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성령강림절 열일곱째 주간

 

1. 거지 나사로 (눅 16:19-31 찬송가 585장 내주는 강한 성이요)


부잣집 대문 바로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대문 밖에 버려진 채로 있었는데 그가 살다가 먼저 죽고 나중에 부자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이야기가 되어지는 가운데 사후에 부자가 불꽃튀는 음부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까 바로 금방이면 갈 수 있는 지척의 거리인데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행복하게 안겨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도 있고 모든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본인은 갈 수 없어도 나사로가 와서 필요한 것을 가져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다가 혀를 서늘하게 해 줄 수 없는까요?
아브라함은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갈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느니라” 금방 달려갈 수 있고 지척의 거리 같은데 그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구렁텅이만 없다면 왕래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렁텅이 때문에 물방울을 찍어 보낼 수 없다고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구렁텅이는 어떻게 생긴 것인가?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 구렁텅이를 만들어 놓은 것인가? 우리 인간은 운명적으로 지옥과 천국으로 갈 것이 결정되어진 것인가? 우리도 당연히도 천국과 지옥 그리고 구렁텅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새로운 내용이 보입니다.
이 구렁텅이는 지상에 사는 동안에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만들어진 담이 출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던 부자와 나사로였지만 나사로와 부자사이에는 담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사로가 배고파 주린 배를 채우려고 할 때 개가 먼저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먼저 먹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면 개가 물어뜯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에게 다리 상처가 났습니다. 그런 나사로 그의 상처난 곳을 개가 혀로 핧아요.
그런 사이에 부자는 호화로이 부를 누리고 살았던 반면에 나사로는 부자집 앞에 살지만 소외감을 느끼고 벽을 느끼고 부자를 만나고 싶어도 주인되는 부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부자가 대문을 들락날락할지라도 부자의 눈에는 나사로가 보이지 않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지상에서 특권의식과 부와 높은 직위와 부를 누리고 살지 모르지만 부자는 자신이 누군가와 담을 쌓고 산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경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실 때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 구절 바로 다음에 오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가까이 살지만 담을 쌓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갈 수 없는 구렁텅이를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인가? 작은 담이 샇여서 다음 세상까지 연결된다는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상에사는 동안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만들어진 담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 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사후 세계에서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만들어진 큰 구렁텅이는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나사로에게 수많은 갑질로 인해 쌓인 담의 결과입니다. 개구리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툭툭 차고 개구리를 가지고 장난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구리가 당하는 고통은 엄청난 것입니다. 가진 자는 말과 행동을 습관적으로 할지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 측에서는 마음에 칼이 될 수 있고 생명에 위협이 될만한 엄청난 압력일 수 있습니다. 부자의 갑질은 이웃이 접근할 수 없는 담이 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집착이 그 출발입니다. 이 집착에 빠지면 이득을 계산하는 일을 먼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돈과 관련해서 이득이안되는 경우에는 배제시키고 소외시키고 살생부에 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자기에게 성공이고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을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한번은 떠나야 하는 운명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사로가 죽고 나중에 부자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간 곳이 불꽃이 튀는 음부였습니다. 부자에게 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누가 나에게 물한 방울 줄 수 없는가? 하는 데 그 앞에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물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 저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내 혀를 서늘케 하면 안 될까요?
그 때 아브라함은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가까운 거리처럼 보이는 데 그 사이에 구렁텅이가 있어서 오고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구렁텅이만 없다고 한다면 고통의 순간 물 한 방울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부자가 갑질할 때 쌓여진 담이 이 큰 간격의 구렁텅이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이 중요하고 내가 중요하고 어떻게 하면 남을 누르고 내가 잘되어 보려고 하는 욕심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매번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회개하고 쌓이는 담을 하나씩 제거하고 이웃과 가까워 지는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사후에 있을 구렁텅이를 제거하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을 돌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사후에 구렁텅이가 생기지 않도록

