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1.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눅 15:1-10, 찬송가 95장)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을 차별 없이 영접하셨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적 틀과 달리 영혼을 구원하는 목자의 심정이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희생은 단순한 재산 보전이 아니라 신뢰와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으실 때 하늘에서 더 큰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2. 사랑의 말씀으로 접근 (눅 15:1-10, 찬송가 527장)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강조하며 죄인과 거리를 두었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죄인을 영접하시고 교제하셨다. 이는 단순한 교화가 아닌 회개와 구원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 나라의 천사들도 기뻐한다.
3. 선지자의 예언 (렘 4:11-28, 찬송가 446장)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을 경고했다.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의 평화 메시지를 따르며 악을 돌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렘 4:14)”고 촉구한다.
4. 종말의 때 (시 14편, 찬송가 214장)
다윗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권력과 여론을 조작하는 어리석은 자들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권력이나 여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 종말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은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신다.
5. 긍휼을 입은 이유 (딤전 1:12-17, 찬송가 214장)
바울은 과거에 비방자·박해자·폭행자였으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입고 직분을 맡게 되었다. 이는 바울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훗날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기 위함이다.
1.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눅 15:1-10 찬송가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이번 추석 명절에 12시간 운전해서 고향 거제도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님도 뵙고 고향산천도 보고 왔습니다. 먼길 가느라고 힘도 들었지만 고향을 다녀온 기분은 좋습니다. 고향이란 왜 좋을까요? 잊어버린 친구 생각나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 같아서 고향이 좋습니다. 교회 개척이후에 30년동안 고향갈때마다 하는 일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거나 전화합니다. 친구들은 아직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나 역시 믿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지금 하나님 앞에 발견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빚을 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복음을 드러내려고 계속 관계를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는가? 오랜 세월에 비하면 결과가 썩 좋은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만나거나 전화할 때 교회가라 예수믿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사인줄 아니까 벌써 말나오면 선입관을 가지고 또 전도하려고 하나보다 할까 봐서입니다. 직접 만나서 식사할 때나 분위기 보고 복음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화하고 친구로서 관계를 유지하기를 교회 개척이래로 30년간이나 계속했습니다. 복음을 믿고 교회 나가서 집사님이 된 분도 있습니다. 부인따라 이제 교회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대하여 긍정적인 마인드로 복음을 받으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랜세월 30년이란 긴 세월동안 복음이 심어지기도 하고 자라기도 하고 열매맺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오랫동안 옛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습니다. 아울러 예수믿기전에 대학시절 친구와도 명절때마다 통화하고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가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예수믿기전의 모습과 어투로 대화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계유지합니다. 때가 되면 그 영혼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가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명절 마치고 올라오면 주일 준비하느라고 바쁘고 몸도 피곤하지만 친지들에게 전화합니다. 작은아버지 고모님 사촌형들과 관계를 유지합니다. 결과는 어찌되었든간에 대화를 화고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이 열려 있어서 때가 되면 복음을 받아들이겠지 하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눈에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이유입니다. 죄인들하고 접촉하면 죄인이 된다는 당시의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결법이 있어서 부정한 자와 만나면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그들을 만나는가? 겉으로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세상을 바꾸겠다는 공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더라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대 사람으로 만나주고 차별하지 않고 같이 나누는 중에 비방을 받지만 그들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하는 꿈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틀을 가지고 너희들이 이 틀속에 들어와야만 명부에 등록시키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점이 바리새인과 달랐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틀과 규정안에서만 오로지 사람들을 교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그 법을 벗어났을 때에는 신용불량만들어 버립니다. 신용불량의 책임은 규정을 어긴 백성에게만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다 신용불량이 되어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규정을 가지고 들이대겠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들은 그들의 틀에 들어오면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죄인들과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나주지 않고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비유라는 것이 전달에 효과적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남을 지적할 때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럴 경우에 상대방이 내 잘못을 지적하면 사람들이 반발하여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분좋게 듣도록 한 후에 다 들은 후에 그들의 속에서 뒤집어지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를 들판에 두고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들판을 지나 강을 건너기도 합니다. 언덕을 넘기도 하고 험한 산을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목자가 절벽가에서 서성이는 한 마리 양을 찾아내었을 때 그것을 어깨에 매고 돌아와서는 찾은 기쁨 때문에 동네 친구들을 모두 모으고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나 양 잃지 않고 찾아왔다”고 알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옷이 찢기고 몸에 타박상이 나고 잔치할 비용까지 생각하니 양 10마리 분의 비용이 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그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많은 희생을 하면서까지 왜 한 마리 양을 찾아야만 할까요?
양치는 목자들은 산에서 잠자면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목장의 주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주인들은 서로들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목자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만 합니다. 양의 수가 줄어들면 목자들이 양을 잡아먹었다고 주인들은 목자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웁니다. 당시 대부분 목자들은 주인의 양을 잡아먹는 도둑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목자들에게 양 한 마리는 신용장입니다. 신용과 명예가 그들에게중요합니다. 양을 치다가 실직을 당했을 때 다른 주인에게 가서 일자리를 얻어야 하겠지만 평이 안좋은 목자는 갈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에게 양 한 마리는 자기의 직장과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목장의 주인과 목자 중에 어느쪽에 속할까요? 그들은 주인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그들의 귀에 잘 들려올까요 안들려올까요? 주인의 입장에서 들으니까 잘들어옵니다. 값진 재산이 양을 보살피기 위해 애쓰는 목자들을 볼 때 고개를 끄떡 끄떡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그들이 아멘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비유를 풀어서 적용할 것입니다. 자기들이 적용할 것입니다. 주인은 하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제 내가 주인 아닙니다. 길잃은 누구인가? 소외계층인 세리와 죄인들이 됩니다. 길잃은 양을 찾아가는 목자를 누구로 생각합니까? 죄인들에게 다가가는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누구인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참목자를 비난하는 자리에 있는 하나님 앞에 게으른 종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유가 그들의 가슴에서 깨달아지게 합니다. 내가 죄인으로 느끼고 게으르고 악한 종이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종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으로 주십니다. 천국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먹는 것이 옳다? 나쁘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잔치를 벌여주어야 할 일이라고 깨닫게 합니다.
