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독립운동의 정신을 끌어올린 마로덕 선교사

  • 입력 2024.03.14 11:35
  • 수정 2024.03.1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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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56)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68)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전 강서대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전 강서대 총장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아마르트)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라도나이 아도나이 아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토바티 발 알레이카) 하였나이다”(16:2).

인생을 산다는 것은 과거를 빨리 잊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과거의 좋지 않을 추억과 일은 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일이나 사람을 통해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지혜를 얻고 또 실패의 원인을 살피고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고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면서 되돌아보면 아쉬었던 순간들이 있다. 성경은 그러한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지혜를 준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이르부 아쩨보탐 아헤르)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마하루 발 아시크 니스케헴 미담)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우발 에사 에트 세모탐 알 세파타이)”(16:4). 인생의 실패는 하나님을 믿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비록 우리 인생이 성공을 하고 물질적 축복과 사회적 높은 위치에 올랐다 해도 하나님이 없는 출세는 짧은 영화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 이름도 부르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6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산업, 잔의 소득, 분깃을 지키겠다고 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아도나이 메나트 헬레키 웨코시 아타)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토미크 골라리)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하바림 나페루 리 바네이밈)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아프 나하라트 샤페라 알라이)”(16:5-6). 그래서 이 시인은 자신의 받은 하나님의 청지기 일, 거룩한 직업, 성직, 가업, 또 그 기업을 감사하며 수행하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감탄하고 있다. 이 시편 16편은 개인 탄식시에서 나온 확신의 시편으로서 궁켈은 시편 11, 16, 23편이 바로 이 확신의 시편이라고 말한다. 이 시편에서 시편기자는 자신의 확신, 하나님이 악으로부터 구원하고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며 그는 이를 개인 탄식시의 불평의 요소들을 들어서 설명한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키 로 타아조브 나프쉬 리쉐올)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로 티텐 하시드 리레오트 샤하트)”(16:10).

이 시편은 11, 16; 23; 27:1-6; 62; 132편이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의 시편으로서 지혜와 토라 시편, 역사 시편, 성전 입장의식 시편, 순례 시편들이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시편 129편은 공동체 확신 시편으로서 공동의 감사시편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편 16편은 개인 탄식 시편의 모습으로 나타나 확신의 시편으로 나간다. “다윗의 믹담(미크탐 레다위드, 다윗의 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샤메레니 엘)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키 하시티 바크)”(16:1). 이 세상의 무지막지한 조직의 함정에서 구원함과 그 파멸케 하는 파벌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손길이다. 이는 다니엘이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리케도쉼 아세르 바아레츠 헴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웨다디레 콜 헤페찌 밤)”(16:3). 이처럼 개인 탄식시와 확신의 시편(4; 27; 11; 23; 62편 등)이 확신의 특징을 가지며 하나님이 3인칭으로 표현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토디에니 오라흐 하임)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소바 세마호트 에트 파네이카)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네이모트 비미네카 네짜흐)”(16:11).

그래서 시편 16편에서 시인은 훈계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고 밤마다 내 양심이 교훈한다고 말하며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모신다고 고백한다(16:7-8). 그래서 편안한 인생의 항구로 간다고 말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라켄 사마흐 리비)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와야겔 케보디 아프 베사리 이스콘 라베타흐)”(16:9). 또한 왕정 시편으로서 다윗의 왕의 고백과 왕의 신앙을 보여준다(존 데이 88, 크로포트, 3; 5; 7; 9/10; 16-17; 22; 23; 26-28; 31; 38; 40; 44; 55-57; 59-63; 66; 69-71; 92; 94; 116; 118; 138-143 ). 이러한 탄식에서 시작하여 다윗 왕의 믿음으로 나타나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으로 확신적인 시편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의 획을 바꾸었던 선교사님의 삶속에서도 보여진다.

올리버 맥커첸 (Luther Oliver McCuchen, 마로덕(馬路德)) 선교사는 1901년 선교사 파송받아 전주 선교부에 독신으로 부임하였다. 후에 1908년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한 배화여고 요세핀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설립한 삼례교회에 부임하여 최대진 조사를 대동하고 삼례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때에 김현식, 정찬신, 김계홍 등이 예수를 믿기로 하여 장경태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삼례 교회가 시작된다. 19059월 장경태는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 뜻으로 아동교육을 생각하고 기독 영흥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기관은 1909831일 학부대신 이재곤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영신학교가 1909년 개칭되어 최동만, 박석순, 김판암, 김계홍 등 10명이 첫 공부를 하게 되었다. 김계홍은 1911년 삼례교회의 목사가 된다. 이때 삼례교회는 한국 역사에 크게 알려진 목사들이 거쳐갔다. 김인전 목사는 성경 공부 시간에 300-5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성경 강해를 듣고 은혜를 받게 하였다.

그는 1919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에베솔(Eversole Finley Monwell, 여부솔 1912-1930)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해로 망명하게 되었다. 마로덕 선교사는 전주에서 활동하면서 신흥학교 교장을 지내며 감옥에 갇힌 학생들의 석방 운동을 벌이였다. 김인전 목사는 망명 후 상해 임시 정부의 홍보, 재정, 외교 등의 요직을 맡아 임정 요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의정원 의장이 되어 해외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김인전 목사가 당회장으로 있었다.

마로덕 선교사와 대한민국 대표적 애국지사 김인전 목사
마로덕 선교사와 대한민국 대표적 애국지사 김인전 목사

삼례교회의 김성배 목사는 할아버지가 삼례교회의 첫 신자인 김헌신 영수의 아들 김창언이었고 그 손자 김성배, 김춘배, 김형배 목사의 가족들이었다. 김성배 목사는 가족을 데리고 1917년 만주 용정 천보산으로 이주한다. 김창언은 용정에서 포목 장사를 하며 그 슬하의 3형제는 홍범도 부대의 입대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한다. 김성배는 3년간 독립군으로 싸우다 석탄골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독립군 활동을 중지한다. 그래서 김성배 목사는 목회자로서 활동하며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평양신학교(25회 졸업)에서 공부하고 여러 교회를 설립한다. 마로덕 선교사의 영향은 중앙대를 설립한 임영신여사에게도 그 영향을 준다. 또 맥커첸 선교사의 영향으로 예배당의 남녀 구분을 하여 예배드리던 것을 헐고 통간 예배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한다(1920. 7.5일 삼례 교회).

마로덕 선교사는 유교의 유생들에게 영향을 주어 삼례 교회로 전도하게 되었고, 전북 동북부 지역에 선교 활동을 크게 한다. 그의 선교 활동으로 제내 교회, 봉상교회로 복음이 확대되고 익산으로 전개된다. 김성식 목사, 김현경 평신도 활동하며 교회를 키운다. 맥커첸의 선교 활동은 일제의 제국 정책의 장벽에 부딪히지만 그래도 학습과 세례를 받은 오기영 장로는 극적으로 감옥에서 살아남아서 그 서원한 대로 목사가 된다. 그는 53세 신학을 하여 늦게 목사가 되어 고향 교회인 봉상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마로덕 선교사는 1908년 소룡교회를 개척하여 3.1운동을 일으키고 독립운동 지도자를 키우는 사역을 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 한국 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을 가져오는 영적 지도자이자 민족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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