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쌓은 바벨탑은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직분은 귀하고 귀한 것

직분은 참으로 귀하다.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완벽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는 누구도 완벽하게 훈련된 사람들은 없다. 모두다 불완전하고 문제많고 흠들이 많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를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안수집사로 서리집사로 직분자로 세우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혜이다. 그래서 직분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다. 완전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일생동안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오늘날 직분을 헌신짝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영광스럽고 고귀한 하늘의 신분을 망령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직분은 귀하고 귀한 것이다. 직분에 걸맞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헌신과 순종과 사명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인생의 집이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뿐만아니라 주님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사모했던 의의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삼아주실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참으로 귀하다. 일꾼들은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제자의 사명이다. 또한 교회 직분이 귀한 것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준을 지킬 때 유지될 수 있다. 기본을 귀하게 여기고 무시하지 않는 것이 역사적 전통의 본질을 지키는 길이다.

◐일꾼을 세우는 목적: 사역의 역할 분담

교회가 일꾼을 세우는 목적이 있다.  사역의 역할 분담 때문이다. 교회는 담임목사 한 사람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없다. 담임목사 한 사람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오만이다. 건강한 교회는 혼자가 아니라 많은 분들이 함께 일할 때 교회는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가르침에 은사가 있는 분들은 가르치고, 찬양에 기쁨과 은혜가 있는 분들은 찬양으로 봉사하고, 몸으로 섬기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식당에서 봉사하고, 물질로 섬기는 것을 즐겨하는 분들은 물질로 봉사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기도로 교회와 민족을 섬기면 된다. 행정에 특별한 은사가 있는 분들은 교회 행정을 책임져주고, 컴퓨터나 음향, 악기에 소질이 있는 분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서 봉사하면 된다. 운동을 좋아하는 분들은 함께 운동하며 성도들을 즐겁게 교제의 장으로 인도하면 된다. 교회가 일꾼을 세우는 목적은 사역의 효율적인 역할 분담을 위해서이다.

교회에 일꾼이 많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그 일꾼들에게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긴다. 성도들이 나도 권사님이 되고, 나도 안수집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고, 목사님이 되고, 선교사가 되겠다는 거룩한 꿈을 꾸는 것은 축복이다. 교회가 일꾼을 세우는 것은 너무도 귀한 일이고 축복이다. 세워지는 일꾼들을 축복하고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로 협력하고 도와주워야 한다.

초대교회가 7집사님을 뽑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6:4).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무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을 뽑았다. 집사님은 오늘날로 말하면 장로님을 말하는 것이다. 7명의 장로님을 뽑은 것이다. 사역의 역할 분담을 위해서이다. 제자들은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고, 봉사하는 일은 집사님들이 전무했다. 사역의 효율성을 위해서이다.

◐초대교회 일꾼 선택기준: 세상적 기준 버림

초대교회가 일곱을 선택할 때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살펴보면 세상적인 기준은 하나도 없다. 성령충만, 지혜충만, 믿음충만, 칭찬 받는 사람을 선택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 충만이다. 지정의에 예수로 충만하면 된다. 충만이라는 말은 채운다는 말이다.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성령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내안에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으면,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성령님이 내안에 충만하게 채워져 있으면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기름부음이 있다.

지혜충만은 무엇인가? 어리석음의 반대말이다. 지혜란 국어사전을 보면,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이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명쾌한 판단 능력을 지혜라고 한다. 서양에서 지혜란 신의 영역이다. 인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축복으로 보았다. 일꾼은 지혜가 충만해야 한다. 일꾼이 어리석으면 공동체가 참으로 힘이 든다. 지혜란 옳은 판단능력이다..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다.

지혜가 충만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충만해야 한다. 말씀을 깊이 되새김하면, 사람이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면 지혜가 충만해진다. 말씀을 사랑해라, 그러면 지혜가 충만해진다.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암송하면 어리석은 사람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변한다.

