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나는 누구인가? 한마디 문장으로 표현해주신다면
A.서두에서 어려운 질문을 주셨다. 한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누구인가? 그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이제 서성거리지 않는 인생의 연륜이 쌓인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25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현장을 지켜온 "영혼을 사랑하는 아동복지목회자"이다.
Q.가정 배경을 설명해 달라.
A.나는 마씨 32대손이며, 삼남 오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자란 곳은 마씨 종가마을로, 7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모두 친척이었고, 그만큼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였다.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졸업하신 후 농사를 크게 지으셨다. 무엇보다 자녀들의 학업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던 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53세의 이른 나이에 지병으로 소천하셨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다. 깊은 밤, 목이 몹시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를 아버지는 조용히 등에 업으셨다. 그리고 40리나 되는 험한 비탈길을 묵묵히 걸어 읍내 병원까지 나를 데려가셨다. 그때의 따뜻했던 아버지의 체온과 힘겨운 숨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가슴속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지금도 건강하시며, 신앙생활을 소중히 여기시며 살아가신다. 평생 성경을 필사하시며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셨고, 구순을 맞이하시던 해에는 필사 성경을 기념하는 뜻깊은 잔치를 열기도 하셨다. 어머니의 삶은 언제나 기도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식들에게도 그 따스한 마음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Q.신앙생활은 언제 했는가?
A.한국에는 교회가 이렇게도 많은데 제가 살던 마을에는 아직도 교회가 없다. 또한 마을에서 처음 목회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교회를 다녔다. 마을에 예배당이 없어서 10리 정도 걸어서 교회를 다녔다. 교회 바닥은 나무였고, 바닥에 않아서 예배를 드렸E다. 난방은 톱밥 난로였고, 톱밥이 타면서 피어나오는 불꽃을 보며 예배생활을 했다. 어린시절 시골교회는 정든 마음의 고향이다.
중학교 때 광주로 전학오면서 큰 누님 따라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Q.신앙적인 회심은 언제했는가?
A.누님의 권유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영락교회의 담임목사는 박조준 목사님이었고, 장신대의 이사장은 한경직 목사님이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생활비를 벌기 위해 천호대교 근처에서 방범 순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개인택시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흥건히 흘러내렸고, 의식은 있었으나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은 채, 앞으로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부모님이 통곡하며 우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고, 하나님께 간절히 항변했다.
"하나님, 시골에서 올라와 목회자가 되려는 이 길이 이렇게 끝나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주저앉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나의 생각과 달랐다.
입원한 병원에는 원목실이 있었고, 그곳을 섬기는 여자 목사님이 계셨다. 병실에는 소위 ‘나이롱 환자’들이 많아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목사님께서 원목실의 키를 주시며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 주셨다. 나는 신학교 기도탑에서 회심의 은혜를 경험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병원 원목실이라는 독방에서 말씀을 통해 나를 만나 주셨다.
그곳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깊이 대면하는 회심의 시간이 열렸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나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그분의 손길은 언제나 선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Q.영적 영향을 받은 분들이 있다면
A.신학교 다닐 때 영락교회 대학부를 섬기면서 산골 여름 성경학교 교사로 헌신했다. 젊은 날 대학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된 행복을 누렸다. 무엇보다 내 인생에 큰 영적 자양분은 한경직 목사님이다. 93세 연세에 불구하고, 주일 5부 6부을 강단에서 손을 떨면서 설교하시는 한경직 원로 목사님의 겸손함은 그 자체로 영적 힘을 주었다. 또한 박조준 담임목사님의 카리스마가 있는 지적 설교가 청년기 신학생이었던 저에게는 큰 영적 감동과 깊은 도전을 주었다.
