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5)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이 말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의 저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에서 서문을 여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말이다. 여기서 ‘그들’이라 함은 동양인을 가리킨다. 그는 인도에 대해서도 "도대체 역사라고는 없는, 적어도 남에게 알려진 역사조차도 없는 사회"라느니 영국의 인도 지배는 "낡은 아시아 사회를 파괴하고 서양의 물질적 기초를 수립하는 이중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소리를 남발했다.

인류의 평등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장했던 카를 마르크스조차 동양은 자기 자신을 재현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지 못한 열등한 존재라고 정의 내렸다. 이런 시각은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반복됐다.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가까이 가서 보면 볼수록 그 멍청한 나라에 점점 더 진절머리가 난다. 중화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추악한 특징을 삼사천 년에 걸쳐서 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유지해왔으므로 실로 미라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

서양인의 오만방자한 사고방식은 2001년 9월 11일, 9.11 비극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연합군 전사자 148명 이라크군 전사자 3만 명이 죽는 이라크 전쟁으로 확산하였다. 오리엔탈리즘은 우리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처 36년간의 일제강점의 비극, 6·25전쟁과 같은 비극은 낳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핵 문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민족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동양은 항상 서양이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양은 ‘민주주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전제정치와 독재자, 폭군의 강압적인 정치제도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온 비민주적인 군주국가라고 정의했다. 동양은 폭군의 땅이었기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양이 그들을 폭군에게서 해방해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소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을 어떻게 보는가?

미술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글이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장의 그림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어내기가 더 쉽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Mort de Sardanapale)의 죽음’은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드라크루아의 '샤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년 작,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영국의 시인 바이런(Baron Byron, 1788~1824)의 시극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에 감동하여 그린 그림이다. 사르다나팔루스(Mort de Sardanapale)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거벗은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들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장면이 화폭 가득 담겨있다.

이 그림을 보면 광란이 벌어지고 있음을 한눈에 할 수 있다. 중앙에 붉은색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아시리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왕이 기대어 누운 채로 애첩과 애마의 살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어딘가에 우울함이나 권태로움이 묻어날 것 같은 표정이다. 침대에 한편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살해되어 엎드려 있다. 그의 발끝 쪽에는 한 여인이 몸을 비틀면서 살해당하고 있다. 왼쪽도 막 칼을 맞은 여인이 보인다. 왼쪽에서는 흑인 노예가 화려한 장식을 하고 눈부시도록 흰 털을 자랑하는 말을 끌고 들어오고 있다. 바닥에는 온갖 보물들이 가득하다. 그림의 구석구석에서 유럽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그대로 배어 나온다.

 

일단 그림 속 장면 자체가 실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방에 대한 선입관이나 인상 때문에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제국의 멸망이 코앞에 다가오는 순간에 살육 축제를 벌이는 괴기스러운 장면은 미개하고 잔혹한 동양의 이미지를 그 어떤 것보다도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또한, 그림 속에 동양 여성들은 참혹하게 파괴당하고 있는 순간임에도 마치 교태를 부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고 있다. 서양미술에서 동양은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관능적인 것으로 자주 묘사된다.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을 대표한다면 동양은 비합리성과 감각적인 관능으로 규정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역사상 동서양이 처음 충돌한 사건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과 페르시아 제국 간 발생한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과도함 △노예근성 △전제주의에 빠질 성향이 있지만, 아테나의 위대함은 △검약 △동등함 △자유란 미덕에 기초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영속하게 됨을 내포하는 작품”이라며 “이러한 차이를 인지하면서 그리스인의 우월의식이 점차 발전했다.” 중세 유럽은 왜곡된 기독교 세계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들에게 동양은 이교도의 세상일 뿐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오늘날에는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서구 국가들은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도덕적으로 타락되었고 이상(異常)하지만, 서양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하고 정상(正常)이라는 식의 인식을 만들어오면서 동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해왔다. 이러한 인식은 문학 등의 예술 작품이나 여행기, 동양(東洋)의 언어와 역사, 지리, 문화에 관한 학문과 연구를 통해 형성되고 확산하였다.

