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14)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아침에 일어나 먼 산을 보니, 산이 뿌옇다. 백 년 전, 조선의 민초들이 독립 만세를 외쳤지만, 그 외침은 여전히 구호에 불과하다. 북-미 합의에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우리 정부나 그 결과를 기대하면서 지켜보던 국민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충격이 크다. 우리의 운명이 제국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을 보면 물리적으로 독립은 했지만, 아직도 독립이 완전하게 실현된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우리나 독립에 영향을 미친 1943년의 카이로 회담이나 1945년 포츠담 회담처럼 왜 남의 나라에서 열리는 저들의 회담에 마음 졸이면서 민감하게 지켜보아야 하는가? 아직도 이들이 우리의 앞날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을 맞는 3.1운동은 민초(民草)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지금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이라는 점을 선언한다.”(3·1 독립선언서) 3월 1일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수개월이나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자와 학생, 기생 등 평범한 조선의 백성에게 이념이나 귀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이들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민초들의 정신적인 독립 없이 민족의 독립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한국역사에서 3·1운동은 여러 보석이 담긴 원석과도 같다. 3.1운동은 사회 각계·각층이 두루 참가하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쳤다. 이를 통해 조선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데 의의가 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 사회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사회적 붕괴와 내부적 갈등이 내재해 있었다. ‘척왜양창의’를 내세웠던 동학 역시 ‘친일’을 시도하는 등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마뱀이 꼬리 자르듯이 자절(自切)과 재생(再生)의 과정을 통해 변신(變身)을 거듭하며 살아남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상실한 채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해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은 일진회의 노골적인 친일 활동과 한일합방성명 발표는 친일하던 사람들조차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식인층이나 사회 지도세력들은 자신의 조상과 문화를, 천도교는 자신의 전신(前身)인 동학을 회고(回顧)하며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적(敵)’에 대한 규정과 ‘아(我)’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이뤄지며 지식인층에서 제시한 ‘아’는 바로 민족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식인층에 의해 제시된 민족 개념은 정치 세력들이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자신을 정의하는 정체성이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자 행동의 의미를 규정하는 하나의 담론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3·1운동은 근대 한국인을 낳았고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기획했으며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제국주의가 판치던 시대에 평범한 ‘민의 힘’을 발견하고 민의 자각과 결집으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가능성을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의 독립은 민족을 구성하는 민초들의 독립에서 출발해야 한다. 민족은 민초집합이기 때문이다.

 

3.1혁명인가?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작금에 3.1운동을 혁명으로 미화시키려는 시도들이 드러나고 있다. 3.1운동은 거대담론적으로 의의가 크다 하더라도 그 담론에 도취하여서는 안 된다. 허망한 사람은 거대담론에 집착하여 떠든다. 개인이 자신의 두 발로 서서, 거울로 본 자신의 모습에 부끄럽지 않을 때, 그가 속한 공동체가 떳떳하다. 독립과 자유는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다. 거대담론을 주장하는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의 담론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자화자찬에 중독되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 알 수 없는 말을 대중 앞에서 내뱉는 정치인들의 허상을 본다. 미디어는 그 허망한 말들을 분석한다. 혹은 정제되지 않는 말로 떠드는 자들의 말들로 가득 찬 바보상자다. 허망한 자의 눈은 실체가 없는 대중에 경도되어있어, 정작 중요한 자신 주위 사람들을 섬세하게 돌보는 여유와 겸손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대한민국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이 자유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자유가 아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누군가가 감옥에 투옥되어야 했고, 말할 수 없는 성고문과 같은 치욕을 당해야 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은 시인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자유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할 때 방종하게 된다. 방종이란 무엇인가? 목줄 풀린 강아지가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 행태가 방종이다. 이런 방종자들은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현재의 자신이 되었음에도, 부모의 아낌없는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덜떨어진 사람들과 같다. 인간은 햇빛이나 달빛이 없으면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지만, 그 존재의 가치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지만 이제 정중하게 뒤를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사소하게 여기는 중요한 것들을 하찮게 여길 때 재앙이 내린다. 지금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는 미세먼지를 보면서 맑은 공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뿌연 하늘을 이고 사는 원인은 맑은 공기를 하찮게 본 결과이다. 자고로 미세먼지 재앙을 예고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늘 허락된 광활한 맑은 가을 하늘은 우리의 전유물이었다. 사소하게 느끼는 중요한 것을 하찮게 여긴 죄이다. 현재로서 미세먼지 재앙에 대해 뚜렷한 답이 없다. 여기저기에서 탈(脫)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다.

 

