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이야기①

 

'감사관점'으로 보는 성경이야기

【편집자 주】 본 지를 통해 감사운동을 전개한 임승훈 목사의 감사칼럼이 새 해를 맞아 새로운 내용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임승훈 목사의 새 감사칼럼 <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이야기>은 감사의 안경으로 볼 수 있는 성경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입니다.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감사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다

나는 배울 곳이 있으면 여기저기 찾아 나선다. 하지만 선한 것이 별로 없다. 해서 엄격하게 고르는 편인데 내가 은혜 받은 곳이 세 곳이다. 하나는 ILP(대표 손종원 목사)요, 둘째는 바나바훈련원(원장 김정호 목사)이고, 셋째는 BeDTS(예수전도단)훈련을 통해서였다. ilp는 개척하며 번아웃(Burn-out) 되는 과정에서 2003년에 만난 영적 신선함이다. 미국서부의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7,8개 교회들을 탐방하며 맞이한 힐링코스였다. 바나바는 내게 잊을 수 없는 현장이다. 2010년 약 7개월간의 코스가운데 첫날에 큰 은혜를 경험했다. ‘여주동행’이란 강좌에서 난 무너졌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가운데 감사했고 회개했고 신유 힐링을 경험했다. 특히 BeDTS는 내게 평신도 자매와 형제들과의 훈련, 즉 목사라는 직분을 내려놓고서 얻은 귀중한 감동자체였다. 이들의 특징은 나의 관점을 확실히 바꾸어주었다. 아니 스스로 감동되어 모든 게 녹아버리게 했다. 나는 그 기관을 사랑한다. 그곳에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간다. 바빠도 달려간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최근 감사운동에 몰입하도록 초대해 준 분 두 분이 있는데, 첫째는 오경아 자매요, 둘째는 임효주 목사이다. 경아 자매는 가평수양관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150기)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하였고 거기서 최일도 목사를 만났다. 소소한 감사, 식사 때마다 앞서서 그는 감사를 일깨워주었다. 그곳이 알토랑 같은 감사관점을 얻게 하였다. 다음으로 임효주 목사는 감사그룹 정기모임을 통해 감사의 방법론과 이론들을 가르쳐주었다. 인천 갈산동모임에서다. 그것이 씨줄과 날줄이 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다양한 감사 책들을 읽어나갔다. ‘평생감사’(전광)를 다시 읽었고, ‘나는 당신을 만나 감사합니다’(손욱)를 접하여 세종의 리더십과 손욱이 말하는 감사이야기를 책상 곁에 두고 즐겨 읽었다. 그리고는 성경을 감사관점으로 읽는 일에 도전하였다.

성경은 블루오션이다. 블루오션의 말씀 앞에서 금은보화를 캐어내자. 성경의 1189장이 머리 속에 기억된다면 어찌될까? 암기력은 한계가 있다. 그림을 기억해내듯이 공감인지(共感認知)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카메라로 사물을 찍듯이 성경의 말씀을 찍어 기억한다면 어찌될까. 그렇게 해서 말씀과 보화를 캐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무엇으로 캐내며, 어떻게 캐내며, 어디서 캐낼 것인가. 가치 있는 보물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보물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감추인 보화를 찾기까지 시간이 걸려도,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도 찾을 수만 있다면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은 구원의 핵심이요, 말씀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것을 발견해 내고자 어찌해야 할까? 기억력을 회복하고, 관점을 회복하여, 성경의 그림(도구)을 그려야 한다.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모두모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이다. 어디서는 구속사적 관점이니, 스토리텔링 기법이니, 내러티브(서사적인) 관점이니... 등, 성경을 보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방법이 존재한다. 헌데 나는 감사관점으로 성경을 읽어내고자 한다. 감사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모습의 성경이야기가 나올지 사뭇 기대가 된다.

아담과 하와는 감사의 실패자

창세기 3장을 보자. 아담과 하와는 실패자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죄 짓는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왜 그들이 죄를 지었을까? 에덴은 모든 것이 풍족하고 보기에 좋고 아무런 죄지을만한 이유는 없다. 불완전한 모습은 없다. 모든 것이 완전했고, 모든 것이 온전하며, 모든 것이 완벽한 하나님의 동산이었다. 그야말로 에덴이라는 동산은 아담과 하와가 삶을 영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하나님이 설계한 낙원이며 거기는 첫 인류의 후손들도 계속해서 살아야 할 땅이었다. 에덴은 그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 절대로, 모든 것이 넉넉했다. 먹을 것도, 잠 잘 곳도, 입고 사랑할 것도, 누리고 살아갈 것도, 그들이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조차도 부족함은 없었고 풍성하였다. 때문에 걱정할 것도 없었다. 장래에 대한 근심, 자녀에 대한 걱정, 교육에 대한 염려, 재정에 대한 불안, 겨울나기 월동 걱정, 연탄 걱정, 땔감 걱정을 비롯하여 매연 걱정, 미세먼지 걱정, 자외선 걱정, 수온 상승과 온난화 걱정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을까? 왜?

