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경건, 22일] 신앙은 영적 타이밍(마21:1-11)

  • 입력 2022.03.27 03:05
  • 수정 2022.03.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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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쓰기겠다하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정점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고난 주간이 시작된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죽으러 오는 길이다. 자기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고통이 기다리는 십자가 길이요,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죄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지막 사역을 완성시키고 인류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는 통로를 만들어 놓는 위대한 사건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의 모든 저주를 짊어지시고, 부요함의 축복을 주시기 위한 위대한 희생이요 그분의 헌신인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하면서 말이 아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 왜 나귀를 탔을까? 구약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21:4,5;9:9)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5:30)을 앞세웠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항상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한 것은 예수님은 정복자가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이기 때문이다. 말은 군사용이다. 즉 힘을 상징한다. 대장군의 말은 화려하다. 말의 화려함을 보고 그 사람의 직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데, 다 자란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질이다.

항상 낮은 자리를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리이다. 좁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항상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낮아져야지만 가능하다.

높아지려고 하면 항상 갈등과 다툼과 이기심으로 몸살을 앓게 된다. 믿음생활이란 낮아지는 훈련이다. 교회는 높아지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낮아지는 것이다. 제자는 대접을 받고 높은 자리에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버리고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나라가 주님의 뜻이 세워진다.

사명의 길은 말을 타는 것이 아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걸어가는 것이다. 말은 화려하지만, 나귀새끼는 초라하다. 그런데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사명의 길을 걸어가셨다. 본질을 잃어서는 안된다. 내가 왜 예수님을 믿는지 본질을 잃어버리지 마라.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면 남는 것은 거짓과 위선, 교만과 멸망밖에 없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빌려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주문하기를 주가 쓰시겠다”(3) 하라고 했다. 참으로 황당한 말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나귀새끼 주인은 제자들이 와서 자신의 재산인 나귀를 돈을 지불하지 않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서 끌고 갔을 때 안된다고, 값을 지불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즉시 보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사업장과 직장과 결혼에 있어서 주님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네 여기 있습니다. 주님 나라에 사용 하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과 헌신과 순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사야는 자신의 정치적인 후견인인 웃시야 왕이 죽자 왕실에서 정치적 끈이 잘려버렸.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그때에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했다. 성전에서 암담한 자신의 인생과 민족의 어둠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과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그때에 즉시 이사야는 반응했다.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반응이 그를 정치적인 야망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스라엘의 대선지자로 민족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성공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에 열려있다면 즉시 그분의 요구와 사명에 반응해야 한다.

주님의 타이밍에 무감각한 시대를 살고 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님이 말씀하셔도, 주님 잠깐만요 아직 내 생각이 정리가 안되어서 시간 좀 주십시오. 머뭇 머뭇거리는 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써야 되는데 내 놓아라. 주님 잠깐만요 이것은 안됩니다. 이것은 더 중요한 곳에 써야 합니다. 나중에 더 벌어서 하겠습니다. 영적 타이밍은 지나가버린다. 더 이상 은혜를 누리기는 불가능하다.

내가 네 시간과 네 재능을 지금 써야 하는데 내 놓을 수 있니. 주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의 재능과 시간을 달라하시니 감사합니다. 전부를 주님위해 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헌신과 믿음이 있기를 축복한다. 영적은 은혜는 항상 시간의 타이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야 한다.

모든 것은 만사에 때가 있다. 때가 지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일도 때가 있다.

오늘날, 국란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사라지게 된다. 많은 상처를 우리들에게 주겠지만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역사에 엄청난 재앙이었던 중세 흑사병도, 미국에서 시작된 스페인 독감(스페인이 최초 보도)으로 약 5천만 명에서 1억 명 정도 사망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약 900만 명이 전사했다. 전쟁보다 전염병으로 더 많이 사망했다. 100년 전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구가 1678만 명 중에서 742만명(44%)이 독감에 감염되었다. 그중에서 약 14만명(139,128)이 죽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100년 만에 찾아온 전염병으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전염병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코로나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상황을 견디며 이겨내야 하는가? 매일 뉴스에 몰입하여 불안에 떨며, 일상생활을 접고 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가?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은 좋은데,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지고,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내려놓고 살면, 코로나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여겨낼 수 있을까? 심히 염려된다. 정신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완전히 무너졌다면, 우리는 더욱 참담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고난의 세월에 주님과 더 깊이 사귀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뜻이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영적 감동을 받고 일어나는 것이다. 영적 감동 없이는 불안의 공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지금은 어떤 때인가? 이 질문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시 기억해야할 주제이다. 예방도 중요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채널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때 영적인 분별력이 생길 것이다.

이사야가 고난의 시간 앞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그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 선지자로 불렀다. 오히려 고난의 세월에 우리는 영적으로 더 자라고,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고, 주님의 은혜와 뜻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일어날 영적 동력을 얻게 된다.

베드로는 어부이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다. 즉시 예수님께 무릎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다. 어부의 경험과 상식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기적을 보았기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엎드린 것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리라. 이 말씀을 듣자마자 그는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신앙은 타이밍이다.

베드로는 예수님 나는 아내가 있고 거둬야할 자식이 있습니다. 호구지책 좀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고 정리하고 따르겠습니다. 말하지 않았다. 성경은 베드로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즉시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따랐다고 한다.

고민하는 사람은 헌신과 순종을 하기 어렵다.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음으로 반응하는 축복의 길이다.

작은 차이가 이렇게 큰 흐름을 주도하는 영적 리더가 된 것이다. 타이밍을 놓쳤다면 그는 일생 갈릴리에서 고기 잡다가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뀔 위대한 결심을 즉시 했기에 그는 역사에 길이 남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은 교회가 기도할 때이다. 주님앞에 무릎끊고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이다. 그래야 주님의 긍휼한 은혜를 베푸신다. 이 땅에서 버러지는 추악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동성애 합법화 시도, 차별금지법, 중소형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헌금을 걷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목회자들의 거룩한 자존심을 뭉개고 있다. 성경의 가치가 짖밟혀지고 있다. 기도하지 않고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할 때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 백성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무리들은 소리쳤다.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비록 무리들이 구원의 영적 의미를 잘 모르지만 그들은 외쳤다. 그 소리가 내 가슴에 뭉클할 정도로 진동이 찾아온다.

1세기에 있었던 군중들의 외침이 오늘 한국교회의 외침이요 우리들의 외침이다.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시편기자는 고난중에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118:25).

우리는 외쳐야 한다. 당신은 구원자입니다. 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를 무시하고, 신앙인들을 무시하고 조롱해도 예수님은 구원자이다. 예수님 이름 없이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에 예배를 생명처럼 여기고 예배하는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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