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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신학적 반성과 새로운 길 모색박호용 교수
  • 박호용 교수(대전신대 대학원장)
  • 승인 2019.01.0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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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대일고 1회, 연세대 철학과(B.A.), 장로회 신학대학원(M.Div.), 연세대 대학원 신학과(Th.M., Ph.D.) 졸업. 대전신학대학교 교수(구약학) 역임. 대전신학대학교 신대원장, 유라시아 선교회 회장 역임, 총회 파송(예장통합) 선교사[설교집]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부르다가 내가 죽을 노래》,《첫사랑의 날카로운 추억》,《예수사랑의 연가》,《감악산의 두 돌판: 요한복음서 강해설교》 [저서] 《야웨인지공식》,《폰 라드: 구원사의 신학》,《요한복음서 재발견》,《요한의 천재성: 상징코드》,《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창세기 주석》,《출애굽기 주석》,《에스겔 주석》,《요한복음 주석》,《성경개관(한글판, 중국어판)》 와 역서 다수

1.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는 약 500년 단위로 분열과 개혁의 길을 걸어왔다. 기독교는 셈계, 헬라계, 라틴계라는 세 종족으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500년경 단성론자들인 셈계가 분열되어 나갔다. 이어서 1054년 동서교회의 분열로 헬라계(동방교회)가 분열되어 나갔다. 그 후 서방교회인 라틴계는 종교개혁으로 다시 가톨릭과 기독교로 분열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년이 지났다. 이는 또 다시 종교개혁이 요청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기독교는 지난 2017년 역사적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과 관련된 성지를 방문하거나 각종 기념행사를 치렀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이전보다 더욱 새로워지고 부흥 발전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오히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 이전보다 더욱 부패하고 타락했을 뿐 아니라 끝 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의 타락상을 잘 보여준 책, 곽영신, 「거룩한 코미디: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맨얼굴」 [서울: 오월의 봄, 2015] 참조).

왜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500주년 종교개혁이 갖는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학적 반성과 새로운 길의 모색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2. 기독교 종교개혁의 역사는 언제나 ‘행위의 종교’에서 ‘말씀의 종교’로서의 환원(라틴어로 Ad fontes!-근원으로 되돌아가자!), 즉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에 있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준으로 그때가 제1의 종교개혁이고, 지금은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기독교 종교개혁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후 1세기 예수의 종교개혁이 ‘제1의 종교개혁’이고,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제2의 종교개혁’이고, 21세기 지금은 ‘제3의 종교개혁’의 때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제3의 종교개혁은 제2의 종교개혁(바울과 바울서신에 기초)을 넘어서서 그 근원인 제1의 종교개혁(예수와 복음서에 기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도덕적 차원의 개혁이고, 또 하나는 신학적 차원의 개혁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적 차원보다 신학적 차원이라고 했다. 즉 중세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타락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끊임없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학적 차원의 변화는 그 시대가 요청하는 시대정신이기에 그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개혁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루터가 살던 그 시대는 신학적 패러다임 시프트가 요청되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구호인 ‘아드 폰테스(Ad fontes!)’ 즉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패러다임 시프트는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바울의 복음인 십자가 신학으로의 환원이었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가톨릭은 도덕적 타락뿐만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요소들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만연되어 있었다.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교회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믿음’ 또는 ‘은혜’와 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재물이나 교회 직책 또는 인간적 공로와 같은 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거짓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빗나간 중세교회적 상황에서 루터는 바울 신학의 이신칭의(이신득의), 즉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인간적 행위(공로)로 구원(‘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같은 의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의로움을 이루신 그 은혜를 사람이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6-17절(내가 복음[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말씀을 붙들고 제2의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루터의 제2의 종교개혁은 바울의 복음(바울서신), 즉 ‘십자가 신학’과 ‘하나님의 의(칭의)의 복음’에 기초한 개혁이었다. 그런데 기독교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21세기 제3의 종교개혁은 또 다시 ‘아드 폰테스’, 즉 바울에서 예수로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필요하다. 즉 ‘십자가 신학’에서 ‘부활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의(칭의)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천국)의 복음’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 십자가 신학에서 부활의 신학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두 축(두 날개)이다. 그런데 지난 500년 동안 기독교는 십자가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또 한 축인 부활의 복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였다. 배가 양쪽이 균형을 이루어야 항해를 제대로 할 터인데, 십자가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나머지 기독교라는 배는 침몰하고 말았다. 십자가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사랑(은혜)의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희생)의 십자가이다. 기독교 신도들은 십자가를 강조하면서도 십자가가 갖는 두 가지의미 중 한 가지, 즉 전자에는 Yes하지만 , 후자에는 No했다. 즉 제자도로서의 십자가는 지기 싫은 것이다. 이는 비단 지금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싫은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고난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신앙이 필요하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과 세상 나라를 능히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다 넘어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나서 그들은 죽음과 세상을 모두 이기는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부활신앙 때문이다.

