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믿음은 곧 선택이다. 복음을 제시한 후, 질문을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믿으시겠습니까?’ 상대방은 예와 아니오를 결정해야 한다. 심장에서 입까지 한 뼘 정도이다. 주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과정에서 마지막 요구사항은 자신의 고백이다. 마음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했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비전을 날마다 선포하고, 찬양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등장한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방문했다. 두 자매의 선택에 차이점이 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서 천국복음을 가르쳤다.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눅10:39)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 식사를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식사 준비로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내 동생보고 언니 식사 준비를 도우라고 요청했다.

왜,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했을까?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했을까? 아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여유를 놓치면 중요한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우선순위가 있다. 먼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일을 먼저 선택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분주하다. 일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 늘 바쁘다. 마음이 분주하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일로 인해 마음이 분주하면 가장 소중한 것과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신앙 생활은 먼저 주님과 함께 하는 최고의 시간을 드려야 한다. 마음이 차분하면 실수하지 않고 많은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다.

매일이라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들은 삶의 스케줄을 점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왜, 나는 늘 마음이 분주한가? 왜 그런가? 정말로 일이 많아 분주한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여유가 없고, 염려가 있고, 불안해서 늘 분주한 것인가? 그러면 나는 어떻게 극복할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혹시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하는 일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는 영적 깨달음이 요청된다.

마르다는 혼자하는 일로 인해서 불평하고 있다. 혼자하다 보면 불평이 나온다. 왜 나만 이런 힘든 일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신앙생활을 할 때 최고의 적은 불평이다. 불평의 싹이 자라면 사망이 내 인생을 덮어버리게 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들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면 원망과 불평이다. 원망과 불평은 대상자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나는 문제가 없고, 완벽한데, 상대편이 문제라고 느낀다. 원망과 불평의 종착점은 자신의 삶과 이웃을 파괴한다. 공동체의 기쁨과 감사를 파괴하는 원인이다.

주님의 처방전은 아주 간단하다. 천국 복음이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항상 명확하고 분명하고 간단 명료하다.

마르다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은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하라고 주문한다. 많이 하면서 불평하는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말한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언니를 도와 식사 준비를 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에게 아주 후한 점수를 주셨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삶은 선택이다. 신앙도 선택이다.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모든 사역은 경중이 없다. 다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그러면 자신의 영혼도 살고 공동체도 산다.

사역이란, 사명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선택한 삶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이다.

역사의 혼란과 변동기에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지내고 있었다. 빈들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준비하며 기다렸다. 주님의 때에 빈들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눅1:2)이 임했다. 누가복음 3장 1절에는 황제 디베료, 유대 총독 빌라도, 분봉왕들이 이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이름이 등장한다. 정치 지도자들,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다. 빈들에서 절제된 삶을 선택하고 주님의 사명을 기다리던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임하는 것인가?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선택할 때 그에게 임한다. 그리고 그 기쁨과 고귀한 삶은 빼앗기지 않는다.

모세는 40년간 애굽에서 공주의 아들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명예를 조국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버렸다. 장성한 모세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믿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명예를 거절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동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더 좋아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세상 왕 바로를 무서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겼다.

모세의 개인적 선택은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세를 40년간 광야에서 더 훈련시킨 후에 이스라엘 지도자로 세웠다. 고귀한 헌신을 선택한 삶은 빼앗기지 않는다. 영원히 역사속에 회자되어 진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첫번째 인물은 모세이다. 많은 세월이 지나갔지만 믿음의 역사에서 모세는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고귀한 헌신의 길을 선택한 삶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다.

본헤럴드에 칼럼을 쓰고 계신 한명철 목사님의 글 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 글 귀가 있다.