아르테스 리버랄리스’ rates liberalis

아이폰으로 유명한 애플의 전 CEO인 스티브 잡스가 자사 이벤트에서 'liberal arts'(기초교양)와 'technology'(기술)가 만나는 곳에 자신들의 제품이 위치한다고 발표를 한 후 국내에서 'liberal arts'(기초교양)의 중요성이 많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Liberal arts의 가장 기본이 되는 3가지 요소가 문법(grammar), 논리(logic), 수사(rhetoric)이다. 이 3가지를 합쳐서 trivium(이라고 하는데. 이 트리비움은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를 위한 중요한 도구이다. 트리비움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민교육의 틀이며, 8세기 말 프랑크 왕국 카를대제(샤를마뉴)의 문화장려교육을 통해, 오늘날 서양 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서양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흔하지만 중요한 가치”를 고취하는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라틴어로 ‘트리비움’ trivium이라고 불렀다. ‘트리비움’이란 축자적으로는 세 갈래(tri) 길(vium)이 만나는 ‘공공 公共의 장소’ 혹은 ‘광장 廣場’을 의미했다. ‘하찮은; 사소 些少한’이란 의미를 지닌 ‘트리비얼’trivial은 라틴어 ‘트리비움’ trivium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는 공공장소인 시장, 즉 ‘아고라’가 있었고, 고대 로마에는 다양한 공공의 의견을 교환하고 대화하는 ‘포럼’ forum이 있었다.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모여,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정제된 생각을 개진하고, 최선의 생각에 승복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교육과정으로 만들어, ‘아르테스 리버랄리스’ rates liberalis라고 불렀다. ‘리버랄리스’는 ‘자유로운’이란 의미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선별해 알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아르테스’는 ‘최선; 예술; 기술’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르스’ars의 복수형이다. ‘아르스’는 하찮아 보이지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가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그 솜씨는 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맛처럼,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경험이 만들어준 최적화된 간결이다.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교육이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 즉, ‘교양 교육’이다. 이 교양 교육의 가장 기본이 ‘트리비움’이다.

 

진정한 독립은 무엇인가?

자유는 사소하게 여기는 중요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지식이다. 너무 흔해서 하찮게 보이지만, 공기처럼, 어머니의 사랑처럼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덕목이다. 자유인은 스스로 자연스럽고 의연한 사람이다. ‘자유’의 소극적인 의미는 탈출이다. 마치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하듯이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굴레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극적인 자유는 자유가 지닌 그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는 탈출이 아니라 열망이며 추구다. 자유는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자신의 개성을 최선으로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한 공동체, 즉 가정이나 교회, 더 나가아서 국가나 민족공동체를 다양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역동적인 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탈출기는 진정한 독립과 자유에 관한 담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탈출한 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 탈출기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모세와 맺은 언약, 십계명 사건은 완전한 탈출의 과정이며 진보이다. 이들의 열망이며 가치추구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정신적인 독립, 정체성 확립이 필요했다. 노예에게 십계명은 불필요하다. 노예에게는 단지 빵과 편안한 잠자리, 일터만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탈출이 소극적인 자유를 얻은 사건이라면 것이 십계명 언약은 뼛속까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탈출하는 제2의 출애굽이다. 이는 로마인들에게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 교육과정이다. 이스라엘이 자유인이 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이집트인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굴레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세는 사소하게 여기는 중요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무리, 독립과 자유를 자각하지 못한 무리가 있음에 놀랐다. 이 사소하게 여기는 중요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큰 무리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민 16:2)” 당연히 이들 스스로 자신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을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반항하는 고개를 쳐들어 올린다.

 

우리는 독립국인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에 어떤 외부의 물리적인 힘으로 우리는 가장 물리적으로 탈출했다. 우리 스스로 힘으로 탈출한 것이 아니다. 기대하지 않는 갑작스러운 독립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얼마지 않아 우리는 6.25를 겪어야 했다. 그것도 우리가 선택한 사건이 아니었다. 먼 시간을 지나보니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작용한 결과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도 36년 동안 우리 민족을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억압했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이들은 우리의 노동력만 착취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려 했고, 뼛속까지 황국신민(皇國臣民)이기를 원했고, 그렇게 교육했기 때문이다.

지금 누리는 독립과 자유를 자신의 전유물처럼 느끼는 무리가 있음에 놀란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민족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투쟁을 벌이다 분사(憤死·을사늑약 이후 원통함에 자결)나 전사, 옥사, 병사한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사소하게 여기는 중요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무리라 할 수 있다. 고개를 쳐들어 올리고 용기 있는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생존과 안보를 위해서 필요할 때는 원수 간에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이득이 될 때는 악마하고도 악수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들의 논리는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끈다. 일본과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현재의 일본은 남의 나라 땅을 강탈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런 나라가 될 수도 없다. 시대가 바뀌었다. 가치관이 같은 사람이 서로 싸우는 일이 드물다.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끼리는 전쟁의 가능성이 매우 작다. 북한은 극악의 공산집단이 지배하는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적(敵)이다. 일본은 우호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잊지 않는 것이 현명한 국가 생존전략이라고 말한다. 모세 앞에 고개를 쳐든 250명의 빵의 논리와 동일함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지각이 있는 자는 이러한 거대담론에 도취하지 않는다. 깨어있는 사람은, 지금-여기에 일어나는 하찮은 일에 충성한다. 그들은 대중의 환호를 바란 적이 없다. 그는 그 환호가 거품이며 미움과 질타로 금방 변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중요한 일에 집중한다. 깊은 묵상과 숙고를 통해 찾은 자신의 중요한 민족정신, 순국선열들의 자유정신, 이러한 담론만이 중요하다. 그런 담론만이 진정성을 담보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소한 말이나 행동을 장악하여, 정직, 진실, 배려를 조용히 실천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독립적인 민족인가? 물리적인 독립, 3만 불에 이르는 경제력, 세계 10위 안에 드는 군사력이 독립을 담보하는가? 이런 것에 의존한 제국은 모두 필멸했다. 그러면 무엇이 독립적인 인간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가? 무엇이 결국 독립국가를 만드는가? 그것은 지정학적 위치라는 논리 앞에 묻히는 사대주의 사상인가? 누군가에 예속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사대주의 말이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인가? 무엇이 독립적인 인간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결국 독립국가를 만드는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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