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시 ‘슬픔의 실체’는 한 줌으로 변한 자식을 상실한 애가다. “내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인 슬픔이여/ 막막한 슬픔이 나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고 읊고 있다. 슬픔보다 애통이다. 기쁨보다 슬픔이, 슬픔보다 애통함이 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애가는 ‘슬픔의 표시로 머리나 가슴을 주먹으로 치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렉스’에서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한 오이디푸스가 불렀던 노래다.
애통함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좌절을 극복하는 모멘텀을 찾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게 해준다. 애통이란 형제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서로 등을 대고 함께 울 수 있는 마음이다. 그 이웃이 슬픈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헤아리고 그 방안을 마련해주는 용기다.
어떤 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상실하는 것은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상실이 물질적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사회적 신분이든,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신분이든 간에 말이다. 시편기자는 애통을 노래한다. 시편 전체 약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 애통의 시, 일명 탄식시들은 시편에 가장 많이 차지한다. 날숨과 들숨을 합치면 호흡이다. 그렇게 한 번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동작을 가리키는 글자는 식(息)이다. 탄식은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호흡이다. 비탄은 몹시 슬퍼서 내뱉는 탄식이다. 탄식의 종류로서는 슬픔을 표현하는 정도가 아주 높은 단어다.
애통의 시편들은 시편기자나 그가 속한 공동체가 경험하는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에 따른 시들이다. 일반적으로 애통의 시편들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 즉 탄식으로 시작하여 그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주장하지만 확신으로 끝마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 절대적인 평화와 옛 창조를 특징지었던 온갖 형태의 고난으로부터 안전함을 얻는다. 모든 형태의 환난이 없어진다는 것이 이사야서에 언급되었던 것들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다.
성경은 애통이 기쁨으로 바뀐 아름다운 묘사들을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인용한 이사야 61장은 하나님께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신다.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바꾸어 놓는다.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한다. 스페인의 저항시인 Paul Éluard의 시 ‘그리고 미소를’에서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 켜진 창이 있다...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라고 읊조린다. 시인은 슬픔의 끝에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 켜지 창이 있다고 할 뿐 슬픔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는 자에게 복 있는데, 수고와 슬픔이 끝나고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이 웃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다.
1.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예루살렘을 이사야 65:17과 66:22을 따라 묘사한다. 옛 땅의 특징은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애통함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없다.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곳으로 회복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들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인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자는 사탄, 죄와 사망, 하나님의 대적들의 멸망이다. 모든 형태의 고난의 제거다. ‘만물의 옛 질서’의 일부였던 눈물, 사망, 애통, 애곡, 고통은 이제 다 지나가 버렸다. 이제는 역사가 되어 버린 이전 질서에 속한 것일 뿐이다. 애통이 다시없는 것은 부정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설명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최종적으로 완전히 승리한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통일된다(엡 1:10).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고전 15:28). 부정의 방식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새롭고 영광스러운 질서를 묘사할 때, 그것이 무엇을 대체한 것인지를 통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태에서는 거의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묘사하는 식으로 는 이해하기 더 어렵기 때문이다.
애통에 해당하는 ‘pevnqo"’(펜도스)라는 ‘곡하는 것’과 ‘아픈 것’과 함께 ‘비탄, 슬픔, 애통’을 뜻한다. 펜도스는 흔히 죽은 자를 슬퍼하는 일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성경에 나오는 죽은 자들에 대한 애곡 속에는 대체로 들을 수 있다(렘 22:18; 48:36). 눈으로 볼 수 있다. 슬픔을 표현하는 데도 동·서양에 차이가 있다. 전자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오열하는 경향이 있다. 후자는 아무리 안타까운 죽음이라도 슬픔을 애써 참는 편이다. 사랑하는 자를 잃었을 때 애통하고 곡한다.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펜도스는 애통함이나 슬픔의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이 단어는 죽은 자를 위하여 곡할 때처럼 슬픔의 외적인 표시에 대하여 사용된다. 이 경우에는 개인적인 슬픔뿐만 아니라, 장례 관습상 울게 되어 있는 곡성도 포함한다. 신약에서 펜도스는 애통으로 표현된 슬픔, 특히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9:15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애도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쓰였다(막 10:10).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애통도 없고 곡하는 것이 없다.
애통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일부이다. 너무 애통스러워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슬픔이 있다(고전 5:2).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망이 다시없고 애통이 다시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사탄의 위협이 없다는 말과 같다. 거역하는 민족들로부터 오는 위협 또한 없다. 따라서 바다가 죽은 자의 처소로서 역할을 할 여지도 전혀 없다. 히브리어에는 총 26개의 단어가 슬픔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고됨, 현혹됨, 두려움, 비애, 노고, 애통, 고통, 굶주림, 슬픔, 공허, 비통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사망이 없다. 애통하는 것이 없다. 곡하는 것이 없다.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 요한이 모든 세대를 통하여 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것들을 총망라한 구절이다. 죽음이 찾아오면 애통하고 곡한다. 아픔이 따라온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을 앗아가는 모든 것들이 없을 것을 약속한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와 시온에 이르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을 예언하였다(사 35:10).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실 때에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 다시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사 65:19).
2.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않다
이사야 65:17-22의 핵심 주제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쁨이다. 창세기 1-3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은 주목할 만하다. 새로움과 기쁨이라는 이사야의 주제를 요한은 부정적으로 강조한다.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는 사망을 제거된다. 더 이상 애통과 곡하는 것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질서를, 절대적 완전히 성취되어 더 이상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이 없는 상태로 묘사한다. 예수님은 그때에 아이를 낳는 일도,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한다(눅 20:36). 영원한 언약이 주어진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구성된다. 그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속한 유익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평화와 기쁨이 중심을 이룬다. 요한은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슬픔의 원천이 다 제거될 것이다.
영국 시인 William Blake의 ‘타인의 슬픔’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나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로 시작한다. “타인의 슬픔을 보며/ 내 어찌 따뜻하게 위로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애통하는 이를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는가. 자기 경험을 믿고 달변으로 해결책을 주는 친구보다 말없이 옆에 앉아 어깨를 어루만져 주는 친구에게 더 위로를 받는 것을 경험한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위로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있다. 애통함이 없는 곳이다. 곡하는 소리가 없는 곳이다. 공동묘지가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거기에는 사망이 없다. 애통이 없다. 곡하는 일이 없다.
요한의 환상에서 처음 하늘과 땅은 다시 있지 않다. 처음 하늘과 땅은 눈물, 사망, 애통, 곡함, 아픔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세상은 하나님과 그리스의 통치와 땅의 파괴자의 통치 사이의 충돌에 의해 규정된다.
이사야는 회복된 시온에 대한 묘사를 다음과 같이 한다. 야훼(יהוה)의 구속된 자들이 돌아오는 것을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또한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 51:11; 65:19). 이것이 모든 시대에 걸쳐 성도들을 안심시킨 보편적 소망이다.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멸망당한다(고전 15:26; 계 20:4). 사망의 온갖 전조들(애통, 애곡, 아픔)도 사망과 함께 다시 있지 않는다. 요한은 거의 같은 언어를 최종적인 회복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 사망의 소멸과 함께 애통과 애가도 사라진다. 죄로 혼탁해진 옛 질서와 그에 수반되는 고통이 영원한 복을 지닌 완벽하고 영원한 질서에 굴복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