그다음으로 열 개의 드라크마를 가진 약혼한 처녀가 잃어버린 한 개를 찾기 위해 밤새도록 빗자루로 방을 쓸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동전한개 잃어버리는 것 가지고 왜 그런가? 질문이 생깁니다. 그 약혼한 처녀에게 아홉 개가있는 데 그녀가 잃어버린 한 개를 찾아서 밤잠을 안자고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대 유대사회에서 줄에 꿴 열드라크마를 남자가 약혼시 약혼녀에게 선물로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까지 열드라크마를 선물로 받은 신부는 그것을 신랑이 준 사랑의 증표로 잘 보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10개중 한 개의 드라크마를 잃어버릴 경우 혼인식이 파해질 만큼 중요한 증표였습니다. 잃어버린 한 개의 드라크마를 찾는 것은 혼인식에서 신랑의 신용을 얻는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 한 개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그 한 개처럼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우리는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았는가?제자리에 있어야 할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영혼, 우리의 시간, 우리의 건강 모두 우리 점검해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가? 이미 찾은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영혼과 믿음과 시간을 되찾도록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랑의 말씀으로 접근 (눅 15:1-10 찬송가 527장 어서 돌아오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사람들을 율법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세상을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세리들과 죄인들이 말씀을 배우러 가는 것을 목격하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을 죄인들을 교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교화하여 세상질서를 바르게 세운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운동은 바리새인들의 취지와도 어긋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예수님에 대하여 수군거리고 있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2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회개혁을 부르짖지만 죄인들과 거리를 두고 사회개혁을 하겠다는 것인 반면에 예수님은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죄인들과 접촉을 해야 하다는 입장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법과 규정을 정하는 일과 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사람을 다룹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사람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신용불량자로 넘어가는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법의 한계를 넘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당연히 그가 신용불량자요 부정한 자요 불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세부적인 법에 의하면 부정한 사람을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부정한 자가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점에서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은 법에 규정하는 부정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영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도 가르치고 그들과 식사도 같이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님이 그 죄인들과 영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5-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9-10).”
3. 선지자의 예언 (렘 4;11-28 찬송가 446장 주음성외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예언자는 마치 오늘날 기상예보를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태풍이 닥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루살렘을 강타할 그 태풍은 뜨거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 강도가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기 위해 키질할 때 나오는 바람의 세기도 정결케하는 바람의 세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알곡과 쭉정이까지 다 날려버리는 태풍입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깜짝 놀랄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백성에게 평강이 있으리라고 하고 거짓예언을 했으나 백성들의 목전에 칼이 날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지도자와 백성들의 귀에 아부하던 거짓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그들이 꿈꾸던 평화의 꿈이 갑자기 들이 닥친 칼 앞에서 물거품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10절).”
역사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이 닥칠 큰 태풍은 이웃 강대국의 침략입니다. 지도자와 백성들이 큰 국란의 태풍이 오기까지 왜 대비하지 못하였는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언자를 통해서 악에 돌이키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지적하는 그들의 악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들의 귀에 거슬림이 없이 예언하는 거짓 예언 듣기를 그들이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14절).”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17-18절).”
그렇다면, 백성들이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에는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참된 예언듣기를 거역한 이유가 무엇인가? 백성들이 분별력이 없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22절).”
4. 종말의 때 (시 14편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표지에서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떡먹듯이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여론을 조작하면서까지 그들의 세력이 하나님의 사람들보다 우세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손에 쥔 자들로서 여론조작에 의한 지지율을 백성들에게 제시하면서까지 초법적인 살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에워싸여 생명의 추적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외로운 자리에 있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를 지나는 다윗에게 권력자들과 함께 조롱의 눈빛을 던지는 백성들에 대하여 서운한 감정도 없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어려운 처지에서도 목표를 흐르지 않고 마음에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 다윗은 그들이 어리석음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세상의 여론과 성공가치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5-6).”
그런데, “거기서”란 어디를 말하는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자로 서시는 심판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하시는 그 날에 심판이 있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종말론적 신앙을 다윗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때를 지날 때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원을 약속한 것은 변경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5. 긍휼을 입은 이유 (딤전 1:12-17 찬송가 214장 나주의 도움받고자)
그리스도에게 비방과 핍박과 폭행을 하였던 바울이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주님 곧 하나님이십니다. “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을”뿐 아니라 “죄인중에 괴수였다”였던 바울은 자신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분을 맡겨 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죄인중에 괴수인 그가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분을 얻었는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나는 과거에 충성한 적이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 충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명권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과거의 허물과 불충을 덮으시고 충성되다고 간주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충성한 적도 없는 그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충성되다고 간주할 수 있었는가? 바울에게 직분을 주시기 까지 그리스도께서 오래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바울에게 긍휼을 입혀주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기 위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