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삶을 약동시키는 영웅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Die Hard>가 5편까지 나왔다. “다이 하드”란 표현에는 역사적 유래가 있다. 1811년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3개 연합군이 스페인 서북부의 알부에라(Albuhera)에서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렀다. 영국의 57연대가 적의 집중포화로 초토화되고 있을 때 중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던 연대장 잉글리스 경이 부하들을 향해 “버텨라! 최후까지 저항하라!”(Die Hard!) 고 외쳤다. 영웅적이고 무모할 정도의 희생으로 인해 57연대는 영예로운 부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테르모필레의 300용사도 페르시아의 백만 대군에 맞서 버텼다. 버티는 자가 영웅이다.

현대에서 고대적 의미에서의 영웅은 탄생되지 않고 만들어진다. 옛날에는 영웅이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었지만 지금의 영웅은 스스로 세워간다. ‘영웅’ 하면 서양에서는 플루타크의 <영웅전>과 신화에서의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동양에서는 <삼국지>와 <초한지>가 있다. 신화적 허구와 소설적 재미의 차이와는 별도로 동서양의 영웅 이야기에는 삶을 약동시키는 묘미가 있다. 오늘의 영웅은 다분히 대중적이다. 전쟁이나 정치 같은 스펙터클은 없어도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스포츠 영웅과 드라마 속의 영웅들은 민족감정이 섞인 감동과 일상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한국축구가 일본을 이기면 영웅이 된다. 독도를 사수하면 영웅이 된다. 망언의 역사로 얼룩진 일본의 지도자들을 누군가 단죄하면 조국의 영웅이 될 것이다.

 

영웅을 기리는 시대

짧은 역사에 영웅이 많지 않은 미국인들은 늘 영웅에 굶주렸다. 헐리웃이 창작한 영웅들이 한동안 대중의 뇌리에 박혔지만 그것도 이젠 시들해졌다. 20세기 중엽이 되기 직전부터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헐크, 아이언맨, 엑스맨, 스파이더맨이 줄줄이 창작되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전쟁 영웅들도 과대 포장되어 대중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금도 잊을 만하면 영웅 관련 영화가 만들어진다. 세계 분쟁 지역에서 전사한 군인을 영웅으로 부르고 포로에서 석방된 군인을 영웅 대접하고 대형 화재를 진압한 소방관들과 테러범을 체포한 경찰관을 영웅으로 떠받든다. 실제 영웅은 시대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지만 인조 영웅의 생명은 속절없이 짧다. 당신은 어떤 영웅인가?

역사적으로 가장 다양한 영웅들을 보유한 중국은 참으로 땅의 크기만큼 얘깃거리가 많은 나라다. <대국굴기>로 중국의 기상을 영상화하더니 얼마 전에는 영웅들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중국 전역을 달궜다. 우리에게 <대장금>이 있다면 중국인들에게는 <쓰리 킹덤스>(삼국지)가 있다. 십 수 년 전에 타계한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료타로(司马遼太郞)가 복원한 역사소설 <항우와 유방>이 지금까지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순히 흥미만이 아닐 것이다. 방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반된 성격의 두 인물의 심리와 삶을 각색한 그의 글에는 최인호의 <유림>에 버금가는 학자적 연구 자세와 함께 우리의 김훈처럼 깔끔한 문체가 돋보인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나라 할 것 없이 모두가 자신들의 영웅들을 기린다.

 

