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용 교수】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기독론(삼위일체론과 성령론)의 차이점

  • 입력 2024.04.0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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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50)

이번호에서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차이에 대한 마지막 문제로 기독론(삼위일체론과 성령론 포함)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철저히 비교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독론을 비롯한 삼위일체 신학의 발전과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관한 이론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신약성경 가운데 이 셋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문서는 요한복음 이외에는 없다. 즉 요한계시록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문서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언급하지만 각기 거의 관련성이 없는 개별적인 언급으로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삼위일체신학의 완성이자 성경 전체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책이다. 이를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주후 1세기 메시아 대망에 있어서 남왕국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유다 지파(지연), 다윗의 혈통(혈연)으로 오신다고 믿었다. 이를 잘 대변해 주는 대목이 남왕국 전통에 속하는 마태복음(1:1-17)과 계시록(5:5; 22:16)이다. 이것이 아래로부터 기독론’, 즉 예수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인간이지만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2:36)는 것이다.

반면에 북왕국 전통에 속하는 요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안고 오실 메시아는 그와 같은 세상 나라의 지연과 혈연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기독론’(成肉身基督論) 또는 로고스기독론이다. , 요한복음은 기득권()에 속하는 유다 지파나 다윗의 혈통을 철저히 배격하고, 로고스 찬가(1:1-18)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하늘)을 말했다. 비주류인 북왕국 전통은 성육신(로고스) 기독론을 통해 대역전드라마를 이룩했다.

요한복음 8:31-59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에 대한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논쟁은 이에 대한 좋은 실례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을 육적(혈통적)으로 본 반면에, 예수님은 영적(신앙적)으로 본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육신기독론은 양자기독론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대역전 드라마의 완성적 의미를 갖는다.

이 같은 사실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차자 중시의 원리가 기독론과 이어지는 삼위일체론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기독론적 측면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5:5; 22;16))를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은 남왕국 전승인 마태와 누가의 아래로부터 기독론을 이어받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의 성육신 기독론과는 근본적으로 신학적 불일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양서가 동일저자이기 어렵다는 것도 이에 근거한다. 따라서 묵시문학적 발전과정에 이어 기독론적 발전과정 측면에서도 성육신기독론을 말하는 요한복음은 아래로부터 기독론을 기초로 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을 넘어선다.

기독론을 포함한 삼위일체 신학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 전체의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실례가 된다. 주후 1세기 기독교 신학사상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였다. 문제는 하나님은 한 분(一神)이라는 유일신교(Monotheism)를 목숨을 걸고 신봉하는 유대교인들에게는 이신교(二神敎, ditheism)적 주장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 요한복음 5:18이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두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로고스찬가(1:1-18)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여기서 말씀(로고스)이 예수를 말하기에(1:14 참조) 예수(말씀)는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 이 말씀은 예수는 하나님(아버지)과 태초부터 선재하신 아들로서 그의 품속에서 하나님을 보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성부(아버지)와 성자(아들)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요한은 하나님’(θεός) 어휘(83)보다 아버지’(πατρ) 어휘(136)를 훨씬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아들’(υός) 어휘는 55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하나님’(θεός) 어휘를 96, ‘아버지’(πατρ) 어휘 5, 그리고 아들’(υός) 어휘는 8회 나타난다. 계시록에서는 요한복음과 달리 아버지 어휘보다 하나님 어휘를 훨씬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아들 어휘는 요한복음보다 상당히 빈약하게 나타난다. 이는 아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요한복음이 기독론 중심인데 반해, 계시록은 신론 중심이라는 것을 반영한다.

빈도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시록에서는 요한복음과 달리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계시록 35절에서 내 아버지’(명사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고, 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를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5:18; 10:30)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1. 아들의 기능은 아버지의 기능과 하나이다(5:17,18,43; 14:9,10).

2. 아들을 섬기는 것과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하나이다(5:23; 8:19; 14:7,21).

3.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에게 나타난다(1:14; 2:11,18; 4:48,53; 5:36; 6:32,43; 8:21; 21:19). 4. 아버지와 아들은 친밀하다(1:14; 10:15,38; 17:20-23).

5.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도 신적인 존재다(1:1,18).

