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조롱당하는 시대
지금은 말씀이 조롱당하는 시대다. 바른 진리가 업신여김당하는 때다. 말씀 운운하면 벌써부터 마음 빗장부터 닫아건다. 말씀에 진지할라치면 시니컬하다. 말씀을 전문으로 다루는 계층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성경 인용이 아예 없으면 말씀 부재를 나무라고 인용이 잦으면 통달한 티를 낸다며 입을 비쭉거린다. 누구는 성경 통독을 수십 번 안 해보았느냐는 투다. 진정 한두 구절의 말씀이라도 제대로 접했다면, 그래서 말씀의 영적 촉감을 확실히 느꼈다면 그런 반응을 보일 리 만무다. 말씀에 통제당하지 못하고 매사에 말씀을 통제하려니 이런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말씀을 사랑하던 자들도 말씀을 연구하면서 문자에 포박되어버린다. 복음서를 살피면 주님의 말씀에 험담을 늘어놓던 자들은 종교동물에 비할 만한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이들 중에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들이 적지 않음은 개탄스럽다. 해석의 변방에 해당하는 자의적 해석을 즐긴다.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반대편의 주장을 꺾어버리기 위해 마구잡이식으로 말씀을 적용한다. 적용이라기보다 도적질에 가깝다. 방범 역할을 감당해야할 교회가 손을 놓고 있다. 비근한 예로 신천지의 비유풀이는 해석의 강도질에 해당함에도 순찰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부흥이 더딘 시대에도 그들은 호황을 누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이 없는 자들의 학문적 해석
이단은 아니어도 정통의 옷을 버젓이 걸쳐 입은 채 딴청이다. 때로는 신학적 방법론을 내세워 새로운 의미를 추구한다. 단순히 옷만 갈아입힐 뿐 아니라 말씀의 체형까지 바꾸려 든다. 주님의 말씀도 비웃었는데 주님의 종들이 하는 말씀쯤이야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신학 방법론은 반드시 말씀 아래에 굴신(屈身)하고 말씀의 범주 안에서 시도되어야 하는데 말씀을 깔고 앉아 감히 논단한다. 해석의 지평 운운하며 말씀을 해체하고 시대 상황에 적합한 해석 모델을 제시한다. 자신의 해석을 가늠자로 해서 다른 해석들의 눈금을 정한다. 말씀의 무겁고 가벼움을, 길고 짧음을 평하며 바른 해석의 절대권을 휘두르는 모양새다. 말씀에 대한 신앙보다 신학적 접근이 우선한다.
학문적 탁월함이 아무리 위대해도 말씀의 영성을 앞지를 수는 없다. 말씀에는 영이 있다. 성령이 감동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영이 없는 사람이 말씀 해석의 전문가가 되면 교회에 비극이 시작된다. 공인된 전문성을 바탕으로 말씀을 제멋대로 주무른다. 학문적 성과를 내세워 색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기존의 해석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로 취급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학문이 높은 경지에 올라도 말씀의 밑바닥에는 범접할 수 없는데 말씀 해석에 학자연(學者然)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학문 성취의 증표가 되는 학위에 눈이 뒤집히는 것도 그런 세태의 반영임을 부인치 못한다.
말씀의 주도권은 말씀 그 자체
말씀의 바른 해석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까이 한 자의 몫이다. 바른 해석이 바른 소리에 실려 바르게 전해질 때 바른 적용에 이른다. 말씀이 잘못 해석되거나 해석은 바른데 구부러진 소리에 실려 전달되면 올바른 적용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사회 전반에서 부딪히는 반교회적 정서는 신자다운 삶의 부재로 인한 당연한 반작용이다. 표리부동의 삶을 막지 못한 것은 바르지 못한 해석에 기인한 왜곡된 메시지, 입술의 증거와 수족의 실행이 괴리된 메신저의 이중성에 있다. 한 마디로 강단의 위기다.
강단의 위기는 탄식만 하거나 원인 분석에만 매달릴 문제가 아니다. 성급히 풀어 해결해야 할 현안 중의 현안이다. 청중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메신저 각자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메시지와의 새로운 만남을 가져야 한다. “그 말씀”과의 복되고 은혜로운 조우(遭遇)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기이한 만남은 메신저가 원한다고 불시에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만남의 특징은 전적으로 수동성에 있다. 즉 말씀이신 하나님이, 말씀에 감춰진 진리가 만나주셔야 가능한 일이다. 주도권(initiative)은 말씀 자체에 있다.
말씀은 검, 메신저는 검을 다루는 자
말씀의 종, 혹은 말씀을 수종드는 자가 말씀 앞에 겸허하게 자신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진정성을 갖고 존귀와 영예로움 곧 경외심으로 말씀을 심히 사모해야 한다. 말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말씀에게 철저히 다루어져야 한다. 말씀이 검이라면 메신저는 그 검을 쥘 수 있는 완력을 지녀야 하고 칼을 다루는 기술인 검술을 익혀야 한다. 실제로 검술세계에서 일개 문파를 형성키 위해서는 독보적인 검법이 창안되어야 한다. 보검을 쥐고 난세를 평정할 검법으로 사이비 세력들을 소탕하는 검객 수준에 서야 비로소 말씀 해석과 선포에 능한 자라 칭할 수 있다.