성경 속 영웅, 교회사 영웅, 오늘의 영웅

성경 초반부에는 인류 최초의 영웅인 니므롯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세상의 처음 “영걸”(a mighty warrior) 또는 “특이한 사냥꾼”(a mighty hunter)으로 소개된 니므롯은 인류 최초로 대제국을 건설한 황제였다. 사사기는 왕정국가가 시작되기 전의 이스라엘 민족을 지킨 일대 영웅전이다. 다윗과 골리앗도 영웅 이야기의 소재로는 손색없으나 너무 싱겁게 끝나버린 전투가 아쉽다. 다윗이 왕국을 세울 때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세 용사와 삼십 용사의 신화 같은 무용담이 구약 역사서에 자세히 수록되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전이다. 세상의 종말을 외치는 이 시대엔 영적 전쟁을 통한 영웅전이 고개를 내밀 만도 하다. 교회가 사탄과 싸워온 지난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각자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의 영적 전투에서 거두는 무용담과 승전 소식이라면 영웅 이야기로 손색없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작은 영웅들이다. 고단한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의인이라, 선인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웅의 길은 외로워도 영웅의 삶은 외롭지 않다. 영웅은 자신의 길을 홀로 달려도 타인을 위한 길에는 언제나 더불어 걷는다. 내 지친 삶이 외롭지 않은 이유는 이런 영웅들이 가까이에 꽤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어떡하든 그들을 위하려는 열정으로 늘 가슴이 뜨겁다.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런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길 소원한다. 한때 교회는 세상의 외진 삶을 위해 오지를 더듬던 영웅들의 집합소였다. 우리의 영웅은 어디 갔는가? 영웅 찾아 나서는 그 길이 험난한 삼만 리, 십만 리라 해도 기쁨으로 나아가리라!

 

영적 춘추시대 혹세무민의 영웅들

거친 삶을 향해 고향을 등지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길든 거위들 위로 날개를 퍼덕였던 한 마리 거위가 길든 삶을 포기함으로 야생의 삶에 내던져졌다. 힘든 비행을 끝내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그가 들려준 얘기들은 많은 거위들을 감동시켰다. ‘그래, 나도 저 푸른 하늘을 날며 넓은 대지를 내려다봐야지!’ 길든 거위로 출발했으나 야생거위가 되어 돌아온 옛 동료의 풍채에 감복한 동료들은 은혜를 받고 아멘을 합창했다. 귀가한 그들은 일주일 내내 일상의 삶에 시달리다 지친 몸을 이끌고 교회를 찾았다. 야생거위의 확신에 찬 열정적 설교는 거위들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거위들은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날개 퍼덕이기를 망설였다. 결국 그들은 축제일에 훈제되어 주인의 식탁에 올려졌다.

영적 세계에는 숱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난무한다. 간증이라는 이름 아래 신비하고 기상천외한 경험들이 소개된다. 천국과 지옥을 다녀오고 천사들과 수시로 접촉하고 직통계시를 운위한다. 하나님과의 독대와 같은 친밀감을 은근히 과시한다. 그런 세계에 일천(日淺)한 대중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언질에 덜컥 겁을 집어먹고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라도 챙길 양으로 ‘아멘! 할렐루야!’로 맞장구를 친다. 영계의 사이비 영웅담들을 쓰레기통에 내버려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이야기와 우리 자신의 상식적인 일상의 신앙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의 영적 현실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도처에 영웅들이 들고 난다. 자연히 사이비 영웅들이 많아 혹세무민한다. 귀가 엷은 사람들, 머리 숫자는 많아도 지혜의 마음이 없는 대중들은 영웅의 무용담에 혼을 뺏긴다. 최소한의 식별력도, 조심스런 분별력도, 예리한 통찰력도 기대할 수 없는 지도자들은 청맹과니가 되어 거짓 영웅의 대열에 합류한다. 무턱대고 영적 영웅들을 강단에 세웠다간 수십 년 지켜왔던 진리의 터가 한순간에 와르르 붕괴되어버린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고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영적 세계에서 영웅 됨의 자질은 기도와 말씀이다. 영웅의 기도는 일진광풍을 휘몰아오고 영웅의 말씀은 천지를 진동시킨다. 시대가 영웅을 만나면 혼돈했던 세상이 고요해진다.