특히 5장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아들 기독론, 16장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다룬 아들의 영-성령론을 그 신학적 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5장과 16장은 함께 묶어져 삼위일체론을 취급하고 있다. 아들 기독론은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가 된다. 유일신교(Monotheism)에 머물러 있는 유대인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깨닫지 못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약성경 도처에 나타나 있지만(28:19; 고전 12:4-6; 고후 13:13)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곳은 요한복음이며, 그 중에서도 예수의 직접적인 자기계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유대인들과 대충돌을 일으키는 5장이다. 바울서신에서도 예수가 높이 고양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처럼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언명에는 이르지 못했다. 예수는 우리가 믿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성자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다.

요한은 예수가 본래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선재 기독론), 인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진, 즉 성육신한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보냄 받은 보혜사 성령도 앞서 보내진 보혜사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다시 대신 맡아 행하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다. 이 같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 된 사역은 삼위일체론의 근간을 이룬다.

 

2. 한편, 기독론을 포함한 삼위일체 신학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 전체의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실례가 된다. 주후 1세기 기독교 신학 사상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유일신교(Monotheism)를 목숨을 걸고 신봉하는 유대교인들에게는 두 분의 하나님이라는 이신교(二神敎, ditheism)적 주장이라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계시록의 저자가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계시록에서 삼위일체(Trinity)를 강조하는 보캄(R. Bauckham)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보캄은 계시록에 4회 나오는 일곱 영’(1:4; 3:1; 4:5; 5:6)을 삼위일체의 한 분인 성령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나님과 죽임 당한 어린 양 그리고 일곱 영인 성령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함께 경배와 찬양을 받는 분으로, 계시록을 삼위일체 신학적 관점에서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계시록 연구의 권위자인 데이비드 온(D. Aune)일곱 영일곱 천사들로 해석하고 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초기 유대문학에서 영들용어는 드물게 천사들의 동의어로 사용되거나(Jub. 1:25; 2:2; 1 En. 61:12, “빛의 영들”) 또는 다양한 유형의 하늘에 속한 존재들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2 En. 12:2, “하늘을 나는 영들”). 쿰란 문헌에서는 천사들이 영들로 지칭된다(cf. 1 QM12:8-9).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서 1:14에서 천사들이 으로 칭해진다. 계시록 1:4일곱 영3:1, 4:5; 5:6하나님의 일곱 영과 동등하므로 8:2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와도 동일하게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신학적 주장을 하고자 할 때 그 주장이 성경 전체의 신학 사상과 맞아야 한다. 스윈돌 목사가 이미 언급했듯이 요한은 지금 성령이 일곱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오직 한 분이시다(고전 12:13; 4:4). 성경 전체에서 성령은 한 분이시며, ‘일곱 분으로 말한 적이 없다. 계시록의 저자가 이를 어겨가며 굳이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표현했으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특히 계시록의 요한은 숫자 사용에 있어서 숫자 14의 중요성을 말한다. 남왕국 전승인 계시록은 유다 지파(7:5)와 다윗(5:5; 22:16)을 강조하는데, 숫자 14는 다윗의 세 문자의 합수(46414)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계시록에서 예수명칭은 14회 나타나는데, 예수와의 조화를 위해서 ’(πνευ ̑μα) 어휘 또한 정확히 14회 나타난다. 참고로 일곱 영4회 나타나는 것은 숫자 28(7×4)과 관련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계시록은 특히 숫자 28(1:1; 죽임당한 어린 양 등)을 강조한다. 예수 어휘(14)와 성령 어휘(14)의 합수 또한 28이다. 따라서 일곱 영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성령은 성령이고, 일곱 영은 일곱 영이다. 성령과 일곱 영은 다르다. 성령은 한 분성령이고, 일곱 영은 일곱 명의 천사다.”

한편, 보캄도 인정했듯이 계시록은 신약성경 27권 중 가장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다양한 하나님 호칭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1:4,8; 4:8; 11:17; 16:5), 처음이요 마지막인 분(1:17: 2:8; 22:13),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21:6; 22:13),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1:8; 21:6; 22:13), 전능한 자(1:8; 4:8; 11:17; 15:3; 16:7; 19:6; 21:22), 주 하나님(1:8; 4:8,11; 11:17; 15:13; 16:7; 18:8; 19:6; 21:22; 22:5), 그리고 보좌 위에 앉아 계신 분(빈번하게 사용).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인 요한복음

 

그런데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다.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난 17개의 호칭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말씀(1,2), 하나님(1c,18), 생명(4), (4,5,7,8,9), 말씀이 육신이 되다(14a), 아들(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14b, 18, 34, 49),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15,30), 메시아(17, [20],41), 그 선지자(21), (23),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36),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33), 랍비(선생, 38,49),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자(45),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45), 이스라엘의 임금(49), 인자(51)가 그것이다.