하와가 뱀과의 대화가운데 이런 말이 등장한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창3:2) 여기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3절)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가 왜곡해 버린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것을 곡해(曲解)하였다. 누가 만지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선악과의 열매를 감상도 하지 말라 했는가. 모든 것을 허락했다. 하나님께 주신 누림의 자유였다. 첫 인류,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안에서의 자유는 그야말로 무한이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도록 금하였던 것이다. 하와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버린 것이다. 뱀으로 등장하는 사탄이 꼬였다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보다 충실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환경과 자연과 대지를 마음껏 누리며 ‘감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헌데 아담과 하와는 그리하지 못하였다. 의심과 유혹의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곳간’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꼬인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뱀은 하와의 의심의 언어를 타고 일거에 하와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온다. 아주 자연스럽게 무혈입성(無血入城)한 것이다. 타락의 결과는 처참했다. 하와의 마음과 그녀의 가정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멋쟁이 신랑 아담도 무참히 무너뜨렸다. 우리가 사탄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절이다. ‘아니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사탄은 힘이 센 존재가 아니다. 힘 센 것처럼 보일뿐이다.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무섭고 징그럽게 보일뿐이다. 하지만 ‘노’라고 거절하면 사탄은 그 즉시 꼬리를 내리고 도망쳐버린다. 하와는 거절하지 못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가 그런 거절하지 못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을까? 죄의 뿌리(의심, 회의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사탄의 말대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진다 했는데, 우리 눈이 밝아지는 게 뭐 그리 중요할까. 우리의 시력으로 세상을 보고 누리고 여행하고 즐기고 행복을 누리는 데 아무런 걸림이 없다. 우리의 눈은 아무리 겉보기에 작아도 문제가 없다. 심지어 실눈을 떠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헌데 뱀의 말대로 얼마나 눈이 더 밝아져야 속이 시원했을까. 하와는 눈이 어두웠는가? 시력이 나빠 정말로 눈이 밝아지기를 원했던 걸까? 그런 것은 아니다. 뱀이 유혹의 눈빛으로 혀를 낼름거릴 때 그대로 용납(容納, 容認)하고 만 것이다. 뱀이 들어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뱀은 앞을 막으면 비켜가는 존재다. 하지만 허락하면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 똬리를 튼다. 하와가 그의 말을 허락했으므로 ‘눈이 밝아진다는 소리’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소리에, ‘선악을 알게 된다.’는 소리에 그만 항복해버린 것이다. 아담은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동안 곁에 있으면서 보고만 있었다.

아담은 하와의 타락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무능한 남자로만 보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존재이유를 물을 때에 무서워서 숨었다고 고백한다. 반쪽 고백이다. 내가 벗었기에 두려워졌다는 게 숨은 이유라는 것이다. 정직하지 못한 고백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고 물으신다. 아담의 고백은 핑계뿐이었다.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짝지어 준 여자, 그녀가 열매를 내게 주었기에 먹었다고 대답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며칠 전 그녀에 대한 감탄은 없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도 없다. 감사에 실패한 것이다. 분명코 아담과 하와는 감사의 실패자였다.

감사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니 다르게 보인다. 감사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188곳에 이르는데, 첫째, 감사는 제사와 깊게 관련하여 분명히 나타난다(레위기). 둘째, 하나님(아버지, 여호와, 주)이란 명칭과 관련하여 나타난다(역대상하). 셋째, 감사는 여호와께 올릴 찬양과 함께 드러난다(시편). 이 세 가지 관점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이다. 제사 드리는 자의 자세가 바로 감사 관점이어야 함을 나타낸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 50:23) 구약성서에 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이 있지만 감사의 제사가 제일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같은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보건데,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조성하신 놀랍도록 신비하고 아름답고 수려한 곳임에 틀림없다. 의심과 유혹이 판을 치는 수치스러운 곳이 절대 아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감탄할만한 거룩한 땅이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전적으로 그들이 감사하지 못한 결과였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타락할 이유가 없다. 감사하는 사람은 죄에 빠질 이유가 없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탄과 벗할 이유가 없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탄의 꼬임을 무시해버릴 능력이 있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탄의 말을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다. 감사에 성공하는 사람은 사탄의 언어를 밟고 넘어선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사람이다. 감사에 성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고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감사의 힘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갈 능력과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은 감사의 사람이다. 다니엘의 특징은 하나님께 길을 묻은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것이다.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문제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질문하였다. 그는 특별한 지혜자이지만 결코 자만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 간곡히 지혜를 구하였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범사에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정한 기도시간을 두고 있었다. 늘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는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감사의 사람이었다. 평안할 때에든지 위급할 때든지, 지혜가 필요할 때든지, 능력이 필요할 때에도 그는 늘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고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사람이었다.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과 의논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 감사하였다.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단 2:23).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 윗방에 올라가 ...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다니엘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된다. 에덴동산은 다니엘이 살던 이방 땅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감사에 전념하고 성공하던 다니엘의 모습과 그 인생의 결과를 생각하면 감사관점, 감사생활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는 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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