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육체와 완전히 다른 부활체

성도의 구원이 단지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몸도 포함한다면 천국에서의 구원받은 사람, 영생으로 표현된 삶은 생각만 해도 신비롭기 짝이 없다. 사후 인간의 상태를 알려면 주님의 경우를 이해해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육체에 계실 때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시간과 공간에 제한당하셨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셨다. 희로애락을 느끼셨고 먹고 주무셨다. 그런데 부활과 함께 주님은 이전과 완연 다른 존재의 모습을 보이셨다. 외모와 몸의 기능이 완전히 달라지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면전에서 보았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묘지 관리인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부활체는 이전의 육체와 차이가 남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부활체는 분명히 몸의 형체를 보이지만 이전의 육체와 질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바다를 찾아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찾으셨던 것처럼 부활체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문을 단단히 잠가두었지만 주님은 벽을 투과하셔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홀연히 이곳과 저곳에 나타나셨다. 공간에 제한당하지 않는다. 천국은 첫 사람들이 잃었던 낙원의 확장된 형태일까? 새 하늘과 새 땅도 천국의 일부분일까? 천국은 세상과 별도로 마련된 곳일까? 아니면 저 광막한 우주의 한 곳에 예비 되었을까? 사람들은 과연 천국과 지옥의 실체를 믿고 있는 것일까? 종교적 신념으로 위안을 삼을 뿐인가? 아니면 실제로 믿는 것일까? 실제로 믿는다면 지옥에 갈 사람은 제쳐두더라도 천국에 갈 사람은 지상에서의 삶이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영적 기준은 고사하고 일반적인 기준을 따져보아도 정상인에 미치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교도소에는 불신자들보다 기독교 신자들이 더 많은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나?

 

하나님 믿는 자들의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실제로 믿는 이들이 너무 적다. 이는 불신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설교도 잘하고 기도도 뜨겁고 사역자로서의 모습이 삶에서 드러나긴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무대 뒤에서의 모습은 영 딴판이다. 간교함으로 동역자들을 후려치고 여러 개의 가면을 바꿔 쓰면서 신자들의 영혼을 갖고 논다. 더러운 이권 싸움에 악용하고 껄끄러운 싸움에는 추종자들을 앞세워 감당케 한다. 지옥을 안고 사는 그 모습이 기가 막히다. 그런 자들을 목자로 알고 신앙 생활하는 이들의 운명은 어찌 되는 것일까? 목자를 잘못 만나 잘못 배우고 잘못 따른 결과는 결국 본인들의 몫인데 너무 끔찍하고 가련하다. 순진한 신자들만 희생된다. 교회에 분쟁이 생기면 악착같이 싸운다. 당장 법정으로 달려가고 경찰력을 동원한다. 하루아침에 교회는 쑥대밭이 되고 어제의 교우가 양편으로 갈라져 삿대질하고 험한 말이 오간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두렵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어느 쪽으로 향할는지 실로 두렵다.

하나님은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시다.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만큼 더더욱 강조해야 할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두려운 면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역행한다. 정말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양심은 행방불명이고 윤리는 치매 수준이다. 막가 식으로 우격다짐함은 어디서 배운 망동인지 모르겠다. 슬프고 통탄스럽다. 거짓말을 너무 천연스럽게 한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을 말한다. 맹세까지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거짓을 말한다. 함부로 막말을 한다. 무슨 말이든지 하나님은 자신의 귀에 들린 대로 심판하시는데, 무슨 무익한 말을 내뱉었을지라도 말에 대한 심판은 피할 수 없다 하셨는데도 마구잡이로 퍼붓는다. 그것이 저주가 되고 심판의 화살촉이 되어 자신의 영혼에 깊이 박힘을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

 

