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성령강림절 열아홉째 주간 

1. 치료받은 문둥병자 (눅 17:11-19 찬송가 67장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비록 내 기억력이 거의 상실해 가지만 두 가지 사실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요. 하나는 나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신 위대하신 구주라는 사실이지요." 이 말은 늙어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주변에서 은퇴를 권하였더니 대답을 하신 성공회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파란곡절이 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6세에 어머니를 여위고 10살까지만 학교를 다닌후 10대 소년 시절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선원생활을 하며 나쁜 짓만 골라서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는 노예가 되었고 그 다음에 노예선을 운반하는 선장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유명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시한 존 뉴톤(17025-1807) 신부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가? 독실한 기독교인 메리 카틀렛이라는 아가씨와 결혼한 덕분에 기도하는 아내에게 감동되어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신학수업을 마친후에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문둥이 촌에서 부정한 문둥이로 평생 낙인찍힌 인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치료받고 이방인들인 우리에게 구원의 모델이요 성직자의 모델이 된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마을에서 만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10명의 문둥이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때 예수님이 가까이 가서 보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사장에게 가던 10명 중 한 사람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구원의 모델이요 대제사장에 속하는 성직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돌아온 그 치료받은 문둥이가 구원받은 것은 납득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근거인가?

예수님의 명령대로 길 가다가 10명 모두 다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문둥이로 평생살아온 그들의 몸에 새 살이 나고 물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에게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친구들도 만날 수 있고 사회활동을 정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을 만나고 절차를 따르면 그들에게 그동안의 눈물 아픔 소외감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 수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 현실로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나라의 전통은 문둥병에 걸렸다가 깨끗해져서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진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 때에 제사장에게 가져가는 예물이 있고 제사장이 정결케하는 예식을 7주일간 진행한 다음 제사장의 최종 선언이 있은 후에야 사회복귀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4장 2- 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2-4절)”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5-8절).”

깨끗해진 문둥병자가 사회복귀를 위해서는 제사장 앞에서 예물을 가져온 후에 7주일간의 예식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 때에 7주일은 제사장이 문둥병자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검정하는 데 필요한 기간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돌아온 자는 제사장에게로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왔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예수님께 감사한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132:7)”

하나님의 발등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성소에 있습니다. 백성들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백성들은 성전 뜰에서 제물을 제사장에게 바치면 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갑니다. 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은 대제사장입니다.

말씀의 궤가 있는 시온소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대제사장입니다. 모든 제단에 양과 소의 피를 뿌려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다 드린 후에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최종으로 가는 장소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 하나님의 발등상이 되는 속죄소, 시온소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발앞에 무릎을 꿇은 치료받은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발등상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납득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등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일은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2. 감사를 아는 사람 (눅 17:11-19 찬송가 327장 주님 주실 화평)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 한 마을을 지나가던 예수님은 멀리서 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치는 10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선언하시기를 “가라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들에게로 가는 중에 자신들의 몸을 본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인즉 수년 동안 고통거리가 되었던 피부가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치료받은 사람 10명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그는 누구인가?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올린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 이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광돌리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와 감사를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문둥병들에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평생동안 부정한 자로 격리상태에서 살아야 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지성소에서 제사를 올리는 일을 하는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중에서 거룩하게 성별된 레위지파가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오직 유대 레위지파에서 뽑힌 자만이 될 수 있는 대제사장 자리에 이방인의 뜰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아홉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감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시 66:1-2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공동체 감사 시로서 이 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이름에 영광의 찬송을 돌리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온 땅에게 주를 경배하고 노래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시인은 온 세상에게 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자랑하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시인과 백성에게 그 일은 너무나 놀랍고 기적적인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5-6절).”

시인은 문자적으로라기보다 상징적으로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구절입니다. 이 시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고로 이 시의 청중들인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제 2의 출애굽을 경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2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이름의 권능이 역사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벨론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벽은 물과 산이었습니다. 그 곳에 바다를 메우고 산을 깎지 않으면 예루살렘까지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강을 육지되게 하고 산을 깎아 골짜기를 메우는 일은 백성들에게 불가능으로 보였으나 하나님은 그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이요 기적의 일입니다.
이 같은 이유로 시인은 백성들 모두가 다 나와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온 땅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8-9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10-12절).”

 

4. 바르게 해석하는 율법 (렘 29:1, 4-7 찬송가 200장)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가 정복당하고 왕과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1차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후에 남아있는 귀족들에게 예레미야는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왕과 귀족들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선지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왕의 귀에 거슬리는 말보다는 즐겁게 하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심으로 예루살렘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그 때 선지자 하나냐에 의하면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왕과 귀족들에게 잠시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을 것이나 2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28;11).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그들에게 편지로 보내고 있습니다.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가면 그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기간은 그곳에서 자녀들이 결혼하여 손주를 보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포로생활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장기체류할 준비를 할 뿐만 아니라 그곳 정부가 평안하기를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5-7절).”

놀라운 사실은 왕과 귀족들은 나라가 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메시지보다도 다른 선지자들의 메시지 듣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레미야와 달리 선지자들은 왕과 귀족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지 않고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나 상황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왕과 귀족들의 죄를 지적하지도 않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하는 메시지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8-9절).”

그렇다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참 예언자인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분간할 수 있는가? “예언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비”는 “미래를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토라(모세 오경) 곧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전한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게 해석하여 그 시대의 지도층과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5. 충성스럽게 따라야할 복음 (딤후 2:8-15 찬송가 529장 온유한 주님의 음성)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 1-2절에 그 메시지의 핵심이 있습니다. 전해 들은 복음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해 들은 복음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매내오와 빌레도의 가르침이 문제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무엇이 문제인가? 부활진리가 전해 들은 것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이들이 사후에 영혼만의 영생 복락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개인의 영혼 구원에 대한 집착은 있으나 변화된 몸의 부활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사후의 영혼의 영생 뿐만 아니라 변화된 몸으로 부활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후매네오와 빌레도는 미래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전통을 무시한 부활에 대한 이들의 이단적 사상은 교회 안에서 여러 신도들에게 악한 창질처럼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때문에 바울은 전해 듣고 전하여 교회의 기초가 된 복음 진리가 왜곡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복음 진리의 기초가 되는 부활 교리는 전해 들은 대로 그대로 믿는 것이 교회의 건강에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로부터 전해 들은 복음 진리를 어떻게 파수해야 할 것인가?

좋은 병사는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운동선수가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경기의 법을 지키는 것처럼 복음의 경주자는 복음 진리에 대한 성실성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복음 진리를 전해 받은 우리가 진리를 충성스럽게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충성스런 자들에게 그 복음 진리를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달받은 복음의 진리를 충성스럽게 지키지 않고 진리에서 빗나간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빼앗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1-2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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