이웃을 사랑하라


이 순간 부자는 처음으로 이웃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표현을 합니다. 생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그가 그 아우들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내 형제들이 이 고통의 자리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어 주소서 합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은 거기에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무엇이라고 합니까?“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서 가서 이야기해도 그 말을 듣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알려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지상의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오늘날 성경을 설교하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죽은자가 깨어나서 가도 경고를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말씀을 듣고 이웃과의 담이 허물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웃과 사랑의 표현을 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의 품과 간격이 없어지기 바랍니다. 구렁텅이 없어져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품에 갈 수 있기 바랍니다. 훗날에 우리의 영혼이 기쁨과 감격의 순간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2. 지상에서 만든 간격 (눅 16:19-31 찬송가 538장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부자와 나사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라고 이름하는 거지는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문 앞에 있던 나사로도 그리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던 둘은 죽은 이후에 서로 왕래할 수 없을 만큼 가장 먼 간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위치에 있던 그들이 왜 왕래할 수 없는 먼 거리의 간격을 두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가?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은 아브라함의 품이었으나 부자가 들어간 곳은 불꽃이 타오르는 음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간 아브라함이 있는 곳과 부자가 간 음부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간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 있는 큰 구렁텅이는 어떻게 생긴 것인가? 그것은 부자가 지상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부자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서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율법과 예언서를 듣기 싫어한 이유는 그가 이기심에 사로잡히는 이기적 집착 때문입니다. 이기적 집착이 발동하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가까운 지점 대문 앞에 버려져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살피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후에 그가 불꽃속에서 신음하는 자리에서 지상의 형제들은 그곳에 오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여 나사로를 지상에 살고있는 형제들에게 보내어 자신이 고통받은 그 곳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와 부자 사이의 

구렁텅이는 부자 스스로 만든 것


지상에서 생존할 때에 부자가 율법과 예언서 그리고 이웃에 대해 가진 무관심은 이 생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후에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자기 집착적 이기욕은 사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도달할 수 없는 큰 구렁텅이로 됩니다.
어떻게 하여야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에 갈 수 있는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예언서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31절).”


3. 피난처 (시 91:1-6, 14-16 찬송가 585장 내주는 강한 성이요)


오늘 본문 속에 시인은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든 새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원수들의 공격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의지할 사람이나 처소를 발견하지 못하여 몹시 당황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원수들보다 더 큰 적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밤에 찾아오는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같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그가 신뢰하고 숨을 곳을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곳에 피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피신한 곳이 어디인가? “지존자가 계신 은밀한 곳”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2-3절).”
그렇다면 지존자가 계신 집에 살고 있는 자는 어떤 유익을 얻고 있는가?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을 받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공격에 에워싸여 있을지라도 지존자의 계신 곳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날개아래 숨은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하지 못하리로다(7절).”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8절).”
게다가, 지존자의 집에 사는 자는 간구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절).”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6절).”


4.구속의 약속 (렘 32:1-3, 10-16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29장에서는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가는 백성들에게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손자를 볼 때까지 그곳에서 번성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벨론 포로의 기간이 짧은 기간이 아니라 생각보다 길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로 기간이 길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예레미야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징표로서 성전이 포위된 상황에서 증인을 세워 베냐민 지파 땅을 은으로 샀던 것입니다. 포로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고 예언한 예레미야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징표로서 베냐민 지파의 땅을 사게 된 것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자기 백성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비참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 백성들을 구속하신다는 약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백성들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렘 32:44). 단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반드시 돌이키겠으나 그 기간은 단축되지 않고 길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 백성이 돌아올 것인가? 일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에게 부르짖고 기도하면 응답으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2-3절).”


5. 믿음의 선한 싸움 (딤전 6:6-16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왜 믿음에서 떠나는가? 그들이 미혹을 받아 돈을 탐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돈을 탐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필라르구로스(φιλάργυρος)”입니다. 이 말은 친구를 의미하는 “필로스”와 은을 뜻하는 “아르구로스”의 합성어입니다. 필로스는 친구간의 사랑 또는 희생적인 사랑의 의미를 다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을 가까이할 뿐만 아니라 돈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룰 정도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초월하는 삶을 사는 신앙생활은 어떤 것인가? 자족한 마음을 가진 경건입니다. 이 자족하는 경건 신앙은 신앙생활의 표준잣대입니다. 이 잣대를 넘어가는 것은 시험과 올무에 빠질 위험성에 많이 노출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절).”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 세상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피할 것과 따라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피해야 할 것이 욕심을 부추기는 물질 사랑이라면 따라야 할 것은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그리고 온유입니다. 이같은 분별력을 가지고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싸우는 일입니다. 헬라어로 싸우다는 말은 아고니조마이(ἀγωνίζομαι)로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투쟁한다” 또는 “적들과 겨룬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희생도 치루겠다는 전투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11-12절).”

믿음을 짘기 위해서는

투쟁하고 싸우는 자세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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