“나의 골방은 죽음의 자리다. 이 성별된 공간은 진액을 짜내는 기도를 하다 혼절해도 지켜야 할 나의 얍복 나루터요 감람산이다.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기꺼이 죽으리라!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그 얼마였던가! 지금껏 살려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분명 있을 것이다. 죽을 자리를 찾아야 한다면 말씀을 암송, 묵상하는 자리, 울부짖는 기도의 골방만큼 걸출한 명당도 없을 것이다. 좌청룡우백호가 아니라 좌말씀우기도가 명당이다. 생사의 기로에서 삶의 의지를 자주 불태웠던 나로서 생존이 얼마나 크나큰 은총인지 너무도 잘 안다. 그럼에도 은혜 안에서 죽음에의 의지를 가다듬고 생명 포기를 동경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에 그만한 가치를 두고 싶은 내 염원의 발로(發露)다.”

한 목사님은 골방기도와 말씀을 삶의 최우선으로 선택하고 주님과 씨름하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다. 이것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 그 기쁨과 감사가 그의 영혼속에 놀라운 생기를 날마가 강렬하게 세워갈 것이다.

최원영목사, 본헤럴드대표,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선택을 할 때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주님이 좋아하실까? 안 좋아하실까? 내가 무엇을 선택할 때 주님이 더 좋아하실까? 선택할 때 몇 가지 기준점을 가지고 있으면 좋다.

(1)나의 이익보다 하나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선택하라.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규칙이 더 귀하고, 공동체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가 더 소중하다. 목회를 하면서 나는 교회와는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과는 계산한다. 교회는 헌신의 대상이요 섬김의 대상이요 나의 전부를 쏟아붓는 사랑의 대상이다. 교회와 계산하지 않기에 늘 행복하다.

(2)성공보다는 하나님과 동행을 선택하라. 세상적인 성공도 중요하다. 성공해서 주님의 이름을 더 높이 들어내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나의 성공 지향이 주님을 잃어가면서 까지 하는 성공은 진짜 성공이 아니다. 진짜 성공은 에녹처럼 주님과 일생동안 동행하는 것이다.

진짜 성공은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에 천국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인 것이다. 천국은 죽음 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생명이 있을 때에 결정되는 것이다.

(3)대접받는 것보다 섬김을 선택하라. 제자들은 서로 싸웠다.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을 찾지 하려고 몸부림쳤다. 이것이 제자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진짜로 큰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섬기는 자라고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려고 오셨다고 못 박았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받쳐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섬김은 생명을 드린 섬김이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들은 대접 받는 길을 선택했다. 대접받는 길을 좋아한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는 거리가 멀다.

(4)부정보다는 성결한 삶을 선택하라. 로마서 1장 후반을 보면, 부정한 인간의 모습의 실체가 열거되어 있다.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가? 주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성결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거듭난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5)이 땅에 재물을 쌓는 것보다 하늘 나라에 재물을 쌓는 것을 선택하라. 모든 사람들의 대화의 중심 주제가 돈이다. 성도들이 모여도 돈, 목사들이 모여도 돈, 세상 사람들이 모여도 돈 이야기 뿐이다.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사고가 너무 지배적이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고,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 먹이 사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도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돈으로 자신의 영혼까지도 다 살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의 최고의 꿈이 빌딩주이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어둠을 말해주는 가치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으로 모든 것을 다 살 수 없다.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돈으로 영혼을 사지 못한다. 돈으로 물건을 채울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사지 못한다. 돈으로 육신을 살 수 있지만 사랑은 사지 못한다.

어리석은 부자에게 예수님이 한 마디 하셨다. 많은 돈을 번 부자가 자신의 영혼을 향해 말한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지 하리라” 하나님이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3-21).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주셨다면, 이 땅에서 더 누릴 것으로만 채우지 말고, 주님의 선한 일에 기부하고, 또한 사회의 어둡고 힘든 곳에 더 많이 헌금하라.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복이다.

하늘에 많은 재물을 쌓다보면, 거룩한 명예가 주어진다. 채움보다는 비움을 선택하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이제는 비움으로 세상을 즐겁게 하라.

좋은 것을 선택하라. 그러면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 이것이 진리이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 너무도 귀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적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 너무도 소중하다. 말씀의 성전을 세워가는 것은 자신을 보석으로 치장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작업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향유옥합을 깨뜨려 헌신했던 마리아의 행위는 교회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삶의 지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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