칭찬듣는 사람이다. 리더로 세워지는 조건중에 귀한 항목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평판이 좋아야 한다. 평판이 나쁘면 교회에 짐이 되고, 전도와 선교에 큰 걸림돌이 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이 있으면 일어난다. 일꾼은 믿음있는 말을 하고 믿음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중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중직자의 언어가 불신으로 병들면 교회가 큰 시험에 빠진다. 교회가 어수선해진다. 중직자들은 환경에 지배를 받지 말고 오직 믿음 있는 말만 해야 한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일꾼의 자세는 '충성'

일꾼의 자세는 충성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일꾼은 누구의 일꾼인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일꾼이란 배에서 노를 젖는 노예를 말한다. 한마디로 종이다. 일꾼은 누구의 종인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다. 바울은 일생동안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소개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바울사도는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는 것이다. 일꾼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이다. ‘맡은 자’는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이다. 오이코스(집)와 노모스(경영하다, 관리하다) 두 단어가 합성된 말이다. 오이코노모스의 의미는 ‘집을 관리하는 사람’, 즉 ‘집사’, ‘청지기’라는 뜻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집과 재산을 관리하며 일꾼들을 관리하며 집 전체를 보살피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인이 맡겨준 것이다.

신앙이 성숙하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이다. 재물도, 건강도, 시간도, 교회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어느 때라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다 없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참된 청지기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하는 성도가 진짜이다. 청지기는 교만하지 않는다. 청지기는 주인이 원하는 일만 묵묵히 감당한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 일평생 구할 것은 충성이다. 충성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충성이라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로도 번역한다. 충성한다는 것은 곧 자기가 맡은 일에 항상 신실한 자세와 마음으로 임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충성은 곧 신실함이다.

나는 충성된 일꾼이란 말을 좋아한다. 일꾼은 충성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일꾼다운 모습이다. 한 차례의 충성은 쉽지만 일생동안 충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 충성했던 믿음의 사람이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일생동안 수고와 희생과 환란과 어려움을 자처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의 삶을 전했다. 그 고백이 얼마나 가슴 설레게하고 떨리게하는지 모른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는 일꾼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상급을 주신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니라”(마25:21).

충성된 종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신다. 하나님이 더 크고 놀라운 것들을 맡겨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한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주셨다. 사실 상급을 안주셔도 괜찮다. 일꾼으로서 충성했다면 이미 우리는 엄청난 기쁨을 선물받았다. 주님을 위해 수고의 땀방울과 눈물을 흘렸다면 이미 큰 부요의 기쁨을 누렸다. 그 이상 무엇인가 부어주신다면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보너스 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 성장

일꾼을 세우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위해서이다. 사도들 앞에 세우고,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섬김의 리더로 세웠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

교회가 일꾼을 세우는 것은 축복이다. 그만큼 일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하나님 나라가 그 만큼 더 성장하게 되었다는 외적인 표시이다.

항간에 직분과 돈이 연결되어 모양새가 안 좋은 선례들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수치이다. 존귀한 하늘의 직분을 맘몬과 교환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추태이다. 돈과 직분을 연결한 무리수는 항상 교회의 분열과 갈등의 씨앗으로 자라게 된다. 그 피해는 교회 공동체가 겪어야하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쌓은 바벨탑은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일꾼을 세우는 것은 교회의 축복이다. 일꾼을 세우되 세상적인 경영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논리로 세워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바벨탑을 쌓기 위해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뜻을 세우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전부를 교회에 던진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처럼 여겼던 교회가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구겨지고 무너지고 부서지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목회속에 너무도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성공지향적인 경영방식이 뿌리박혀있기 때문이다. 우리 목회에서 주님의 방식이 아닌, 성경과 거리가 먼 누룩을 걷어내야 한다.

일꾼을 세우는 임직은 참으로 귀하다. 귀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데 있어서 세상적인 방식을 거둬내고 성경적인 기준을 따르면 좋겠다. 그리고 일꾼을 세우는 일에 물질과 연관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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