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으로 은밀하게 침투하는 디지털 신영지주의
코로나 시대 이후에 온라인 만남은 이제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코로나의 비대면 시대에서 온라인의 중요성은 모든 영역에서 부각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너도 나도 유튜브 등으로 온라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교회도 점차 이 방향으로 준비를 하고 교회 시스템을 생각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전염병의 위험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이것을 일단 수용하지만 교회는 그것이 주는 영적 위험성을 잘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온라인으로 은밀하게 침투하는 디지털 신영지주의 경계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온라인은 가상공간이다. 얼굴이 없고 설사 얼굴이 있어도 조작된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내용도 거의 편집되었기에 실체와 진실함을 보기 어렵다. 영상으로 만난다 해도 극히 일부분으로 얼굴과 말을 듣는 정도다. 감정과 느낌을 공감하기 힘들고 부분적인 전달로 지식만 얻는 한계가 있다. 갈수록 정보와 지식형 인간이 되며 사람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어렵게 된다. 가장 큰 난제는 인격을 통한 본받음이 없다. 신앙 성장은 본받음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이룰수 없다. 많은 지식의 공유는 있을지라도 오감과 마음과 영혼의 만남은 힘들다. 온라인은 인본주의 특징을 거의 다 갖고 있다.
만남의 선택이 자기중심이며 언제라도 만남을 끊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신앙의 깊이와 연단을 이루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 실체 없는 가상현실만 존재함으로 오히려 보이는 온라인 접속이 많을수록 이것에 익숙하게 되고 더 큰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외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 어렵고 진솔한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접속만 많고 접촉이 없는 시대
이런 온라인에 익숙하면 사람의 영혼은 고갈될 가능성이 많다. 접속만 많고 결국 접촉 없는 죽은 신앙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영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칫 서서히 영혼이 죽어 갈수 있다. 몸이 없는 지식공유만 이루게 된다. 전인성이 사라지고 인간성은 점차 파괴되게 될 것이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역할의 도구로서 필요하지만 그것은 제한적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거의 온라인을 통하여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온라인에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직접 만남에서는 적응이 힘들고 참고 인내하는 능력이 약하다. 결국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인성과 영성과 관계성과 오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것은 기계의 접속으로는 이룰 수 없는 영역이다. 직접 대면하여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온라인으로는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기 어렵다. 무리는 많아질지라도 제자가 되기는 어려운 구조를 안고 있다. 자칫 값싼 복음을 전하는 위험한 신앙을 전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특히 젊은 세대에 복음의 진수를 만나게 하는데 한계점이 있다.
주님을 닮으려면 환란.인내.연단.형제우애.덕.절제.사랑을 배워야 하는데 (벧후1:5~7) 이것이 온라인에서는 거의 힘들다. 지식적인 종교인은 될지 몰라도 산제물이 되기는 어렵다. 이런 면에서 지금 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면 된다.
영과 육이 분리되는 신앙 - 홀리택트로 접촉하라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사회는 접촉이 없는 접속으로 사는 세상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상현실이 주를 이루면서 영지주의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것은 헬레니즘의 특성으로 영과 육을 분리하는 모습과 같다. 온라인의 세상은 더욱더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분법의 세계를 가속화 시킨다. 이런 점에서 온라인으로 전하는 설교나 말씀은 한계를 지니고 있고 자칫 위험한 영지주의 신앙으로 나갈 위험이 있다. 온라인에만 의존하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된다.
영과 육이 분리되는 영지주의 현상이 지금 온라인을 타고 교회 속으로 밀물처럼 들어오고 있다. 이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면 신앙은 급격히 약화되고 결국은 교회의 위기는 심해질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기에 막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컨택트의 비대면을 쫒기 보다는 거룩한 홀리택트 접촉이 필요하다. 그럴수록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교회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제는 대중적인 모임이 아닌 소모임과 무리가 아닌 제자로, 숫자 보다는 질적인 부분에 방향을 정하고 거룩한 만남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제 2의 종교개혁은 몸의 신앙이다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인 1-11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후에 이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면서 핵심 주제는 거룩함에 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한다. 거룩한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다. 종교개혁에서 강조한 것은 롬 1:17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로마서 12장 이후에 나오는 거룩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미약했다. 이제 지금 우리의 과제는 롬 12장 이후의 삶의 부분을 어떻게 믿음으로 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 2의 종교개혁은 롬12:1-2의 내용을 실천하는데 있다.
지금까지 종교개혁에서는 주로 영에 대한 부분이었고 믿음에 대한 강조였다면 이제는 그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몸에 대한 부분이고 영적 예배에 대한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보통 예배를 말할 때는 예배당중심의 공간적 예배였다면 이제는 영적 예배의 의미인 삶의 영역에까지 나아가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영과 마음과 몸이 통합된 인격적인 예배를 말하고 있다. 특히 몸을 강조한 바울의 메시지에 방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