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저주의 땅으로 변질시킨 자들
광야와 가나안은 매우 이질적이고 대조적인 실체로서 확실히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광야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단의 땅이다. 이에 비해 가나안은 그들 순례의 종착지로서 복지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적 경험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두 곳의 모습이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즉 광야는 광야가 아니라 영적 가나안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나안도 얼마든지 광야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천신만고 끝에 실제 가나안으로 들어갔지만 4반세기도 되기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430년 종살이를 끝내고 광야 40년의 고된 여정을 지나 1세대는 거의 몰사당하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광야 2세대만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믿음을 포기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저주의 땅이라 불리던 광야보다 더 지독한 광야로 돌변시키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믿음의 영웅이었던 여호수아에 이어 갈렙마저 떠나자 그 많은 백성을 이끌만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았다. 군중들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영웅들이 생존한 기한까지였다.
가나안에 들어가 첫 소출을 먹기 시작하면서 광야에 마련되었던 기적의 식물인 만나가 중단되었다. 만나를 대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를 생각하면 그들은 바르지 못했다. 처음에는 신비로운 식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던 재료였지만 장기간 만나의 맛에 질려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쏟아냈다. 하늘 양식에 진저리를 치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던 고기 대신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 그것은 재앙의 기적이었다. 한 달간 계속된 메추라기는 그들의 입맛을 돋우었지만 고기조각이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다수가 재앙으로 죽임 당했다. 신 광야에서 바란 광야까지의 1개월은 기적과 함께 재앙을 맛본 장소로서 언필칭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 주위에 기브롯핫다아와(탐욕의 무덤)가 세워져 이스라엘 백성의 뿌리 깊은 불순종과 반역의 상징으로 남겨졌다.
벗어나고 싶던 광야는 은혜의 현장
그래도 하나님은 기적의 식물인 만나를 40년간 계속 공급하셨다. 그것은 성막의 존재와 함께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는 표식이었다. 만나의 중단은 어찌 보면 말씀 공급의 중단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불안정한 유랑민 신세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정착민이 되었지만 광야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루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더 이상 낙원일 수 없었다. 모세는 광야 40년을 백성과 함께 고난의 시간을 함께 했지만 그것은 결코 나쁜 시간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생명의 도가 있었고 기적의 생수와 기적의 식물이 있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 또한 하나님 임재의 놀라움이었다. 그들은 광야 생활이 비록 고달파도 하나님의 기적을 매일같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몸으로 체험했던 신비스러운 여정을 보냈다.
여호수아가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강 저편이든지 강 이편이든지 그들이 믿을 신을 택하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말했을 때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요단 동편과 서편의 33왕을 멸하고 가나안에 들어오기까지 그들이 보여준 반역과 불순종의 기질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여호수아의 근심이 되었다. 여호수아가 영적인 방호벽이 되어 이스라엘의 민족적 타락을 막았고 그가 사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완전히 배신할 수는 없었다. 여호수아가 죽고 그 세대 사람들도 다 사라지게 되자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했다. 부모 세대들을 통해 구전으로 들어 기억한 옛 일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며 본격적으로 바알을 비롯한 온갖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광야와 광야교회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적 거인들이 하나같이 세상을 등졌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사라져도 백성들은 단연코 광야의 기적을 쉬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나님이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시며 자기 백성을 세밀하게 보살폈음을 기억해야만 했었다. 다시 말해 수백, 수천 대를 이어가면서 그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놀라운 경험들이었다. 더 이상 갈함이나 배고픔이 없는 풍요의 땅에서 그들은 궁핍의 때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되새겨야 당연했다. 하나님 없는 풍요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광야에서의 빈핍함을 기념해야 옳았다. 사실 광야가 저주의 환경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못지않은 축복의 땅임은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스데반은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 모세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8)고 말했다.
신약에서 “교회”란 말은 주님이 마 16장에서 최초로 언급하셨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수천 년 전에 이미 광야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림자라 할지라도 실체에 버금가는 교회다움을 스데반은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시대야 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머무는 시대, 성령이 역사하시는 시대임을 우리가 알고 있듯,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은총이 머물고 성령이 역사하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기사와 표적 같은 역사는 오히려 오늘날보다 더 확실하고 많았으며 뚜렷했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 악으로 가득 찬 오늘의 세상에서도 천국을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던 그 백성이 광야에 모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회중으로서 교회를 이루었다. 오늘의 교회가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섬긴다면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 옛날 광야 속의 가나안처럼 세상 속의 천국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신 광야와 하나님 없는 가나안
불뱀과 전갈이 득시글거리는 곳은 확실히 축복된 장소는 아니다. 메마른 광야는 실로 척박한 삶의 환경이다. 낮의 열기와 밤의 냉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광야는 생명을 보존하기 힘든 곳이다. 농작물을 기대할 수 없고 지형을 수시로 바꿔버리는 사막의 모래바람은 가히 살인적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거두어진 곳으로서의 광야는 정말 사람이 잠시라도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광야에는 광야를 지으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다. 불뱀에 물려도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높이 들려 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그곳에 샘이 솟아나게 하신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만나로 먹이신다. 일상이 무너진 곳에 능히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아무 것이 없는 광야의 환경이라 해도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하지 않은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늘 거기에 계시며 항상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면 충분하지 않은가!
