덜 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길을 닦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외유내강의 변장술로 그 길을 걸어갔다. 울지 않는 새를 앞에 두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말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죽이겠다.” 장비를 닮았다. 성경의 인물로는 대제사장 말고의 귀룰 벤 베드로에 비교된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만 살짝 베려고 정조준하고 휘둘렀을까? 아니다 죽일 작정으로 내리쳤지만 빗나가서 말고는 운 좋게 귀만 잘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말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겠다.” 관운장을 닮았다. 바울에 비교된다. 사랑의 대서사시를 쓴 바울은 사랑의 사도였지만 선교 초기에 마가를 다룸에 있어서는 혹독하리만치 가혹했다. 밤빌리아 버가에서 중도 하차한 마가를 2차 선교여행 팀에서 제외시킨 것이 다분히 감정적인 처리였다고 결론지을 하등의 이유도 없다. 바울은 그를 완전히 내버린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멘토와의 만남을 통해 마가는 변화의 기틀을 마련했고 그는 나중에 바울 자신에게 유익한 존재로 언급되었다.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든 것이 바울의 경우에는 중도 이탈한 마가를 팀에서 제외시킨 특단의 조처였다. 바울이 마가를 버렸기에 마가는 바나바의 그늘에 거할 수 있었다. 최초의 복음서를 작성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한 최초의 인자가 바로 바울에게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울지 않는 새를 울 때까지 기다린 바나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말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유비를 닮았다. 바나바에 비교된다. 바울이 버린 마가를 바나바가 거둬들인 것은 단순히 사촌지간이었다는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소에 은거중인 바울을 찾아 자신의 후계로 내세울 만큼 그는 숨은 인재, 설익은 가능적 존재를 파악하는 안목이 있었다. 이런 그였기에 마가의 신앙 인격이 원숙해질 때까지 인내 속에서 하나의 원석을 광채 나는 보석으로 가꿀 수 있었다.

베드로는 급하고 강했다. 야고보도 급하고 강했다. 요한도 급했으나 나중은 유순함에 이르렀다. 초목이나 사람이 죽으면 굳고 딱딱해지지만 살았을 때는 부드럽다. 강한 이빨은 부러지나 부드러운 입술은 무덤까지 간다. 단단한 돌을 두드리면 깨어지지만 흙은 때릴수록 단단해진다. 강하고 부드럽기는 정말 어려운 경지다. 주님은 사자(Lion)와 어린 양(Lamb)이시다. 십자가에서 가장 약자의 모습을 보이신 주님은 부활로 가장 강한 이미지를 굳히셨다. 우유처럼 부드럽고 금강석처럼 단단하라!

말씀의 강자가 최강자

말씀의 강자가 최강자다. 말씀에 붙들리고 말씀을 붙들어 살면 세상에 두려운 것 없고 부러운 것도 없다. 말씀으로 충만하면 전천후의 사역자가 된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새벽이슬처럼 하늘의 메시지가 임한다. 무슨 주제가 주어져도 주저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진리의 성령과 교통이 되면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쏟아지듯 그렇게 말씀의 진리가 임한다. 수원지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말씀의 수원지는 영원한 샘터다. 세상 사람들은 늘 생수를 갈급해한다. 수도꼭지도 이상 없다. 그런데 물이 나오다 막힌다면 수도관이 막혔다는 증거다. 막힌 곳을 뚫거나 관 자체를 교체해야 한다.

한 사람의 사역자를 만들기 위한 노고와 희생은 크다. 관의 교체보다 수월할 것은 막힌 곳을 뚫는 공사다. 내가 말씀에 막히면 관이 막힌다. 나의 말씀생활이 지속적이지 않으면 관에 부식물이 생기거나 혼잡물이 섞인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오래잖아 관이 막힌다. 막힌 말씀을 소리높이 외쳐도 허공을 치는 메아리처럼 빈 소리만 울린다. 설교자 자신의 마음을 때리지 않는데 청중들의 영혼에 가 닿을 리 없다.

지침 없이 자기를 담금질 하는 강자

강해지려면 강하게 자기를 훈련시켜야 한다. 강훈 없는 강자는 없다. 비슷한 기량을 가진 사람이 하나는 열흘 훈련하고 다른 사람은 백일을 훈련했다면 후자가 강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영적 세계에서도 이런 상식이 통한다. 훈련 없이 강자가 되려는 사역자들이 의외로 많다. 하늘의 능력을 덧입기만 하면 만사가 오케이라는 식이다. 최단시간에 최고의 효과를 얻을 방도만 있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 세계를 일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수고를 위해서는 경비도 아깝지 않고 피곤도 개의치 않는다. 그럴듯한 세미나가 판을 치지만 실효가 없다. 귀한 헌금만 탕진한다.

강자는 강하게 자신을 훈련시켜 강자의 위치에 올라도 그 수준을 계속 유지하거나 더욱 강해지기 위해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챔프가 되기 전보다 챔프가 된 이후에는 훈련의 강도가 더 세다. 챔프에 버금갈 도전자들이 무수하기 때문이다. 한 번 강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려면 아예 약자로 적당히 구르며 살아가는 편이 낫다. 어중간한 길을 걸으려면 애초부터 걷지 않음이 유익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강자는 끝없이, 지침 없이 자기를 다그치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그런 강자다. 그래야만 용사가 된다.

성도여! 말씀과 기도로 절대강자가 되라

사람으로 태어나 어차피 한 생을 살아갈 텐데,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면 우주의 정복자가 될 꿈 정도는 지녀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정복자가 되라 함이면 망설일 만하다. 영적 세계에서 용사 중의 용사가 되고 영적 전쟁에서 강자 중의 강자가 되는 것은 도전할 만한 목표다. 성경에 수록되지 못하겠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영적 포스(force)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없었다. 있어도 몇 권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한 자료가 무궁무진하다. 그 말씀 속에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능력의 정도는 무한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견고하고 확실하다. 나의 논점은 이렇다. 말씀에 정통하고 기도의 무릎을 오래, 깊게 꿇음으로 절대 강자의 길로 진입하자는 것이다. 구약 인물이 멀다면 신약에서 바울이 있지 않은가? 신약도 멀다면 교부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멀다면 청교도 설교자들과 수도사들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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