 

한국교회 초영웅(超英雄)들의 초라한 말로

오래 전 고우영씨는 그의 만화에서 유비를 쪼다라 업신여기며 간웅 조조의 영웅상을 부각시켰다. 삼국이 승패를 나누는 가운데 초영웅에 해당하는 인물이 유비에게 많아 호각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항우는 영웅 중의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한 나라의 유방은 유비처럼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초패왕 항우는 초영웅이었다. 그런데 그가 무너졌다. 군사를 일으킨 지 8년의 세월 동안 70전 70승에 빛나던 초영웅 항우는 28명밖에 남지 않은 부하들을 넷으로 나누고 앞장 서 자신을 끝까지 추격해온 한의 기마병 5천을 뚫고 사지를 벗어났으나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 여겨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관운장과 장비의 죽음은 또 어떠한가? 초영웅들의 비극적인 최후는 결코 극적이지 않았다.

사사시대의 영웅들 중에도 초영웅 삼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신화와 민간설화,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모두 초영웅들(super heroes)이다. 굳이 대비하자면 대형교회 목회자는 영웅 그룹이고 초대형교회 목회자는 초영웅에 해당한다. 영적 훈련의 고통스런 과정에 비추어서가 아니라 소위 교세에 의해 그려진 초영웅의 대형 초상화는 대개가 거품이요 허구에 가깝다. 겉모습을 따라 조작된 초영웅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세가 제거되었을 때 쭈그러진 몰골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사이비 영웅들이 사라져야 올곧게 영웅의 길을 말없이 걷던 소영웅들이 기지개를 켠다. 조국교회를 지켜온 우리들의 영웅들은 온갖 풍상을 견디느라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반듯한 나무는 왕궁의 대들보로 쓰일지 몰라도 자신들을 키워준 산을 지키는 것은 못 생긴 나무다. 이는 한국교회의 그루터기를 지키는 교회나 목사가 결코 대들보용이 아니어서 쓸모없다고 방치된 존재들일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깨우쳐준다. 이제 한국교회의 희망은 작은 교회의 작은 영웅들이 난세를 평정함에 있다.

 

대형교회 초영웅 작은교회의 소영웅

조작된 한국교회의 영웅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추락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무너질 때 그것은 비단 개인이나 해당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무더기로 비판 대상이 된다. 그래서 마음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들의 몰락을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은 사실 그럴 자격이 없다. 그들을 영웅으로 몰아세운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깃발을 날리고 나팔을 불어대던 전위대가 그들을 학살하는 현장의 증인이 되려 한다. 아무 회심의 증거도 없이 쓰러졌던 그들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대중의 이목이 집중된 문화의 거리 한복판에 버젓이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거침없이 강단에 올라 여전히 그를 떠받드는 추앙자들을 향해 성경을 빙자한 자신의 논지를 날린다. 무슨 마력이 붙어서인지 그의 이름으로 퍼지는 메시지의 파편에 서로가 먼저 맞으려 아우성이다. 그 중의 한 교회인 H교회는 젊은이들이 모이지 않는 세태에 역행하여 오히려 모여든다. 선교도 가고 전도도 열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징조로 여겨지지 않고 걱정스러움은 왜일까?

2010년 10월 20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성전이 20개의 제자 교회로 독립한 1년을 기념하는 <영산 제자교회 독립1주년 기념> 수요예배 석상에서 원로인 조용기 목사가 설교했다. 큰 교회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두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뜨끔하게 들었다는 그가 이어서 내뱉은 말은 설교를 빙자한 폭언이었다.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말을 믿지 마라. 목회에 실패한 이들이나 하는 변명이다. 주님 보기에 큰 교회가 아름답다.” 그가 한국교회의 부흥 성장에 끼친 공로는 이 한 마디 말로 희석되었다. 신학생 시절에 수요일마다 서대문에 위치한 교회를 찾아 그의 메시지 듣기를 즐겨했던 나로서는 하필 수요일에 그가 남긴 언사로 인해 그때 받았던 감동을 모두 돌려주기로 했다.