이 말이 갖는 함의는 전자가 한 하나님이라는 유일신교적 의미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의 동등성이라는 삼위일체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온전한 삼위일체론(trinity)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유대교의 유일신교(monotheism)를 완전히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종속적 관계를 벗어나 성부 하나님과 온전히 동등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적보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이 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에 보다 용이하다. 즉 성부를 중심으로 할 경우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되는 양상을 갖기 쉽다. 그런데 중보자(미디에이터) 예수 그리스도(성자)를 중심으로 할 경우 성부와 성자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의 관계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요한복음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유대교는 한 분 하나님으로서의 유일신교를 신앙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 이후 비주류인 북왕국보다 주류인 남왕국에서 유대교가 훨씬 강하게 자리 잡았다. 따라서 남왕국 전통의 계시록의 저자는 북왕국 전통인 요한복음의 저자보다 유일신교적 경향성을 벗어나기가 더욱 어려웠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교의 유일신교에 대해 계시록의 저자보다 자유로웠고, 이는 삼위일체신학 형성에 있어서도 보다 수월했다.

 

남왕국 전통의 계시록은

유일신교적 경향성을 벗어나기 어려워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삼위일체신학은 태초에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하나님이 함께 선재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구원을 위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성자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지상 사역을 다 마치시고 성자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께서 하신 일을 대신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예수 이름으로 보내신(14:26) 보혜사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삼위일체론이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각 독립적으로 각자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는 말씀에서 보듯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5, 8장 등). 로고스 찬가(1:18), 도마의 고백에서(20:28) 및 저작 목적에서(20:31) 예수가 하나님(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급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요한복음이 말하는 삼위일체 신학은 산뜻하다.

반면에 계시록은 아직 완전하지 못한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중심적인 계시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등됨을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말하는 유일신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성이 전제되어 있다. 계시록은 제2이사야가 유일신교적 언표로 사용한 처음(알파)과 마지막(오메가)’ 어휘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사용하고 있다.

한 유대 기독교인들을 의식해서 유일신교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극도로 자제할 뿐만 아니라 예배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 간에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배를 받으실 분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똑같이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시고(4), 이어서 두 분이 동시에 예배를 받으실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5). 이는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19:10; 22:9)는 천사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렇게도 예배를 중요시하는 계시록에서 하나님 한 분만이 예배를 받으시거나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두 분이 예배를 받으시는 장면은 언급되지만, 삼위 하나님이 함께 예배를 받으신다는 묘사는 어디에도 없다. 바울서신에서 항상 인사말로 등장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어구에 나타난 이위일체적(binitarian) 인사처럼, 이위일체적 경배와 찬양(예배)은 있어도 삼위일체적 경배와 찬양(예배)은 나타나지 않는다.

 

3. 끝으로, 양서의 성령론을 살펴보자. 양서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동일하게 24회 사용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1:32,33(2); 3:5,6(2),8(2),34; 4:23,24(2); 6:63(2); 7:39(2), 11:33; 13:21; 14:17,26; 15:26; 16:13; 19:30; 20:22에서 나타난다. 계시록에 24회 나오는 (성령)’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자로서의 성령(2:7,11,17,29; 3:6,13,22; 14:13; 22:17), 3) 일곱 영(1:4; 3:1; 4:5; 5:6), 4) 예언의 영(19:10), 5) 생기로서의 영(11:11; 13:15), 6) 불순한 영(16:13,14; 18:2), 7) 예언자들의 영들(22:6).