천국에 하나님이 아니 계시면 천국이 아니다. 반대로 지옥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곳이 천국이다. 천국, 지옥이란 하나님이 계신 여부로 판가름 난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는 진리의 노랫말이다. 광야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 가장 확실한 천국이 거기 있다. 작은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교회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면 세상보다 더한 세상이 되어버린다. 교회가 세상의 품에 안긴 것도 역겹지만 더욱 기막힌 것은 교회 안에 세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에서 영적 풍요의 상징인 가나안을 찾을 수 있는가?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교회 안에는 젖과 꿀이 흐르지 않고 약속의 흔적 또한 발견키가 어렵다.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을 머리로 삼지 않는다. 지체들끼리 서로 엉겨 붙어 있다. 교회는 머리 없는 이상한 형체가 되어버렸고 마땅한 주인이 없어 무주공산(無主空山)의 형국이다.
광야의 때를 망각한 한국교회
교회에서 주님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광야가 되어버린다. 원래 교회는 광야에 세워진 장대 위의 놋뱀이어야 하는데 주님의 부재로 인해 사람들의 영혼을 물어버리는 불뱀이 되어버렸다. 아론의 금신상보다 더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금신상이 오늘의 교회다. 물론 모든 교회는 아니지만 선두주자 격인 대형교회들의 일탈은 악의 극치를 달린다. 그들 탐심의 대가들이 구원받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리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누릴 만큼 누렸고 군림했으며 진실로 회개치 않았다. 나의 의로움 때문에 이리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망동으로 인해 천국문이 얼마나 닫혔는지 안다면 그들 스스로 지옥의 화염으로 달려갈 것이다. 죽기 전에 회개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리라. 차라리 죽어 영혼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악의 축은 불신자 그룹에 있지 않다. 변질된 신자 그룹, 그것도 변질된 성직자 그룹에 도사리고 있다. 양떼들이 가련하다.
조국교회도 광야의 때가 좋았다. 부끄러운 것은 그 열심, 그 순수함, 그 신실함, 그 철저함, 그 담대함, 무엇 하나라도 옛적 신앙을 능가할 만한 것이 오늘 우리에게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지 좋았던 시절에 대한 약간의 향수를 느낄 뿐 실제의 능력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자기 백성에게 옛적 일을 기억하기를 누누이 강조하셨다. 그들은 잠시 기억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잊지 말 것은 ‘잊으면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말씀을 잊어버리면 영원한 말씀을 잃어버린다. 은총의 시절을 잊어버리면 형통의 시기를 잃어버린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영적인 풍요와 축복된 삶이 가나안의 삶이라면 차라리 거둬 가시기를 빌고 싶다. 이 좋은 것들 때문에 광야 시절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재앙에 다름 아니다. 응당 제해버려야 할 재앙 덩어리들이다. 거칠고 험한 광야 길을 걷더라도 수시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성막 주변에 진 치고 싶다. 두들겨 맞더라도 광야의 모진 훈련에 임하고 싶다.
광야가 곧 가나안
광야는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백성이 가나안의 누림을 위해 자격을 구비하고자 훈련 받는 장소다. 그들은 원래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천민 집단(하비루)이었다. 유브라데 강을 건넌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히브리란 명칭은 선민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바울 자신도 스스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할 정도로 오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성취코자 430년간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나님의 권능이 애굽의 신들을 심판함으로 촉발된 출애굽은 장자와 모든 생물의 처음 난 것이 죽는 재앙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투항의 백기를 든 애굽의 바로는 엄청난 노동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히브리 백성은 압제의 쇠사슬에서 놓여나 드디어 자유민이 되었다. 전 민족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축복의 땅까지 예비 되어 있었다. 광야는 애굽에서 형성된 노예근성을 뿌리 채 뽑아내기 위한 훈련소로서는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훈련과목은 녹록치가 않았다. 그들이 힘겨워 역반응을 보일 때는 기적적인 돌보심이란 안전장치까지 준비하셨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미래를 위한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혹독한 훈련을 이기지 못해 이전의 삶을 동경했다. 노예 신분이긴 해도 적당한 자유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옛 시절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것이 그들을 집요할 정도로 지난 과거에 집착케 만들었고 고질적인 불순종의 죄에 빠지게 만들었다. 몸은 광야에 있었고 꿈은 가나안의 풍요를 즐겼지만 마음과 생각은 옛 땅 애굽을 잊지 못했다. 옛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 않으면 가나안은 단지 꿈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설령 가나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형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 영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출(出)애굽하여 입(入)광야했고 40년의 방랑 끝에 출(出)광야해서 입(入)가나안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원래 상태인 입(入)애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몸은 분명히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그들의 영혼은 애굽에 묶여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목이 곧고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이 택한 영적 현주소였다. 가나안도 광야가 되고 심하면 애굽으로 돌변한다. 펜데믹으로 세계가 출렁거리지만 주님의 백성은 광야에서 가나안을 일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