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5)
그동안 우리 앞에는 다양한 지도자들이 지나갔고, 많은 교훈을 남겼다. 지금도 각 정당들은 차기 총선을 의식하여 여러 가지 셈법들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이즈음에서 크리스챤으로써 우리는 ‘과연 성경적 리더십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20세기 초. 불붙기 시작한 남극탐험 경쟁에서 3사람의 탐험대장이 보여 준 리더십은 우리가 꿈꾸고 기대하는 참된 리더십에 대하여’ 숙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 아문젠(놀웨이. 주도면밀한 지도자)
그는 최초의 남극점을 정복한 탐험가로써 주도면밀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그의 계획은 매우 디테일하였다. 사전에 북극 에스키모 생활을 연구하여 복장을 순록가죽으로 하였고, 이정표를 설치하면서 전진하여 돌아오는 길에 위치를 식별하도록 했고, 원활한 식량 조달을 위하여 말 대신에 50여 마리 개로 썰매를 끌게 하면서 틈틈이 부족한 식량으로 삼기도 하면서 탐험에 성공하였다.
* 스콧(영국. 무모한 지도자)
그는 귀족 출신으로 영웅 지향적 리더십 소유자였다.
그는 본 목적인 탐험 외에도 반대 급부 등의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정복 목표를 위하여 대원들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지만, 아문젠에게 최초 정복자의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선배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준비가 부족했음에도 밀어 부치 듯 강행한 탐험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대원들은 지쳐 버렸고, 혹독한 추위와 허기로 돌아오는 길에 9개월간의 연락이 두절된 후, 자신을 포함한 대원 전원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열정과 용기는 있으나 무모했던 리더였다.
* 섀클린(영국. 희생하는 인간미 넘치는 지도자)
(1) 우선적 가치에 헌신하는 리더십.
그의 탐험대는 목표지점 불과 150여 키로 앞두고 부빙(浮氷)에 부딪혀서 파손되었다. 무려 500여일의 표류 끝에 무인도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눈앞의 남극 정복의 목표를 과감히 포기하고, 목표를 대원 전원 구출로 바꾸었다. 이제 그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남극 정복이 아니라, 대원들의 소중한 생명이었다. 그는 기지에 구조를 요청하기 위하여 무인도에 대원 22명을 남겨 두고 5명이 6미터 구명보트를 타고 1000Km의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하여 도끼 한 자루와 로프 하나를 의지하여 해발 3000Km의 얼음산을 넘어서 기지에 도착하였다. 조난 신고를 받은 칠레가 구조선을 급파함으로써, 근 2년 만에 전원 무사히 생환되었다.
대원들은 책임감과 무(無)권위, 솔선수범. 긍정적 사고를 가진 대장을 절대 신뢰하고 있었으며, 구조선이 도착할 때까지 팽귄, 돌고래 수천마리를 잡아먹으며 버텼다고 한다. 그는 우선 가치에 자신의 정복자의 꿈을 과감히 버릴 줄 알았던 인간미 넘치는 참 리더였다.
(2) 수평적 리더십(희생하는 리더십)
몇 가지 일화에서 그의 리더십이 상하식이 아닌, 수평적 리더십이었음을 알게 된다.
* 영하 70를 오르내리는 혹한에서의 침랑은 생명 유지에 필수품이었다. 침랑 분배를 놓고 그는 대원들에게 사기(?)를 쳤다. 즉 좋은 것은 일반 대원들에게 나눠 주고, 불량한 것은 섀클린을 포함한 간부들의 것이 되도록 사기(?)를 친 것이었다.
* 식당에서의 음식 나르는 일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혹 자신의 식단이 다른 대원들과 다른 것을 알게 되면 굉장히 싫어했다.
* 추위에 떨고 있는 대원을 위해 자신 몫의 우유를 제공하고는 주변에게는 비밀에 붙이도록 하였다. 그는 리더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후로 그에게서 리더십을 체득한 대원 중에서는 대학 총장이 2명. 국회의원 1명 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남극 정복에 실패했으나 ‘아무도 그를 실패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마치 오산학교 남강 이승훈 교장 선생님이 떠올리게 된다. 겨울 기숙사 화장실 오물을 깨트리는 작업을 힘들어하는 사찰에게서 도끼를 받아 들고는 입으로 튀는 오물을 퉤! 퉤! 하면서 깨트려 마당에 널려 놓는 교장선생님을 모든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불신자들도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 사상가 함석헌 선생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주님은 막 10:45에서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혀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하심으로써 자신의 존재의미가 곧 희생과 헌신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우리 주님은 세상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그 분을 실패자로 부르지 않는다. 우리 예수님 실패는 ‘위대한 실패’였다.
우리는 각종 통계가 말해 주듯이 코로나를 통과하면서 위기의식이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현 상황에 맞게 전도 전략도 수정과 보완을 서두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참고해야 할 아주 중요한 시대적 요구가 있다. 우리 역시, 세상으로부터는 ‘희생하는 리더십’을 요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