가장 알고 싶지만 감춰진 수수께끼 죽음

자칭 기독교인이 너무 많다. 사이비 신자들이 넘쳐난다. 가짜가 판을 친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유명을 달리 한다. 노환으로 별세하기도 하고 사고로 종말을 맞기도 하고 비명횡사하는 이들도 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죽음이 각별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순간만큼은 삶과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지난 삶을 잠시 회상하기도 한다. 일종의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삶은 늘 그랬던 것처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그렇게 돌아간다. 어제처럼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고 바람을 맞으며 허기와 갈증을 느끼면서 울고 웃는 삶의 시간들을 이어간다. 죽으면 그만인데.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는데. 며칠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히는데. 살아보려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피터지게 싸우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정말이지 별게 없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알고 싶지만 감춰있는 수수께끼다.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많은 임사 체험자들이 죽음의 순간이나 소생하기 직전까지의 상태에 대해 언급하지만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를 일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이 사후의 세계에 그토록 궁금증을 갖고 있는 것은 사후에 전개될 어떤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 때문이다. 파스칼의 확률 이론에 따라도 사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에 비해 확률적으로 유리하다. 만일 사후에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렇게 믿은 사람이 이기고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믿었던 사람들은 게임에 진다. 허나 게임에 졌을 뿐 실체가 없으니 그것으로 그만이며 잃을 것이 하나도 없다. 죽음으로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 터이니 말이다. 반대로 사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은 믿은 대로 처리되겠지만 천국과 지옥의 실체를 부정하던 사람들의 신세는 낭패를 당한다.

 

천국과 지옥 전의 낙원과 음부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원래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의 죽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영혼 때문이다. 솔로몬의 표현대로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전 3:21) 동양의 음양이론도 인간이 죽으면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다니는 영혼(靈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뼈에 깃든 영백(靈魄)은 땅으로 들어간다고 믿는다. 물론 영혼이 올라가는 곳으로의 “위”나 “하늘”은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류의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에 천국의 삶은 시작되지 않는다. 천국은 아니요 지옥은 더더욱 아닌 임시 처소로서의 대기소에 죽은 영혼들이 거한다. 하나의 대기소에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지 두 군데의 대기소가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의인과 악인들의 영혼은 서로 격리되어 있다. 의인과 악인의 영혼들은 마지막 백보좌 심판 때까지 각각 낙원과 음부라 칭하는 곳에 거한다. 성경은 낙원과 음부에서의 거주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한다. 그래서 알 길이 전연 없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이 죽고 나서 부활이 있기까지는 일종의 중간 상태에 거하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연옥이라 표현해서 신자의 영혼이 더욱 정화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 주장하나 비성경적이다. 낙원에서는 더욱 정화되기보다 영광의 부활을 기다리는 잠정 상태로 보아야 옳다. 혹자는 중간 상태에서의 인간 영혼이 일종의 수면 상태에 들어간다 하지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낙원과 음부에 있는 그들이 분명한 의식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서 “잠든다”고 묘사한 것은 영혼수면에 관한 말씀이기보다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의미가 맞다. 바울이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함을 열망했을 때 그가 수면 상태를 동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낙원에서의 상태 역시 천년왕국이나 천국에 유사한 지복의 상태임이 틀림없다. 의인들의 상태는 더 이상 죄의 유혹이 없고 온갖 저주로부터 자유하며 안식을 누리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감

모세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서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시 90:3)라 했다. 여기에서 돌아감은 죽음을 뜻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천국을 본향으로 묘사하면서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같이 본향 돌아가기를 사모했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돌아간단 말일까? 본향이란 원래의 고향이다. 고향 중에서도 고향이란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이 모두 어떤 곳에서 왔음을 전제한다.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감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친 백성들에게는 그렇다. 인간의 영혼이 본향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 영원한 타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죽음은 가장 동경해야 할 순간이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하늘 본향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기에 그때까지 죽은 영혼들이 거할 곳은 어디인가? 지상의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까지는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꽤 오랜 시간을 어디선가 머물러야 할 것이 아닌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무슨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날까? 살아있을 때 분명한 이름으로 존재했던 이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매장을 하건 화장을 하건 수장을 하건 일단 육체는 분해되어 사라진다. 그 상태에서 ‘나’란 존재는 내 육체 가운데 머무르던 바로 그 영혼일까? 아니면 어떤 초의식일까? 물질이 아닌 영적 실재라면 그것은 허공에 떠 있을까? 아니면 구별된 장소에 머물까? 그들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사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을까? 사자들과 함께 거한다면 지상에서 가까웠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까? 언어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통해서라도 서로 교신은 가능할까? 이 땅에서 불편했던 사람들과 마주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구원 받을 자들과 멸망 받을 자들이 따로 구분되었을까? 함께 뒤섞여 있을까?

