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아내와 아들에게 이어진 제임스 홀의 선교 열정

  • 입력 2024.07.2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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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375)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87)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샤마 아도나이 테힌나티)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6:9).

세상이 발전되어가면서 인간의 자유는 축소되고 있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쫓기며 산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제 전자 세상이 되어 인간을 통제하고 자유를 억압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의 통제와 감시가 없는 세상, 그런 유토피아 세상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다. 보호와 안전을 위한 CCTV가 사용된다면 좋지만 그것이 오용되면 불행이다. 사회 개발과 발전, 문명 발전이 최고로 여겨지는 세상이 이제 결코 좋지 않고 불편하다는 사실을 점점 사람들은 실감하게 될 것이다. 과거 아날로그의 시대는 불편하지만 인간성이 보호받고 통제 받지 않는 세상이 이었기에 그 때가 그리워진다. 시편 6편은 개인 탄식시로서 여호와께 탄식하며 간청하는 시편으로서 시편 35편과 39편과 더불어 호소 시편(plea psalm, 57, 59, 61)이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6:3). 시편 기자의 탄식과 고통에 대한 호소로서 시인은 불평 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아쉐샤 미카아스 에이니 아트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아테콰 베콜 쪼르라이)”(6:7).

이 탄식 시편인 시편 6편은 질병의 시편으로서 질병에 대한 불평이 바뀌어 적들에게 대한 불평으로 자주 나타나고 있다(6; 13; 38; 39; 69; 88). 적에 대한 적대감이 죄의 표식으로 나타나며 시인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함으로써 그 원인이 질병으로 해석하는 것에 기인한다(궁켈). 욥기에 나온 죄의 결과로서 육체의 질병이 나오는데 욥이 소위 위로자라는 말을 함유함으로서 이 질병의 결과에 대하여 발견한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들의 죄를 인정하지만(38:3이하, 39:8, 11). 욥은 욥기에서 그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로움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시편 기자는 적들을 소위 악을 행하는 자들(포알레 아웬)이라 칭한다. 이는 시편 5:5; 6:8; 59:2; 64:2에서 나오듯이 조롱하는 자, 악한 자(아웬)라는 말로 표현된다. 기술적으로 이 악인이 주술(점을 치는 자), 마법이라는 말에서 나온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아갸에티 베아네하티 아세헤 베콜 라에라 미타티 베디메아티) 내 요를 적시나이다(아르쉬 아메세)”(6:6).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밤의 세계일까. 시인은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요에 눈물을 적신다고 표현한다. 이 무의식의 세계는 고통과 악인과 대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실존을 말한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6:7). 이러한 고통의 상태는 지옥, 스올, 사망에 이르게 되는 극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는 현실을 시인은 고발한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키 에인 바마웨트 지크레카)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베쉐올 미 요데 라크)”(6:5). 이 스올은 사후 세계의 삶, 지하 세계를 말한다. 히브리어는 하늘의 창을 통해 비가 내리고, 이 스올은 이 궁창을 통해 우주적 물, 땅 아래의 세계를 말한다. 이 궁창 아래의 물은 지상의 샘과 바다, 강과 연결되어 땅은 기둥으로 지탱되게 된다. 스올은 죽음의 영역에 속한 지하 세계 땅으로서 죽음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스올은 어둠과 침묵, 웅덩이, 깊음, 땅의 깊음 등으로 표현된다(88:6; 143:3; 115:17; 28:1; 30:9; 69:15; 63:9; 130:1). 시인은 죽으면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없으니 이 현실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고통이 심하고 고난이 심한 사람에게는 간구와 탄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슈바 아도나이 할레짜 나프쉬 호쉬에니 레마안 하세데카)”(6:4).

시인의 간절한 상황, 고통의 상황, 질병의 심함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으로 깊은 도우심과 구원의 함성으로 나타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한네니 아도나이 키 우메랄 아니 레파에니 아도나이)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6:2,3). 영혼의 떨림까지 육체의 질병에서 영혼육의 총체적 질병을 보여준다. 죽음과 스올의 고통이 의인에게 이어지며 악인과 사악한 사람들의 공격이 시인을 죽음의 치명적인 상태를 끼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지만 죽음의 운명은 질병에서 회복되는 행운을 체험하면서 시인은 극적으로 극복하게 된다. 이는 영혼의 미학, 질병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시편 6편에서는 시인은 마지막 원수들이 갑자기 물러가게 됨을 선포하며 승리의 선언을 하고 있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에보슈 웨이바하루 메오드 콜 오에바이)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6:10).