Q.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다면
A.기독교 윤리를 가르쳤던 맹용길 총장님으로부터, 목회자 윤리를 배웠고, 성종현 교수님으로 부터 신학이 왜 중요한가를 배웠다. 성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내 교회라고 하는 순간에 교회는 병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Q.교회개척 이야기를 듣고 싶다
A.1996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품고 종로평강교회를 개척하였다. 작은 2층 가정집에서 시작된 교회였지만,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겠다는 열망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맨손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길을 열어주셨다. 1999년, 남양주 진건읍에서 평강교회를 개척하였다. 당시 가진 것은 250만 원뿐이었고, 성도는 우리 가족 네 명뿐이었다. 어린 아들, 딸과 함께 개척의 길을 걸으며, 18평 교회와 14평 임대아파트에서 다시 믿음의 길을 걸었다.
아들이 주의 일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늘 있었지만, 아들은 개척교회의 험난한 과정을 지켜보며, 그는 목회자가 아니라, 장로로서 교회의 재정을 넉넉하게 공급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싶다고 한다.
Q.복지 목회를 하게 된 동기
A.2000년 당시 진접읍에는 삶이 터전이 어려워서 이주해 온 분들이 많았다. 개척과 동시에 아이들을 전도하기 위해 교회에서 평강 선교원를 시작했다. 9시부터 아내와 함께 몬테소리, CMS영어 전 과목을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이 시작되었고, 학부모님들로부터 인지도가 생겼다. 이것이 2005년부터 아동복지목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무료 공부방 하다가 지역아동센터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남양주에서 지역아동센터 1호다. 처음 시작할 때 정부지원이 없이 시작했다. 오직 ‘교회에서 아동을 살려야 한다는 오로지 사명 하나로 아동 복지를 시작’했다.
Q.복지 목회를 하면서 실제적인 학생들의 성장이 있었다면
A.교회 선교원의 CMS 교육을 통해 많은 학생들의 신앙이 성장하였고, 서울권 대학으로 진학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이를 통해 부모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열매들도 풍성하게 맺혔다.
그러나 지역아동복지센터의 운영에는 한 가지 과제가 있었다. 센터 이용 자격 기준이 저소득층,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으로 제한되어 있어,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기준에 해당되지 않으면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크게 감소하였다. 과거 100%에 달했던 대학 진학률이 20%로 떨어진 것은 심각한 도전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며,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할 제목이다. 하나님께서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열어 주시고,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Q.목사님은 7개 센터를 운영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센터들의 성격에 대해 설명해 달라.
A.지역아동복지센터, 그룹홈, 요양원주야간보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마다 시설 규정이나 목적이 다르다.
하버드지역아동센터는 이용시설이다. 8시간 운영하고, 학생들은 출 퇴근을 한다.
아동공동생활가정 이것을 그룹 홈이라 부른다. 소규모 7인 시설 고아원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 복지 영향을 받아 소규모 그룹 홈으로 바뀐 것이다. 고아원이 보육원으로 그리고 그룹 홈으로 변경된 것이다. 성별로 나누어서 24시간 케어하는 생활시설이다. 이 시설에는 아동학대, 방임, 가정 깨짐, 신고 된 아이들이 지자체 시장의 허락 하에 시설에 배정된다.
쉼터는 가출한 아이들이 머무는 곳이다. 단기쉼터와 중장기 쉼터로 구분한다. 단기쉼터는 하루를 넘기면 안 된다. 하루 밤 재우고 다른 쉼터로 넘겨야 한다.
요양원주야간보호센터를 설립했다. 2016년 진건읍 최초의 요양원이다. 진건읍은 인구가 약 2만4천명이다. 그런데 설립기준에 맞는 건물이 없다보니 요양원 시설이 없다. 요양원 최소기준은 9인이며, 주야간 보호는 7인 시설이다.
Q.복지 목회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A.5학년때 그룹홈에 입소한 아이가 있다. 독자이고, 저녁 늦게까지 게임하는 아이다. 부모는 알콜 중독자다. 엄마가 쇠파이프로 아이를 가격했다. 방안이 피바다가 되었고, 엄마가 아이에게 농약을 먹였고, 엄마도 농약을 먹었다.
