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열여덟째 주일 요약
1. 겨자씨 믿음과 종의 관계 (눅 17:5-10)
사도들은 “믿음을 더하소서”라 기도했지만,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족하다” 하심.
믿음은 분량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가, 안 믿는가의 문제.
참된 믿음은 “나는 주님의 것”이라 고백하며, 종처럼 순종하는 삶으로 드러남.
기적과 사역의 열매는 사도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함.
2. 사마리아인의 감사 (눅 17:11-19)
나병환자 10명 중 단 한 명, 사마리아인만 돌아와 예수께 감사함.
그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인정.
감사와 예배는 레위 제사장의 몫이었지만, 믿음 있는 사마리아인이 제사장의 자리에 섬김.
믿음은 단순한 치유 경험을 넘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임.
3. 무익한 종 (눅 17:5-10)
겨자씨 믿음은 “많음/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주님 신뢰.
종은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 고백해야 함.
사도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업적보다 충성이 중요함.
참된 믿음은 복음 때문에 오는 박해와 시련을 견디는 믿음임.
4. 바벨론 강가의 찬송 (시 137편)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된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기억하며 울음.
그러나 그곳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라는 탄식은 예배와 찬송의 순수성이 모욕당하는 상황 때문.
믿음은 환경의 수치와 억압 속에서도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임.
5. 물려받은 믿음 (딤후 1:1-14)
디모데의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 → 어머니 유니게 → 디모데로 이어진 믿음의 유산.
이 믿음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의 믿음.
복음의 종은 평화시의 믿음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는 믿음을 소유해야 함.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아나니, 그가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한다”는 담대한 확신의 믿음이 필요함.
✅ 전체 메시지 핵심:
믿음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종처럼 순종하며, 감사하고, 고난을 견디는 믿음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역과 업적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아간다.
1. 겨자씨 믿음과 종의 관계 (눅 17:5-10 찬송가 336장 환란과 핍박 중에도)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요/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런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이 복음성가가 마음에 떠오릅니다. 왜 이 노래가 떠오를까? 사도란 주님의 파송을 받아 떠나는 사람입니다. 막상 사도가 되어 떠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파송을 받은 사도들은 오늘날 우리의 사역자들과 다릅니다.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가라하면 오지로 아니면 미지의 나라까지 가야 할 것입니다.
120년 전 이 나라에 복음을 들고 왔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였습니다. 의사 교수 등 자신에게 보장된 지위를 버리고 주님의 파송을 받아 최빈국인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선교지인 이 나라에서 죽어가면서 이 땅에 묻히는 것을 하나님앞에 영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양화진 묘지에 묻혀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씨가 이 나라에 퍼져서 복음의 열매가 맺혀서 오늘날 이 나라가 세계에서 경제규모 7위의 경제대국의 번영을 보게 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파송받은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나라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한 것이 선교사님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공을 그들에게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은 그들이 그 일을 하도록 파송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그 사도들이 믿음을 더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답변하시는 것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사도들이 더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서 믿음을 더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다고한 반면 주님께서는 그 믿음이면 족하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더해달라고 할 때 사도들이 가진 믿음이 적다고 판단해서 구한 것 같은데, 주님게서 사도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가져도 뽕나무가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라 하여도 그대로 순종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기도에 대한 답변과 다른 답변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답변을 하셨는가? 사도들과 예수님 사이에 관점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사도들은 믿음을 분량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적은 믿음 많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교회도 부흥시켜야 하는데 사도들은 여기에 믿음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과 다른 입장에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병고침, 귀신축출, 교회 부흥 다 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믿음이 적어서 그런게 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안되는 이유는 믿음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만 있으면 가능하다. 주님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무엇을 믿음인가? 우리들이 원하는 믿음은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기대하는 믿음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주 하나님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 부분을 가지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 곧 주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이 모든 문제들이 질문학 구하는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메시야라고 믿는 것의 의미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도가 되었다 주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도란 무슨 뜻인가? 주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나 죽으나 내가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위해서 바쳐진 몸이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도로서의 입장입니다.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은 사도들이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답변하신 겨자씨 믿음과 순종하는 종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겨자씨에 이어서 순종하는 종의 이야기로 답변하셨는가? 겨자씨 믿음과 순종하는 종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오늘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것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것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뽕나무가 순종하는 것처럼 사도들은 종처럼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겨자씨 믿음과 순종하는 종은 관련성이 있어 보입니다.