시인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첼로의 비련의 노래와 같은 악상)로서 시편 6편에서는 탄식의 상황이 구원의 극적인 전환으로 바뀌는 상태의 긴 울림을 보여준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아도나이 알 베아페카 토키헤니)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웨알 바하마트카 테야스레니)”(6:1). 하나님의 분노, 심판의 날카로운 저주와 징계, 심판은 오늘 우리의 현주소일 수 있다.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분노와 책망, 진노로 회초리를 들지 말아달라고 간구한다. 사랑의 매와 지혜로운 권고, 부드러운 훈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지르고 회초리 앞에서 간절히 애원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듯 간절히 간구하며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인생 문제를 푼 선교사들이 있다. 제임스 홀(William J. Hall)은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 의료 선교사로 30세의 나이에 189112월에 한국에 선교를 한다. 제임스 홀은 1885년 캐나다 퀸즈 대학 의과 대학에 입학해서 학생 운동단체인 학생 자원운동의 인도 책임자 포먼 목사의 강연을 듣게 된다. 그는 이 때 감동을 받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한다. 제임스는 이후 1889년 뉴욕의 벨레뷰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제임 스 홀은 18923월 감리교 선교사 조지 존스와 함께 평양, 개서, 의주 등을 방문하고, 그 이후 평양 선교기지 개척 담당자로서 임명을 받아 이곳을 빈번히 왕래하게 된다.

초기 선교사들이 단골 코스인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순회 여행은 약 300km로 작은 조랑말 위에 약과 책자들을 싣고, 개울과 산을 넘고 거친 도로를 지나 힘든 여행을 했다. 제임스 홀은 해충의 괴롭힘과 배고픔에 지치고도 환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천연두와 이질에 늘 노출되었다. 하지만 먼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본다고 하며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먼저 치료해준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그것이 워낙 위안이 되고 사명감이 불타게 해서 홀에게는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 평양은 보수적이고 외세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이 있어서 복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았다. 얼마 전 1866년 선교사 토마스의 순교 사건이 기억에 생생하던 곳이었다. 외국 선교사를 직접 박해하거나 가둘 수 없었던 평양 감사 민병석은 제임스 홀의 조사 김창식과 마펫 선교사의 조사 한석진을 체포해서 고문을 가하고 사형의 위협을 행했다. 제임스 홀을 도왔던 김창식은 올린저 선교사의 집에서 일하다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1892년 봄에 감리교 선교부의 현지 전도인으로 임명된다.

제임스 홀의 아내 로제타 홀은 복음을 전하다가 한국인들의 적개심이 어떻게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서 남편 홀에 근심어린 말로 물었다. 그 때에 홀 박사는 만일 하나님이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기를 피하지 않겠소.” 제임스 홀은 자신과 마펫을 도와 기꺼이 감옥에 갇혀 사형 위협을 받은 사람들을 도와 외교 채널을 통해 가까스로 구해내었다. 이 때 풀려난 김차익은 끝까지 제임스 홀을 도와 평양에서 사역하다가 1901년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제임스 홀은 1893년 평양을 방문해 병원과 집으로 쓸 건물 두 채를 사고 1894년 평양에 가정을 꾸리고 병원, 학교, 교회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때에 청일 전쟁이 발발해서 평양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서 청나라 군인 2천명이 죽었다. 전쟁을 잠시 피해 평양을 떠났던 홀이 1894101일 마펫, 그레함 리와 함께 평양에 다시 돌아왔다. 전쟁으로 인해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가축들의 잔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이 아비귀환의 전쟁터에서 그는 고아와 병사들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었고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났지만, 그는 한참 귀여운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밤낮으로 환자들을 돌보던 홀이 안타깝게 열병에 걸려 서울로 이송되어 에비슨 선교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제임스 홀 선교사, 로제타 홀 선교사, 에비슨 선교사
제임스 홀 선교사, 로제타 홀 선교사, 에비슨 선교사

하지만 18941124일 저녁 34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내 로제타 홀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소천하게 된다. “내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마시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했고 하나님이 내게 갚으실 것이오.” 평양의 새 예수, 34세의 나이에 십자가 달린 예수를 연상하는 그의 선교 사역을 볼 때, 오늘의 한국, 북한 선교의 제단에 고귀한 피를 흘린 것이리라, 주여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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