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문철영목사] 비용의 계산_눅 14:25-33

  • 입력 2022.08.29 22:16
  • 수정 2022.08.29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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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도 성령강림절 열넷째 주간

 

1. 비용의 계산 (눅 14:25-33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미국의 코넬대 인간 생태학교수 칼 필레머는 “내가 알고 있는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라는 책에서 노인의 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1,500명이상의 65세이상의 노인들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점이 무엇인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있지도 않은 쓸데없는 일에 걱정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날에 걱정하며 낭비한 시간이 많았다는 점이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믿고 확신하는 것보다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다는 데 공감이 됩니다.


"가족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가족 부모나 처자나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려는 자에게 가정을 파괴하고 소유를 버리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치루어야 할 비용계산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성취를 위한 것인가? 부르신 자의 목표 성취와 관련된 조건인가?

먼저 망대 건설자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하는 일이 망대건설을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계산하는 일입니다. 망대 건설에 소용되는 비용 계산이 다 끝난 후에 그가 망대 건설에 착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망대 건설에 동원된 근로자 개인의 성취를 위한 계산인가 아니면 망대 주인의 목표 성취와 관련된 것인가? 앉아서 비용계산이 끝날 때까지 주인은 건설사업을 착수하지 않을 것은 망대의 준공 여부가 망대 주인의 명예와 수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만 군대를 가진 임금은 2만 군대를 가진 임금과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에 전쟁을 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논의를 거친 후에야 전쟁을 하든지 화친을 하든지 결정을 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장수 개인의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할 이유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할 최고 통권자인 임금의 명예와 수치에 관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 이야기를 분석해 볼 때에 망대 주인과 국가의 통수권자 임금이 먼저 앉아서 계산하는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시한 조건은 제자 개인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펼치시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자신의 명예와 수치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성취될 것인가 아니면 중단될 것인가가 주님의 명예와 수치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자로 부름받아 능히 잘 감당하는 자가 되든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든지는 내 개인적인 성취 여부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불명예가 될 것인지와 더욱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자된 우리들은 주님의 비용계산서를 받아 들여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용계산은 주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긍정적인 표현이 아닌 부정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비용을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용의 내용을 보면 가족을 덜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상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족의 일보다 주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비용계산은 누가 하는 것인가?

겉보기에는 우리가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망대 공사 준공되기까지 계산하는 자가 망대 주인과 전쟁을 벌이는 임금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예수님과 동일시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제자를 부르는 것은 비용계산을 모두 끝낸 후에 공사 준공검사와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결과를 알고 계신 예수님은 왜 제자를 부르고 있는가?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지 아닌지가 그 영광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 지의 기준이 됩니다. 지난날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우리는 늘 근심과 염려 속에서 주님을 따라왔으나 여전히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습니다.

염려하고 계산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므로 계산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결과가 승리임을 확신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최후승리에 동참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따를 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결과는 완성이요 승리인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서 필요한 것은 주님이 계산한 비용을 지불할 믿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2. 제자가 치루어야할 비용 (눅 14:25-33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오늘은 예수님께서 따라오는 많은 무리들에게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고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의 조건을 얼핏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먼저 부모나 형제나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제자의 조건이라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가족 관계에서 중요한 위치가 되는 부모 형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고 하는가? 그리고 자기의 소유를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기의 소유를 버리라고 하는가?

