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로는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 신문 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사)새길과 새일 부이사장, (재) 본월드미션 이사, (사)국제NGO글로벌비전 법인이사. 등

저서: 주기도문연구, 팔복, 충성된 일꾼되어가 기 등이 있다.

짧은 인생을 살아내면서 절망의 시간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절망을 절망이라 표현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한 말로 인해서 내 자신이 더 처참하게 무너져내릴까봐 늘 내안으로만 삼켜내야 했다. 내 안에서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투쟁하는 내면의 현실은 때로는 희망을 꿈꾸고 때로는 절망의 심연에서 떨어야 했다.

목회자로서 짊어져야할 교회의 무게, 가정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책임져야할 무게,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거룩한 책임감 등이 혼재되어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치고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마음에 큰 돌멩이 몇 개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다. 표현하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짐이 많다는 것은 해야 할 사명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많은 짐들 중에 작년에 짐 하나를 해결했다. 선친이 몸과 기도의 눈물로 터를 닦았던 기도원을 20년 동안 황폐하게 버려두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재건축하여 주님께 봉헌한 것이 큰 기쁨이었다. 황폐하게 버려진 기도원을 볼 때마다 답답하고 마음이 늘 편치 않았다. 그래서 더욱 외면했는지 모른다. 나에게 기도원은 마음의 족쇄였을 것이다. 그래서 황폐한 기도원, 철저하게 무너져버린 기도원, 사람들의 생각에서 지워져버린 기도원, 유적지에서 흔적만 남아 있는 옛 건물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것과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럴때마다 마음을 짓누르는 어둠에 깔려 질식할 것 같았다.

특히 인생의 돌 중에 기도원을 바라보면 그 절망이 더 깊었던 같았다. 에스겔 37장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인생에 어둠이 깊게 짖 누르고 있을 때, 삶에 희망이 전혀 안보일 때 자주 읽는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었다. 뼈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민족을 상징한다. 바벨론 포로로 10년을 지내다보니 귀국에 대한 소망이 다 사라져버렸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희망이 전혀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예언한 장이다.

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다. 그런데 뼈가 가득할 뿐아니라 심히 많고 아주 말라버렸다. 소망이 사라져버린 절망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나에게 기도원은 아버지에 대한 부채 의식의 산물이었다. 어쩌지 못하는 나에게는 절망의 덩어리였다. 희망이란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른뼈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마른뼈들이 살아났다. 주님의 은혜로 작년에 새롭게 기도원을 단장하고, 기도의 동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덩어리들이 빠져나간 느낌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마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희망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표현하는 분들이 많다. 구조적으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 모를 지경이다. 너무도 심각하게 무너져 가고 있다. 무너짐의 일등공신이 장로인가? 아니다. 목회자들의 무사 안일주의가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 사명을 향한 뜨거운 헌신의 소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단순한 일터의 장 정도로 여긴다. 모든 조직은 리더의 문제이다. 리더의 헌신의 수준만큼만 자란다. 리더의 수준이 곧 교회의 수준이고, 교회의 미래가 된다.

다음세대들에게 기독교 신앙 유산을 물려주어야 하는데, 물려줄 사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신앙교육에 대단히 큰 구멍이 생겼다. 마른뼈들처럼 전락해버린 다음세대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대부분 깨어있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기성세대도 심히 걱정스럽다. 절대적인 믿음의 선들이 많이 무너졌다. 어떤 이들은 이 시대 성도들을 결정 장애세대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성도들 중에도 ‘믿음 결정 장애자’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을 멀리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도 않고 그 뜻대로 살겠노라 결정도 내리지 못하다. 교회를 그냥 무의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향방 없는 떠도는 성도가 많아지고 있다.

세상에 의지하던 재물, 권력, 학력은  그 유효기간이 결코 오래가지 못하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참 능력은 유효기간이 영원하다.

성경의 사람들은 절대적인 신관이 분명했다. 여호수아는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라고 말씀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 만을 섬기리라”(수24:14) 신앙관이 아주 분명했다.

신앙관이 분명할 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이다. 신앙관이 병들어 있으면 마른 뼈들은 살아날 소망조차 사라져버릴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빚을 20년 만에 갚았다. 기도원에 가면 고향 사람들에게 떳떳하다.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한 집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또한 기도원에 다녔던 분들이, 새롭게 단장된 기도원을 보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며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찬양과 기도와 사람들의 발길이 사라져버린곳에 이제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사람들이 다닌다. 얼마나 기쁜일인가? 마른뼈와 같던 곳이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성령의 영감을 회복한 장소가 되었다.

 

신앙적인 자기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해서 마른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마른뼈는 죽은 사람이다. 죽은 영혼이다. 마른뼈를 통해서는 어떤 사역도 능력도 새로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른뼈는 죽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바벨론에 포로 장학생으로 간 다니엘은 믿음의 결단을 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단1:8). 나라가 망한 식민지 자녀이다. 현실에 안주하며 눈치보며 비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거부했다. 청년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겠다는 각오로 자기 인생길을 포기하고 믿음을 선택했다.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결단했다. 진리의 말씀을 무기로 삼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과 혼과 골수를 쪼갠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고 살았다. 말씀이 삶의 기준이었다.

말씀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역경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있다. 그들에게는 상황이 비록 마른뼈와 같을 지라도 주님의 때에 반드시 일어난다.

이땅에는 희망을 포기하고 사명을 포기하고 천국을 포기한 죽은 교회도, 죽은 가정도 참으로 많다. 진리를 버리고 살아가는 죽은 목회자도 많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꿈도 잃어버리고 절망가운데 사는 유다인만 마른뼈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도 마른 뼈들이 많다. 마른뼈로는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마른 뼈도 살려내시는 분이다. 모든 것을 다시 재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창조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다시 본국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전능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귀환시켰다. 희망이 잘 안보일 때가 많다. 끝없는 절망일 때도 있다. 그러나 주님이 개입하시면 다시 일어나 소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신다.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내가 무덤을 열고 너희로 나오게 할것이며, 본국으로 돌아갈”(겔37:12)것이라 말씀했다. 무덤은 어떤 곳인가? 죽은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다. 희망이 하나도 없는 절망의 모습이다. 무덤은 컴컴하다. 미래에 대해 어떤 희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 곳을 상징한다. 그곳에서 절망의 자리에서 끄집어내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것이다.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우리를 모든 무덤에서 건져내시는 분이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와인 줄을 알리라......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겔37:13.14절).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무덤에서 끄집어낸다. 왜 절망에 버려두지 않고 끄집어는가? 우리는 고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절망에서 끄집어낸다. 나는 살아있는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를 버리지고 않고 자녀들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신다. 성령을 절망의 장소로 보내서 당신의 백성들을 끄집어 내신다.

금년에도 마른뼈와 같은 사역의 현장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당신의 명예를 걸고 마른뼈들과 같은 삶의 질곡에서 자녀들을 건져내실 것을 믿는다. 그 기적을 금년에도 보고 싶다. 주님의 역사의 현장을 또 보고 싶다. 그 기적의 현장에 나는 주님의 통로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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