 

영혼멸절은 지옥도 함께 없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임할 멸망이란 사멸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저 사라질 뿐이라면 심판과 형벌은 무의미하지 않는가! 멸망이란 구원과 반대되는 형식으로 존재함이어야 타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악인에 대한 형벌은 아무 의미도 없다.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경우에 의인의 악인에 대한 신원(伸寃)이나 보수(報讎)에 합당치 않다. 불신자들이나 악인들의 멸망은 결코 사라짐이 아니다. 구원받은 영혼과 멸망당한 영혼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존재한다. 의인을 위한 거소로서의 천국이 존재한다면 악인들이 거할 장소로서의 지옥도 불가피하다. 견딜 수 없는 뜨거움으로 상징된 지옥에는 벌레라도 타죽지 않는 이상한 화염으로 가득 차있다. 불이 호수처럼 끓어오른다.

인간 영혼이 멸절될 것인가? 불멸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영혼불멸은 플라톤의 사상에 유입된 것이라 하여 부인하는 이들이 많다. 소위 영혼멸절론자들이다. 영혼이 멸절된다면 믿는 자의 영생이란 가장 허황된 주장이 되어버린다. 성경의 근간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주장이다. 영혼이 멸절되면 천국과 지옥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죽음으로 육체는 이미 멸절되고 영혼까지 멸절되어버린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누가 지옥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이는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가 영혼멸절설(annihilationism)을 믿었는데 그에 의하면 지옥이란 존재를 없애는 소각로와 같다. 아니다. 지옥은 악한 영혼을 영원히 고통 속에 존재케 하는 곳이다. 그의 견해는 단지 사적인 것으로서 비성경적이다.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은 공식적으로 영혼멸절설을 주장했는데 역시 비성경적이다. 지옥을 잔인한 교리 취급하며 이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라 주장하며 영원한 형벌로서의 지옥을 거부하는 모든 시도는 이교적이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영혼불멸

욥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뵈올 것(욥 19:26)이라 했을 때 그 의미는 소멸이 아니라 불멸을 가리킨다.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에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이 우리를 위해 있음(고후 5:1)은 우리의 불멸하는 영혼을 위한 것이다. 소멸될 영혼을 위해 하나님이 영원한 집을 장만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음(전 3:11)도 인간의 영혼이 불멸함을 뜻한다. 영적 존재인 천사가 불멸함은 역시 영적 존재인 인간 영혼의 불멸을 암시한다. 다니엘은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라 단언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수치는 의인과 악인의 결말이다. 죽음으로 영혼이 소멸된다면 악인에게 해당하는 영원한 수치란 무의미하다. 지옥에서의 고통은 영원하다. 의인이건 악인이건 인간 영혼은 불멸하다. 의인은 영원한 복락을, 악인은 영원한 고통에 처해진다. 주님의 말씀처럼 악한 자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간다(마 25:46).

사후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알 수가 없어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성도는 믿음의 확신 속에서 일체의 두려움을 떨쳐버린다. 사후 세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관할된다. 낙원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준하는 곳으로서 모든 죄와 저주와 질병과 사악함에서 벗어난 무균실과 같다. 이곳에서 의인들의 영혼은 수면이든지 안식이든지 가장 완벽한 형태의 상태를 유지한다. 낙원이 천국 자체는 아니지만 천국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음부도 마찬가지로 지옥 자체는 아니지만 지옥의 일부라 간주해도 무방하다. 성도의 죽음을 긴 잠으로 표현하는 성경적 용어를 염두에 둔다면 낙원과 천국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긴 수면 상태를 벗어난 부활 이후의 존재가 뚜렷한 의식으로 천국에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낙원의 가장 완벽한 실재가 천국이요 음부의 가장 지독한 형체가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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