오늘 세상사에 초연할 수 있는 비결, 즉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넘어지고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는 강력한 힘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변화가 없고, 세상에 져서 세상이 이끄는 대로 살면서 변질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부활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부활의 복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의 능력이란 부활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다(고전 1:18 이하). 부활체험이 있어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제자도인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부활-십자가 구조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요 10-11-12장; 19-20-21장). 예수의 길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고, 제자의 길은 부활에서 십자가로의 길이다. 십자가 <---예수---> (부활) <---제자--->십자가. 그러니까 십자가와 십자가 사이의 중심에 부활이 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었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고,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했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이다(‘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저서, 「왕의 복음」 [서울: 쿰란출판사, 2018], 181-290쪽을 참조하라).

4. 바울의 ‘하나님의 의(칭의) 복음’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것이 바로 ‘아드 폰테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우리는 천국을 죽으면 천당가는 식으로 천국을 알고 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루터는 바울의 ‘하나님의 의’ 개념을 두고 능동개념이 아닌 수동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종교개혁의 신학적 토대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개념은 ‘가는 나라’ 즉 능동 개념이 아닌 ‘오는 나라’ 즉 수동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그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성경에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말은 단 한 구절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하나님 왕국)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우리(세상)를 통치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는 나라이지, 어딘가에 있을 장소를 향해 우리가 가는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천국)의 수동 개념이 중요한 것은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왕(주인, 최고, 기준의 의미)으로 모실 것인가 아닌가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으로 행차하시는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것, 즉 ‘왕의 교체’를 가리켜 믿음(회개, 거듭남)이라고 한다(갈 2:20).

그러니까 회개(거듭남)란 단지 회심과 같은 추상적인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 왕 삼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를 왕 삼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왕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왕 삼지 않고 다른 그 무엇을 왕 삼는다면 그것은 믿음(회개, 거듭남)이 아니다. 니고데모 이야기(요 3:1-15)나 부자청년 이야기는 바로 이를 잘 말해준다(마 19:16-30).

그런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현실을 보면 천국의 본래 개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즐겨 천국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로의 왕의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천국)가 예수로의 왕의 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런 예수를 믿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몰라서 예수를 믿었을 뿐이다(실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기복신앙, 즉 예수가 왕이 아니라 내가 왕이고 예수는 내 문제의 해결사(또는 보디가드)가 되어, 내 소원과 욕심을 만족시켜주시는 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로의 왕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은 속사람이 변하지 않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무늬만 그리스도인’, 즉 유사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왕의 교체에 의한 속사람의 변화가 없이는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지난 50년 동안 기독교는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즉 삶의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한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마음 중심에는 예수 아닌 자기만의 또 다른 왕을 꼭꼭 숨겨놓고, 입으로만 “예수 우리 왕이여”를 소리 높이 외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왕의 교체를 이루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제3의 종교개혁이 요청하는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으로의 패러다임 시프트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제2의 종교개혁은 칭의를 강조한 나머지 성화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했다. 제3의 종교개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천국) 개념이 왕의 교체라는 삶의 변화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의 교체로서의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왕의 교체」 [서울: 쿰란출판사, 2017], 89-117쪽을 참조하라). 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은 ‘부활의 복음’(요 11장, 20장)과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요 3장, 18장)을 가장 깊이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은 ‘제3의 종교개혁의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박호용 교수(대전신대 대학원장)  webmaster@bonh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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