그런데 양서는 성령론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요한복음은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철저히 구분하여 예수의 승천 이전에는 예수의 사역을, 예수의 승천 이후인 교회 시대는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말함으로써 두 분의 사역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교회 시대를 말하고 있는 계시록에서는 성령(2:7; 17:3; 21:10 )과 예수(2:1; 22:7,16 )가 함께 사역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계시록의 성령 개념은 환상의 영’(1:10; 4:2; 17:3; 21:10), ‘말하는 자로서의 성령(2:7,11,17,29; 3:6,13,22; 14:13; 22:17), ‘예언의 영’(19:10), ‘일곱 영’(1:4; 3:1; 4:5; 5:6)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런 개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성령은 승천하신 예수를 대신한 예수의 영으로서 보혜사(14:16,26; 15:26; 16:7) 또는 예수를 대신하여 예수의 진리를 알리는 진리의 성령’(14:17; 15:26; 16:13)이다. 요한복음에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πνευ̑μα)’의 개념인 보혜사(παρκλητος)’ 어휘는 신약성경에서 요한복음(14:16-17, 26; 15:26; 16:7-11)과 요한일서(2:1)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돕는다는 뜻을 가진 파라클레토스는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말 성경은 보혜사로 번역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론은 철저히 시간관과 관련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 살아생전에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다는 식으로 부활 이후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누가 문헌(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를 두 권으로 책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이를 한 권의 책 안에 기술하고 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성부의 시간(성육신 이전), 성자의 시간(성육신에서 부활까지), 성령의 시간(부활 이후 재림까지)으로 삼등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보혜사와 관련된 다섯 본문(14:16-17,26-27; 15:26; 16:7-11,13-15)이 모두 고별강화(14-16)에 나오는데, 그 기능은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과 같은 보혜사의 명칭들은 보혜사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보혜사의 기능은 예수의 부재시, 즉 교회시대에 예수의 대리자로서의 기능이다.

요한복음은 성자의 시간을 마지막 유월절을 기준으로 역사적 수평적 시간을 제1(1-11)와 제2(12-21)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나아가 요한은 부활 이후의 시간을 성자의 시간과 구분되는 보혜사 성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보혜사 성령의 시간은 예수의 사역을 대신해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시간이요 교회의 시간으로서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되는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이 시간은 보혜사(성령, 교회)의 미래적인 직선적(선적) 시간과 부활-승귀-영광을 얻으신 예수의 영원 회귀적인 순환적-원적 시간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trinity)과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서구 기독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헬라적 사고에 기인한다. 헬라적 사고는 양손과 같이 분리를 전제로 한다. 반면에 히브리적 사고는 한 손의 양면과 같이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왼손에 1을 쓰고, 오른손에 3을 쓸 경우 11이고(1=1), 33(3=3)이다. 13이 될 수 없고(13), 31이 될 수 없다(31). 이것이 분리를 전제로 한 헬라어의 특징이다. 그런데 한 손의 손등에 1을 쓰고, 손바닥에 3을 쓰면 31(3=1)이고, 13(1=3)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 히브리적 사고의 특징이다.

유대교는 야웨, 이슬람교는 알라라는 한 하나님을 신봉하는 유일신교’(Monotheism)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분의 하나님을 말하므로 이는 다신교’(Polytheism)로 여겨질 소지가 있다. 그래서 일신교(一神敎)도 아니고, 삼신교(三神敎)도 아닌, 세 분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이 형성되었다. 이를 잘못 이해한 주장이 있다. 가령, 한 아버지가 집에서는 아빠이고, 교회에서는 장로이고, 회사에서는 사장이라는 식의 이해이다. 이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으로, 기독교의 정통 삼위일체론과 다른 빗나간 주장(이단)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일신일체론(一神一體論)도 아니고 삼신삼체론(三神三體論)도 아니다. 여기서 일체(一體)란 말은 본시 하나를 두고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둘 이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일신일체론은 어폐가 있다. 또한 삼신삼체론은 세 하나님이 세 몸체로 각자 분리된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기에 삼신삼체론도 어폐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삼신일체론(三神一體論)이다. 그런데 여기서 삼신(三神)이라는 말을 할 경우 다신교적 의미를 내포하기에 이 말 대신 삼위(三位)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히브리어로 하나님은 엘로힘’(אֱלֹהִים)인데, 이 단어는 복수명사이다. 이는 다신론이나 범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는 에하드(אֶחָד)이다. 이와 대립되는 야히드(יָחִיד)가 있다. 야히드는 복수성과 연합성이 배제된 언제나 홀로또는 단독이라는 하나를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하나라고 말할 때 언제나 복수성과 연합성과 관련된 에하드’(699)가 쓰였으며 야히드는 결코 쓰인 적이 없다.

히브리적 의미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우리(3)는 하나(1)라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주(구속주) 하나님은 본래 셋이며, 공공성(公共性)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일원론을 말하는 동양 사상에서 하나(1)에서 만물(3)이 나왔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또한 피조물로서의 천지인(天地人)과도 다르다. 수로 말하면 1은 홀로 설 수 없다. 가장 작은 수로 설 수 있는 완전수는 3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야말로 수의 완성이자 동서양 사상의 완성이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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