대표적인 서양인들의 동양인 조롱의 표현 '찢은 눈'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를 합리화시키는 수단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식민지지배를 낳고 정당화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과 동양의 경계와 차이를 끊임없이 확장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매체와 문화 양식들을 통해 동양을 열등하고 착취 가능한 대상으로 파악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그런 의식들은 지금도 구체적인 매체를 타고 사진, 잡지, 광고, 음악, 영화, 교육 등을 통해 사회 깊게 스며들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내면화 작업을 통해서 다가오기 때문에 가랑비에 옷을 적시듯 당사자들이 의식하지는 못 사이에 조금씩 우리를 포함한 동양인들의 뇌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이 되어 버렸다. 이로써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을 구별 짓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에 사대주의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나 언론은 이를 부추기는 악행을 저지른다.

오리엔탈리즘과 대한민국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경제·군사적으로 열세한 동양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러한 동양에 대한 서양 인식은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과 6.25 전쟁,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핵 문제도 오리엔탈리즘이란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전쟁의 기억이, 기억의 전쟁으로, 무기의 전쟁으로 확장되어 오늘날 그들의 기억이 무기의 전쟁, 핵무기 문제까지 확장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상은 미국의 동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주국방과 같은 발상은 요원하게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무기와의 전쟁도 아니고, 기억과의 전쟁도 아니고, 더더욱 북한과 싸움이라기보다는 서방국가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과 싸움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주적(主敵)은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런데도 더 비극적인 것은 그 피해 당사자인 동양인들이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큰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양인이나 자기 민족을 비하하고 서구인들의 사상이나 문화, 신체적인 용모까지 우월하게 여기는 현상이 있다. 이는 과거 프랑스, 영국,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열강들이 동양의 여러 국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동안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동양인의 사고방식에 자연스럽게 오리엔탈리즘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즘의 피해자인 우리나라가 오히려 동남아시아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을 가지는 기(奇)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해결방안은 없는가?

그러면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문명의 충돌』의 저자로 잘 알려진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냉전을 대신하여 문명 간 충돌이 21세기 세계 정치 질서를 결정할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사이드는 미국의 공격은 헌팅턴의 주장처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미국이, 더 나아가 서양이 이슬람 문명, 즉 동양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무지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해결방안으로 『문명의 공존』을 주장하는 하랄트 뮐러(Harald Muller)에 대한 사이드(Edward Said)의 평가는 어떠한가? 세계의 문명권을 대결 구도의 이분법적 논리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 관계로 본다는 점에서 뮐러의 주장은 일견 사이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뮐러가 ‘문명의 공존’을 주장할 때, 그 중심에는 항상 서양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즉, 뮐러의 주장 역시 문명 간 상대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기보다는, 세계화에 의해 전 문명이 서구화되고 있음을 전제로, 문명 간 공존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오리엔탈리즘은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이다.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3가지 요소, 즉 신, 인간, 자연을 내포한다. 대부분의 세계관은 이 세 가지 요소에 적절한 배치가 필수적이다. 성경은 세계를 파악하는데 적절한 틀을 제시한다. 즉, 창조, 타락, 구속이라고 하는 관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되었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으로 인간은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 한 이후에 인간이 만들어 가는 문화가 신, 인간, 자연의 올바른 위치를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화, 즉, 동양과 서양을 지적하는 문화 차이의 결정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성의 타락”으로 신, 인간, 자연, 중 어느 하나를 필요 이상으로 절대시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실제를 왜곡시켰다. 그 결과 인간의 문화형성과 함께 역사 왜곡으로 나타났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삶 속에 나타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 인간의 개현(開顯)을 위한 노동의 신성성을 존중한다. 인간의 개현(開顯)성이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것과 일치하여 타 존재자의 존재도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즉 존재 개현(開顯)은 인간 혼자가 아닌 언제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이미 관계 지어져 있는 존재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인간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리고 신의 자리를 차지하여 군림하려는 데서 오는 인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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