성경은 세상에 유일한 가치를 드러낸 영세불망의 보검이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 공인된 성경 해석법은 가장 안전한 검법이다. 여러 방법론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여 바른 해석을 시도한다면 참 포도나무에서 뻗쳐 나온 여러 가지 중의 하나로 잎사귀를 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에 이를 수 있다. 말씀 연구에 기도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검술의 내공을 실제적으로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말씀의 신성을 인정하고 말씀이 지닌 메시지를 마치 금을 캐는 광부의 심정으로 깊이 파헤쳐 광맥에 도달하는 실제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바른 소리일수록, 하늘의 메시지가 실려 있을수록 영이 어두운 자는 께름칙하게 여긴다. 도도하기 짝이 없다. 하루살이에게도 물려죽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다니, 진리의 말씀을 훼손하다니, 말씀의 영광을 가로채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날이 오면 내가 무시한 말씀을 들었던 길가의 돌들과 잡초들이 고소자로 나설 것이다. 허공중에 흩어졌던 말씀들이 되살아나 말씀을 침묵시킨 대적자들의 귀를 울릴 것이다. 말씀은 반드시 본래의 영광을 회복한다.
가벼운 설교에 가볍게 휩쓸리는 군중들
유튜브의 너른 바다를 휘저어보라. 웬 설교가 그리도 많은지. 헌데 말씀의 본체가 드러나고 진리의 모습을 밝혀주는 설교를 찾아보기 참으로 힘이 든다. 조회수에 따라 설교의 질을 평가할 수 없지만 거기 목매는 사람의 처지를 상상하면 아주 착잡하다. 구독과 ‘좋아요’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데 창피함에 할 말을 잃는다. 청중의 평가에 신경 쓰인다면 설교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 말쟁이는 솎아져야 한다. 하늘의 메신저는 땅의 메아리에 관심이 없다. 심령을 깨운 말씀이라면 그에 합당한 반응을 어떤 모습으로라도 상한 영혼은 보일 것이다. 선포는 사람의 몫이지만 역사는 오로지 하나님께 있다.
가볍다. 너무 가볍다. 해석이 어렵고 적용은 난감하다. 설교도 현학적이거나 메시지 없는 고함에 묻히거나 감성몰이로 이성과 영성의 기능을 마비시켜버린다. 말이 가볍고 글이 가볍다. 표현도 가볍고 설교 중심을 잡아주는 오뚝이의 중심추가 없어 삶이 가볍고 영성이 가볍다. 설교를 듣고 글을 읽는 자들까지 가볍게 만들어버린다. 회중석에 앉은 이들을 개개의 청중이 아니라 군중으로 여기면 이런 현상이 생겨난다. 군중이란 머리 숫자는 많아도 지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설교 듣는 청중이 그런 군중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회중은 독립된 개체로서 가벼운 설교자의 선동에 무분별하게 반응치 않고 감정적 쏠림현상에서도 벗어나 있다.
영적 산파인가? 밥벌이 메신저인가?
말 깨나 하고 글 깨나 쓴다는 이들이 회중을 소홀히 대하면 낭패를 본다. 회중은 단지 우매한 군중이 아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개체로서의 각자는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다. 이해하고 식별하는 능력은 웬만한 말쟁이들을 능가한다. 신앙과 합리성을 적당히 섞어가며 교묘한 논리를 펼치거나 논점의 핵심은 피해가며 주변적인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켜도 그들은 가볍지 않은 회중이어서 결코 속지 않는다. 설사 속는다 해도 그들을 계도하여 올바르게 이끌 메신저는 의외로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설교자가 회중의 정신적 성장과 영적 성숙을 도우려면 본인이 더 많이 연구하고 더욱 깊이 기도하고 더더욱 말씀연구에 철저해야 한다. 아니면 침묵함이 옳다. 자신감을 회복하기 어려우면 옷을 벗음이 본인과 회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최선이다. 회중의 정신적 도우미가 되고 영적 산파 역할을 할 의욕과 희생심이 없다면 그래야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고 입으로는 부지런히 전했지만 실제의 삶이 뒤따르지 못하면 결국 자신이 전한 말씀이 올가미 되어 나중 발목을 잡고 말 것이다. 밥벌이를 위한 메신저는 퇴출되어야 한다. 최소한 밥값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전문가로서의 기본 소양을 반드시 익혀야 한다.
하나님의 저울에 자신을 다는 메신저
한 영혼의 가치를 깊이 묵상하라! 벨사살 왕은 벽에 나타난 손가락이 쓴 신비의 글자를 보았지만 정작 그 뜻을 해석한 이는 다니엘이었다. 그것은 저울에 달아 모자람이 드러나 나뉘게 되리라는 메시지였다. 설교자는 강단에 오르기 전에 스스로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아야 한다. 아무리 달아보아도 ‘데겔’이면 확연한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자책하는 마음으로 엎드림이 옳다. ‘우바르신’이면 마음의 갈등을 조장한 잘못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 메신저로서의 무게에 차야 메시지 선포의 자격자로 충분하다. 그래야 나뉘지 않고 하나 됨을 고이 간직할 수 있다.
메신저가 지녀야 할 무게는 말씀을 영혼의 중심에 둘수록 더해진다. 꿈쩍 않는 부동의 중량감은 말씀이 지닌 자체의 무게에 근거한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말씀의 메신저가 되려는 허수아비들은 길가의 곡식을 쪼아 먹는 새 떼들을 좇지 못한다. 모든 것에 앞서 말씀을 접해야 한다. 긴밀히 접촉하고 완벽히 접속을 이루어야 한다. 당연히 말씀을 가까이 해서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깊이 묵상하며 넓게 적용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회중의 정직한 반응이 설교자를 키우고 설교자의 진심은 그들에게 영양제가 된다. 이야 말로 윈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