이 부분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상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가정을 파괴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존의 가족 시스템 안에 진정한 나의 영혼과 자아를 얽어매고 부자유하게 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족 파워입니다. 어느 가족이든지 가족 안에 파워를 가진 자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 가족 파워는 외부의 세력이 들어오면 방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기존 가족 파워에 도전을 주는 일이 생길 때에는 그 방어 기재가 작동할 것입니다. 기존의 가족 파워가 예수믿는 자를 핍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파워의 중심인 예수님과 관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족 구성원 부모 형제 자기를 미워하라는 것은 가정의 파괴자로서 자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파워시스템인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가족 시스템에 충성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 기존 가족 시스템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존의 가족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기존의 체제에 예속된 신분으로서는 새로운 가족 시스템을 건설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6-27).”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자들로 하여금 왜 기존의 가족가치에 도전적 입장에 서게 하는가? 기존 가족의 시스템에 파괴적인 요소가 때문입니다. 그 파괴적 요소는 사람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요소입니다. 그리스도는 그같은 파괴적 제도에서 우리의 자아와 영혼이 자유함으로 구원 얻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자유케 된 우리의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28절).” 주님의 제자에게는 반드시 치루어야 할 비용과 댓가(cost)가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비용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 비용을 치룰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토기장이 하나님 (렘 18:1-11 찬송가 525장 돌아와 돌아와)


예레미아의 예언적 사명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나라를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일을 하게 할 뿐만 아니과 나라를 건설하고 심는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2:10).”

이 점이 자신을 부르시는 순간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어린아이라고 하였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국가를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그리고 건설하고 심는 이야기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찾아간 곳은 진흙으로 만든 토기를 녹로에서 굽어 내는 일을 하고 있는 토기장이의 집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관찰해볼 때 토기장이가 먼저 하는 일은 그가 만들던 토기를 부수어버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힘들여 빚었던 토기라도 토기장이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산산조각이 나도록 깨트려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서진 진흙을 새로 빚어서 녹로에 넣어 굽어 냅니다. 토기를 파괴하고 난 후에 다시 건설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파괴되고 전복되기도 하지만 다시금 세워지고 심어지는 것이 국가라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토기장이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부서지기도 하고 다시 빚어지기도 하는 토기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뽑히지 않고 건설되고 심겨지는 국가에 속한 자가 될 것인가? 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7-8).”

 

4.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시 139:1-6, 13-18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저자인 다윗은 자신이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는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에게 현실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실제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현실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에게서 라기보다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로부터 였습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19-20절).” “그들은 나의 원수니이다(22절).”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피하려는 노력하는  저자가 왜 하나님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하고 있는가? 그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그리고 스올에서 자리를 펼지라도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고난 가운데 의지할곳 없어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을 바로 그가 부르짖고 있는 고난의 현장에 계신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가 피할 곳을 찾는 곳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오장육부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여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3-4절).”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3-14절).”
그렇다면 이같은 깨달음의 복을 저자가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 자신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서 도망하는 신세가 된 비참한 자리에서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는 기도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7-18).”

 

5. 바울에게 빚진 빌레몬 (몬 1-21 찬송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복음을 전하던 중 투옥되었던 바울은 당시 많은 종을 두고 있었던 부자 빌레몬에게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난 후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집을 예배공간으로 허락하였던 인물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한방을 사용하게 된 죄수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름 아닌 빌레몬의 집에서 종으로 있다가 죄를 짓고 감옥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이름이 오네시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부탁하여 이 오네시모를 예전처럼 조건없이 종으로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가 혹 빚진 것이 있으면 바울 자신에게로 계산을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17-18).”

그리고 난 후에 “내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자 빌레몬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까지 온 가난한 복음전도자 바울에게 빚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이 그것은 말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분명히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서 빌레몬이 인건비가 모자라 빌렸는가? 아니면 사업 중에 돌릴 자금이 모자라서 바울에게 빌렸는가? 전혀 아닐 것입니다. 바울에게 빌레몬에게 빌려줄만한 그같은 물질은 없었을 테니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진 것은 무엇일까?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것이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진 것입니다.

빌레몬이 영적 은혜의 부를 바울에게서 빚진 것임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빚을 바울에게 계산하라는 것은 빌레몬이 바울로부터 받은 영적 구원의 빚이 그의 종 오네시모가 그에게 빚진 것보다 훨씬 값비싼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예전처럼 받아들일 것을 부탁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의 오네시모가 예전의 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하였으나 이제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일반인으로서 부도덕과 불법으로 살았던 오네시모가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도덕적이고 준법적 인물로 바뀌어진 것을 바울은 확실히 추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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