종은 주인의 것으로서 주인에게 순종과 충성을 다한 후에 주인이 명을 받은 후에야 자신을 위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의 비유에서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명령대로 일을 잘했다고 사례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종은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대로 다 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더 큰 일을 하고 업적을 세우고 공을 세우기를 원했던 것같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공을 세우기 위해서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기적이 일어날 때에 일어난 기적에 대해 그 공을 사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명을 받아 교회를 섬기고 직분자로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싶고 더 큰 업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 공과 업적이 우리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것으로 고백한다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순종하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종이 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때 우리교회와 사회가 덕스러운 사회로 바뀔 것입니다.
2. 사마리아인의 감사 (눅 17:11-19 찬송가 327장 주님 주실 화평)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 한 마을을 지나가던 예수님은 멀리서 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치는 10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선언하시기를 “가라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들에게로 가는 중에 자신들의 몸을 본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인즉 수년 동안 고통거리가 되었던 피부가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치료받은 사람 10명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그는 누구인가?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올린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 이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광돌리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와 감사를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문둥병들에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평생동안 부정한 자로 격리상태에서 살아야 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지성소에서 제사를 올리는 일을 하는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중에서 거룩하게 성별된 레위지파가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오직 유대 레위지파에서 뽑힌 자만이 될 수 있는 대제사장 자리에 이방인의 뜰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아홉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감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무익한 종 (눅 17:5-10 찬송가 214장 나주의 도움받고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사도들에게 주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뽕나무 뿌리를 뽑아다가 바다에 심기우라 하여도 그대로 순종하였을 것이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정리하자면, 믿음이 더 필요하다는 사도들에게 주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가져도 뽕나무가 그들에게 순종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은 밭가는 종이나 양치는 종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종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을 위해 음식 봉사를 다 한 후에도 자신이 한 일을 주인에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을 다 행한 후에도 그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많은 믿음을 주님에게 구하는 사도들에게 주님은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면 족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들이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믿음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주님께서는 사도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에게 있어야 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먼저 무엇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가? 주님의 파송을 받고 있는 사도란 예수님을 주로 믿는 고백을 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는 순간 그의 신분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더 많은 믿음을 구하기보다 사도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종됨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사도에게 이 작은 믿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가? 복음을 홍보하기 좋은 평화기인가? 아니면 복음으로 시련과 압박을 견디어 내어야만 하는 박해 상황인가? 자신의 자리를 충성스럽게 지키는 종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사도는 주님의 종의 자리를 충성스럽게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리를 충성스럽게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이 상황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믿음이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한지 아닌지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9-10절).”
4. 바벨론 강가의 찬송 (시 137편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시인과 백성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의 몸으로 고국에서 예배드리던 예루살렘성전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해 내고 흘린 눈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강가에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다음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땽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내가 예루살렘을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재주를 잊을지로다”,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을 진대....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어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신줄 믿고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찬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과 백성들은 왜 이방 땅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에 대해 탄식하고 있는가?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3절).” 오늘 시에 등장하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는 누구일까? 바벨론의 관리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인적인 끊어진 강가로 예배하러온 포로민들이 모인 자리에 정복국의 관리가 따라 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질서를 위해 포로민을 감시감독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리들이 오늘 예배하며 찬송하는 포로민에게 앙콜송을 요청한 것입니다. 얼핏보기에는 앙콜송을 요청할 때 노래하는 자가 다 좋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야 할 노래를 정복국의 관리 앞에서 불러야 한다는 것은 피정복민 포로의 입장에서는 치욕과 수치였던 것입니다. 예배 중에 이방인이 들어온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방인이 감시하는 자리에서 노래를 다시 불러야 한다는 것이 극도의 치욕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4-6).”
5. 물려받은 믿음 (딤후 1:1-14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에베소교회 담임을 맡고 있는 디모데가 정부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교회적 상황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바울은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난속에 울고 있는 디모데를 보고 감옥에 있는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디도데 속에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이익과 유행에 따라 움직이는 거짓 믿음이 아니라 진실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디모데 스스로 노력으로 다듬어 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달받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디모데에게 전달되기 전에 그 믿음은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 유니게는 친정어머니 로이스에게서 그 믿음을 전달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먼저 믿음을 가진 신앙의 선배를 통해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믿음의 DNA입니다. 디모데가 물러받은 그 믿음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우리 우리 주님이시다”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 다름아닌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는 평화시에 사람들에게 선전하는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다가오는 핍박을 대처하여 견디어내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8절)”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2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