작심한 발언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쏟아낸 실언이라 해도 그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작은 교회를 섬기는 신실한 종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들의 주님을 욕보였다. 그는 말하고 잊었을는지 몰라도 여러 사람들이 상처 입었을 것이다. 쏟아진 물은 담을 수가 없는데 이를 어이하랴! 우주 공간에 떠다닐 그 소리들의 입자가 마지막 날에 ‘증언’ 되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의 정경이 새삼 두려워진다. 소위 대형 교회 출신 목회자들의 안하무인격인 발언이 내뱉어질 때마다 상처 받는 것은 작은 교회 목회자들보다 그들의 주님이 더 심하다. 주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송구한 일인데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이 무지몽매한 현실이야말로 작은 거인, 소영웅이 더없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자신을 혁명하는 것이 진정한 영웅

시대현상을 바라보며 더불어 사는 사람도 있고 훌쩍 새로운 세상을 찾아 길 떠나는 이도 있다. 혹자는 저항할 의지가 부족해 먼 길을 떠나지만, 어떤 경우에는 떠날 용기가 없어 섞여 살며 거부의 몸짓을 보인다. 솔직히 저항만이 용기의 표현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몸을 돌려세움은 익숙한 삶을 베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기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제자리를 지키며 거대한 세력과 맞장 뜨려면 개체끼리 저항의 기운을 한데 결집시켜야 한다. 저수지의 물이 차면 넘치듯 저항이 거세지면 곧장 혁명으로 치닫는다. 사람들은 ‘혁명’ 하면 한 나라를 뒤집어엎는 범주로 묶어버린다. 운명을 뒤집어버리는 것이 혁명이라면 혁명의 출발은 우선적으로 자신이다. 혁명의 씨앗은 작고 단단하다. 영글면 열매도 많고 알차다.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이나 정권을 바꾸는 정당정치나 새판 짜기라는 측면에서 둘은 대동소이하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혁명은 세계를 개조시키는 천지개벽이 아니라 자기혁명이다. 광기의 몸짓으로 세계를 들었다 놓았던 히틀러는 개벽의 거대한 무게에 눌려 압사 당했다. 건국의 시조로 신화의 첫머리를 장식한 왕들도 자기혁명의 마지노선에서 모두 무너졌다. 세상을 뒤집어도 뒤집어지지 않는 것이 자기라는 괴물이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는 말씀은 자성을 통한 마음 다스리기에 정성을 쏟았던 조선 선비들의 치심(治心)과 엇비슷하다. 퇴계가 장수를 위해 제시한 지양 덕목 9개와 지향 덕목 21개는 모두가 치심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치심 없이 이루어지는 혁명은 없다. 영웅의 최후가 늘 비극으로 끝남도 자기혁명의 실패가 초래한 결과다. 자기를 정복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복왕이다. 주님은 자기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으셨다.

 

영웅으로 포장되는 이념편향

오래 전에 전차 앞에서 전라(全裸)의 몸으로 맞선 한 청년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보았다. 이미 고교 시절 그는 “헌법 제20조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예외다?!” 라고 쓴 두꺼운 종이를 목에 걸고 일인시위를 한 적이 있다. 종교의 자유를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미션학교에서 실시해온 기독교예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 후의 전라시위는 군대폐지를 위한 해프닝이었다. 일인시위였지만 전라의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과격시위였다. 언론은 “진정한 시민민주주의가 도래했다!” “전차와 알몸으로 맞장 뜨다!” “새 시대의 혁명가 강의석!” 하는 식의 얼토당토않고 선정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호도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적과 마주친 상황에서 국민의 4대 의무다. 10년 이상을 복무케 하는 북한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면서 무슨 헛소리인가? 미션학교면 예배는 당연하다. 나라를 옮기든지 학교를 옮기든지 하면 그만이다. 철들 때가 지나도 여전히 철없는 청년의 영웅적인 도발행위를 미화한 언론이 역겹고 기자들의 몰상식이 염려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다. 세태를 어지럽히는 일부 언론인들의 좌충우돌식 보도 행태가 심히 염려스럽다. 이념 편향적인 기사에는 독성까지 가미되어 여럿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펜은 칼보다 강하지만 이런 펜이라면 당연히 꺾어버려야 한다. 바른 역사관과 민족정신이 바탕 되지 않으면 이념과 사상의 꼭두각시나 악한 주인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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