큰어머니가 아이를 응급처치하여 살아났고, 그룹 홈에 상담을 요청했다. 이 사건 이후 아이는 실어증에 걸렸다. 아이가 어떻게 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인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했다. 분노를 완화시키기 위해 드럼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럼학원에 1년간 데리고 다녔다. 몇 명의 아들도 포함하여 학원에서 악기를 가르쳤다.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300명이 모인 현대백화점, 용산구청, 연주홀에서 발표를 했고, 교회 찬양단으로 봉사하고 있다.
Q.복지 목회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A.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많은 정성을 쏟아도, 눈물의 씨를 뿌려도 영적 추수가 잘 안 된다. 이것이 목회자로서 딜레마이다.
또한 복지목회를 하면서 센터 유지 관리비 중 매달 임대료가 700-800 백만 원 지불한다. 이것이 마음에 짐이지만 그래도 사명으로 감당하고 있다.
복지 목회는 쉬운 길이 아니다.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길을 걸어가는가? 되묻곤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내가 복지목회의 샘플링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로 감당하고 있다.
Q.복지 목회를 하면서 마음에 늘 담고 있는 성경 말씀이 있다면
A.복지 목회가 쉬운 길은 아니다. 그 시간들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 그것은 말씀이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복지 목회는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삶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 거저 받은 은혜를 필요한 분들에게 돌려주는 삶이다. 이것이 복지목회이다.
Q.복지 목회를 하면서 자부심이 있다면
A.개척교회가 23가정을 책임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현재 7개 센터에서 23명이 일하며, 이들에게 매달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25년 동안 복지 목회를 해왔지만, 내 소유의 건물도, 내 땅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사역을 통해 23명의 가정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본다. "나는 잘하고 있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분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다.
Q.복지목회를 꿈꾸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A.나는 교회개척을 250만원으로 시작했다. 교회당에서 선교원을 시작했다. 이것이 복지 목회의 시작이다. 너무도 초라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복지를 하려면 빨리 하라. 1억을 은행에 넣으면 이자 말고 그 이상 어떤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1억의 돈으로 복지센터을 운영 한다면 엄청난 삶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것이 행복이다.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한다면 남들이 하기 싫은 일들을 하면된다.
요즈음 화두가 일자리이다. 특히 청년들이 고민하지 않기를 바란다. 최고의 일자리는 지역아동센터이다. 지역아동센터는 학업을 도와주는 기관이다. 대학공부한 청년이 주저없이 바로 현장에서 쓰임 받을 수 있다. 또한 정부는 청년들에게 공무원처럼 대우 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처우를 더욱 개선하여, 많은 청년들이 지원하는 아동복지 기관으로 성장했으면 한다.
Q.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A.복지 목회는 항상 재정이 충분하지 않다. 센터에서 일하는 분들은 정부가 지원하지만 센터의 전세금이나 월세는 시설장이 감당해야 한다. 센터는 시설장의 헌신과 정부의 임금, 독지가들의 후원이 있어야지만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기부금을 내는 분들은 여러 곳에 분산해서 지원하지 말고 한곳을 지정해서 구체적으로 서로 협력한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것으로 본다.
Q.자녀들은 아버지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A.25년간 개척교회와 복지목회의 현실을 아이들은 보고 자랐다. 교회에서 사례비를 한 달도 받지 않았다. 자비량으로 복지 목회했다.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이들은 "아빠는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한마디로 나는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Q.평생 복지 목회를 해오셨다. 미래의 비전은 무엇인가?
A.죽어가는 영혼에게 복지사가 세례를 줄 수 있는가? 여기에 항상 의문이 들었다. 나는 목회자다. 마지막 길을 가는 분들에게 인생을 영적으로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 사역도 하고 싶다. 호스피스 원목이 앞으로 하고 싶은 사명이다. 남양주는 80만명 시민이 있지만 호스피스 사역을 하는 곳이 없다. 이곳에서 나는 호스피스 영적 사역으로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삶을 잘 마감하도록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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