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배를 타고 한 해를 달려왔다. 국민들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무엇일까? ‘혼란’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우리 사회도, 종교도, 정부도, 의회도, 행정부도 좌충우돌하는 혼란의 반복이었다.
전국대학교 교수 906명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1위가 “아시타비”(我, 나아, 是 옳을 시, 他 다를 타, 非 아닐 비)이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라는 뜻이다. 내로남불의 한자 버전이다. 이중 잣대를 꼬집는 관용구이다.
정국이 꼬이는 것은 나는 정상인데 너희들이 잘못해서 그렇다. 야당은 여당 탓하고, 여당은 야당 탓하고, 청와대는 야당 탓하고, 국민들 탓하고, 정부는 교회 탓, 교회는 정부 탓하며, 서로 핑퐁 게임하다가 나라는 분열되었고, 국민들의 건강한 정서는 흐트러졌고, 고된 한 해가 되었다. 2020년 한국사회의 가장 큰 아픔은 핑계와 남 탓으로 얼룩졌다.
또한, 조국 사태를 지켜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이다. 과거에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스펙을 만들어 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지금도 돈 주고 대학 수시 자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 현주소이다. 조국 장관은 좌파 진보주의 학자로서 존경받던 인물이다. 많은 청년들에게 인생의 길을 제시해주었던 분이다. 핑계로 구질구질하게 자신의 가치를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승복한다면 우리 사회가 성장하는데 디딤돌이 될 것이다. 조국 장관에게 돌을 던지는 많은 분들이 있다. 그들도 자식의 인생 길 앞에는 비슷한 선택을 하기 쉽다. 한국 문화속에 뿌리깊이 내린 부모들의 일그러진 자녀 사랑의 단면이다. 돌 던지는 사람이나 돌에 맞는 사람이나 거의 오십보백보 차이에 불과하다.
‘내가 바람을 피우면 로맨스(romance)고 남이 하면 불륜(scandal), 내가 부동산을 사면 투자고 남이 사면 투기라는 식’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두 얼굴인 내로남불이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깨끗이 인정하는 사회, 그런 인물을 다시 존중하는 사회적 토대가 부족하기에 끝까지 법에 의존하여 힘겨운 줄다리를 하고 있다. 사회적 낭비가 참 많은 사회이다.
대학교수들이 뽑은 2번째 사자성어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이다. ‘낯이 두꺼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이다. 국민들은 청와대나 국회나 일부 장관들을 보면서 후안무치의 극치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성경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있다.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 받은 종은 즉시 장사하여 배로 남겼다. 먼 훗날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칭찬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
그런데 한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 앞에 내놓을 것이 없었다. 일한 것이 없었다. 받자마자 땅에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 주인 앞에 핑계만 내놓는다. 표준새번역을 보면, “주인은 굳은 분(냉혹하며 엄격한 사람, 거두 워 들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강요하는 사람)이시라 심지 않는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게으른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게으른 사람은 핑계가 많다. 주인을 아주 못된 분으로 말하고 있다. 주인을 날 강도로 처럼 말한다. 심지 않고 거두고, 뿌리지 않고 모으는 날 강도라고 한다. 그래서 종은 무서워서 땅에 파묻어 두었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게으른 분들의 특징이 있다. 핑계가 많다. 남 탓을 잘한다. ‘아시타비’, ‘후안무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의 게으름과 불성실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주인이 못된 분으로 말하고 있다.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것은 주인 탓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종교지도자들과 고위직 공무원과 국회의원, 선출직 공무원들과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핑계나 남 탓이나 내로남불의 모습을 버리고 책임을 지는 풍토가 조성되기를 원한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과거의 끈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사회로 힘차게 달려갔으면 좋겠다.
게으른 종들은 남 탓과 핑계만 찾는다. 그러나 충성된 종들은 핑계가 없다. 항상 남긴다. 충성된 종들은 결산의 날을 좋아한다. 충성되게 살았기 때문이다. 결산의 날에 칭찬과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오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충성된 사역자였던 바울은 주의 나라에서 자신의 삶을 인정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믿음의 길을 달려온 자만이 가지는 마음의 여유요 기쁨일 것이다.
그러나 게으른 종들은 마지막 결산의 날에는 후회만 남는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결산의 날에 있는 것도 빼앗겨 버리고,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취급받았다. 있던 한 달란트도 빼앗겨 버렸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겼다.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갈며’ 사는 처절하게 버려졌다.
그러나 성실하게 살았던 충성된 종은 마지막에 더욱 풍족하게 되었고, 주인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작은 이익 앞에 자신의 신앙과 바른 가치를 내 던지는 어리석음을 포기해야 한다. 헌신이 부족한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적 폭력이 너무 난무하여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지도자들의 몫이다. 바른 비판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지만 조롱의 언어나 품격이 떨어지는 말의 조합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질서를 깨뜨린다.
내년에는 종교지도자들과 국가지도자들의 품격을 기대해본다. 우리 사회가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하는 자성의 소리가 깊어져 가는 성숙함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