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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사람을 사랑하는 봉사자-본헤럴드청교도인의 실천 덕목
  • 최원영목사
  • 승인 2019.04.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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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낭화, 꽃말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변화산 기도원에 심은 꽃이 화사합니다, 밝고 화사하니 마음도 한껏 밝아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이란 말에 집착하면서 혼동을 겪고 있다. 사랑이란 말이 주는 의미를 바로 인식할 때 우리의 인생에 변화의 물결이 찾아온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 사랑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인가? 예수님은 첫째는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는 너희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셨다. 세 번째 계명은 주지 않았다. 네 자신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든지·····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기”(엡5:29)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았으면 좋은지 알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세 번째 계명을 주시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은 항상 하나님과 이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 결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삭개오가 세리장으로서 이웃의 재산을 착취하였다. 그가 예수님을 통해서 회개하고 자신의 착취한 것을 이웃을 위해 나누어주었다. 사람을 착취했던 삭개오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 착취한 것을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하나님 사랑은 항상 착취가 아니라 나눔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사랑의 결말은 항상 착취로 이어진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서울신학대학 신학박사, (주)새일과 새길 부이사장, 본국제신학교학장, 등. 저서로는 주기도문연구, 십계명, 팔복,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충성된일꾼되어가기....

매년 사순절에는 성경읽기와 한 끼 금식과 부활절 특별헌금을 드린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 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초는 말씀이다. 말씀을 통해 흐트러졌던 우리의 병든 가치를 회복하고,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한 끼 금식하고, 그 헌금을 이웃을 위해 선교비로 보낸다. 왜 매년 동일한 프로그램을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랑은 항상 이웃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사람이다. 이땅에는 우리의 한끼 금식이 필요한 분들이 많다. 우리에게는 영혼과 몸의 다이어트의 시간이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다. 죽느냐 사느냐는 경계선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스스로 일어나 걸어갈 수 없는 분들이다. 누군가 그들에게 사랑의 사다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사다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밟고 건너가는 것이다. 밟고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한 끼 금식 헌금이 지구촌에 있는 분들에게 생명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이다.

성도들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부활절 헌금을 드린다. 그 헌금을 교회에 필요한 부분에 쓸 수도 있다. 항상 물질은 남는 경우보다 쓸 곳이 더 많다. 늘 부족하다. 이것이 인간세계의 거룩한 욕망의 먹이 사슬이다. 그러나 금년에는 성도들의 피와 땀과 수고와 사랑의 헌금을 몽골 후레대학교 학생 장학금으로 일부를 보냈다. 후레대학교는 건국대학교 김영권 교수가 설립한 이공계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이다. 1년 학비가 100만원이다. 그런데 학비가 없어서 중도에 많은 학생들이 휴학을 한다고 한다. 너무도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성도들의 정성을 보냈다. 항상 사랑은 이웃을 향해 뻗어가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사람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십자가의 정신이고,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위대한 건물을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위대한 조직을 세우려고 온 것도 아니다. 구약의 무너진 바벨탑을 세우려고 오신 것도 아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십자가에 던졌다. 사람을 위해 죽음의 길을 간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이다. 사람을 잃어버린다면 위대한 업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성경의 정신이며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야할 근본적인 목적이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청교도인들은 성경의 정신을 삶속에 잘 적용하였다. 청교도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3가지 실천 덕목이 있다. 첫째는 ‘정직’ 이다. 정직이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정직한 삶을 포기한다는 결단이다. 청교도인들은 정직을 코람데오로 인식했다. ‘코람데오’란 ‘하나님 면전앞에서’ 라는 의미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청교인들이 세운 미국에서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다. 컨닝, 논문표절, 부정회계, 거짓말 등을 경멸하고 거짓말을 할 경우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실’이다. 근면함이다. 청교도인들은 성실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적 측면’ 의로 설명하였다. 쉽게 말한다면,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일’이라고 해석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직업에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맡겨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몽골후레대학교 기독학생 목요 예배에 참석했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나서 저녁시간에 드리는 예배이다. 이것은 강제적인 모임 아니라 자발적인 모임이다. 약 50명 정도의 학생들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예배에 70세가 넘은 미국인 교수가 앉아 있었다. 미국인 교수는 정년 퇴임 하신 후 평양과기대에서 전공을 가르치다가 쫓겨나서, 최근에 몽골 후레대학교에서 자비량전문인선교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몽골말로 진행되는 예배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은 2시간 정도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누가 옆에서 통역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학생들의 예배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석하여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분에게서 청교도 정신을 보았다. 몸속에 깊이 그리스도의 정신이 배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그분의 모습에서 학생들은 먼 훗날 성실함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말보다는 무언의 모습에 담겨진 거룩함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지혜를 얻는 것이다.

셋째는 '절제'이다. 청교도인들은 절제를 ‘소극적 절제’와 ‘적극적 절제’로 구분하였다. 소극적 절제란 '절약하는 삶'이다. '아껴 쓰는 것'이다. 청교도인들은 절약 정신이 몸에 묻어 있다. 절대로 낭비하는 법이 없다. ‘적극적 절제’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마음껏 손을 펴는 것이다. 청교도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절약하고,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과 달란트를 헌신의 도구로 내려놓고 사는 것이다. 미국 사회의 대학이나 공공 도서관, 요양원 등 많은 것들이 개인의 기부로 세워지고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도 미국 기독인들의 도움으로 교회와 공공시설이나 대학들이 세워졌다. 그들의 절제된 삶의 열매로 성장한 것이다. 기독인으로서 자기만을 위해 물질을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성경의 정신을 모르고 사는 껍데기 신앙인에 불과하다.

한 주 사이에 사택 옆에 있는 단풍나무에 잎사귀가 많이 자랐네요.

십자가의 정신은 내려놓는 것이다. 일부가 아니다. 전부이다. 생계수단이었던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주님이 주신 재능으로 가족의 생계와 인생의 명예와 기쁨을 얻었다. 그 재능을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섬김의 길이다.

사랑의 방향은 항상 이웃으로 향해야 한다. 사랑의 대상은 물건이 아니다. 건물도 아니다. 사랑의 대상은 사람이다. 사람을 사랑하면 인생의 길이 보인다. 사람을 사랑하면 사명의 길로 걸어간다. 그 길이 가장 인간다움의 표현이며 고상한 아름다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선교사님들이 헌신과 자비량전문인선교사들의 고귀한 내려놓음 앞에 성경의 정신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말이 아닌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셨다, 말은 화려하다. 대장군이 타기에 명예와 권세의 표시이다. 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나귀는 초라하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타고 입성하셨다. 사명의 길은 화려함이 아니라 초라함이다. 그 초라함속에 하나님 나라는 세워진다. 선교사님들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 이야기의 중심은 항상 사람을 세워가는 거룩함이다. 말을 타고 화려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인생의 뒤안길에는 마음의 빈곤만이 그의 노년을 슬프게 채워갈 것이다.

 

 

최원영목사  jho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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