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전 파괴의 이유 (21: 5-19 찬송가 330장 어둔밤 쉬되리니)
모든 대형 선박에는 모든 수화물의 1/3의 무게가 되는 물을 배에 가득 채우도록 되어 있아고 합니다. 배가 운항중에 바람과 파도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이 물을 평형수라고 합니다. 평형수의 핵심은 무게중심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와 같은 단체라도 무게중심을 잃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무게 중심은 우리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시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 세상에 두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두어야 할 것인지? 이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아름답고 우람하게 세워져 있는 성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고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날이 이르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은 A.D. 80년 경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은 70년에 이미 파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이 파괴된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의 운명이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성전파괴의 모습이 된 것임을 확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견고하고 우람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그 때에 예수님은 그 성전이 파괴될 것을 어떻게 아셨는가? 외관상 견고하게 지어지고 아름다운 것들고 꾸며진 우람한 성전일지라도 문제는 그 성전이 제대로 관심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한 채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은 유대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성전에서 정치적 사안이나 종교적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지도자들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회원으로서 정치가도 겸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 사회의 자본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자들이었습니다. 성전지도자들의 결정은 유대나라의 부를 결정하는 것이요 유대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운명과 유대나라의 운명은 같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유대나라에 문제생기면 성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앞 부분에서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입구에서 헌금함을 마주 바라보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부자들인 지도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헌금하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끝으로 한 가난한 과부가 두렙돈의 헌금하는 것까지 보셨습니다.예수님은 부자들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보다 이 과부가 헌금하는 것이 더 많은 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로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1데나리온은 1일 근로자 임금입니다. 하루 일당 16만원받는 근로자를 감안할 때 한 고드란트 곧 두렙돈은 1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1만원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가 다른 부자들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유인즉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일부의 금액을 헌금했으나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의 전부인 1만원을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 가난한 과부의 1만원을 부자들의 수십만원 수백만원보다 더 많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가? 여기서 예수님은 헌금액수를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비율로 본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의 100%를 헌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들의 수십만원 수백만원의 헌금은 생활비의 몇%에 해당할까요?
예수님께서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헌금의 각각에 대해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비율로 비교한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성전입구에서 그들을 관찰한 이유는 그들의 삶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의 무게 중심을 파악하기위해서는 그들이 가진 재산이나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전에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넣은 헌금은 그들의 신앙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되는지를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헌금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헌금의 금액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생활비의 비율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이 생활비 전부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게 중심을 세상이나 자신이나 집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두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넣는 헌금이 액수로 볼 때에는 과부와 비교 안될 만큼 엄청나게 많았을 수 있으나 그들의 헌금은 자신들의 생활비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적은 비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들의 생활을 위해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구입하는 데 쓰는 돈에 비하면 그들이 바치는 헌금이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비율로 치면 과부는 생활비 전부 100%인 반면에 그들은 10%도 못 미치는 헌금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왜 성전파괴 예언 본문 이전에 나오게 되었을까? 성전 파괴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 헌금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근거로 예수님이 바라보는 이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성전의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의 관심과 사랑 부족 때문에 파괴될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없어진 이후에 유대사회 속에서 유대 백성들은 어떻게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관심만큼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견고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모임이 견고하게 서 있고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공동체 일원들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무게 중심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진지함의 정도에 비례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문에 좌우되는 얇은 귀를 가질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는 일을 급선무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19절에 영혼을 얻으라고 합니다. 무엇을 인내하는 믿음만으로 영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성실 (눅 21:5-19 찬송가 179장 주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돌들과 헌납된 장식물들로 꾸며져 있는 이 우람한 성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였습니다.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것은 직역하면 “무너지지 않을 돌 위에 있는 돌이 멀리 보내질 것이다”입니다. 이 말은 우람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될 것을 뜻합니다. 이 우람하고 아름다운 성전의 불행한 미래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예측 못한 것을 예수님이 예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이 파괴될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두렙돈의 헌금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은 그녀가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는 가난한 한 과부가 아니라 많은 부자들이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성전을 지켜야 할 성전관리자들은 부자였으나 성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가난한 과부보다 훨씬 적었다는 것입니다. 관리자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성전의 미래를 예수님은 열매없으므로 저주받아 말라 죽어버린 무화과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예수님의 십자가처형과 부활이후 약 37년에 기록된 것입니다. A.D. 70년에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잔해를 바라보면서 저자는 예수님의 예언하신 말씀의 잣대로 성전의 미래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파괴된 것과 두렙돈을 바친 가난한 과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두렙돈을 바친 과부는 하나님을 위해 전재산과 온 몸을 다 바쳤던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자들보다 더 많은 헌금을 넣은 그 가난한 과부와같은 예수님을 그 부자들이 제거한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버린 성전을 관리하던 과부보다 적은 헌금을 했던 그 부자들에게 성전파괴의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 로마의 군대에 의한 성전파괴의 결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파괴의 전후로 “종말이 왔다 내가 메시야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일어났던 혼란과 무질서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같은 혼란의 현상이 예수님의 재림을 위한 징조는 될지언정 재림의 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재림주다”라고 주장하는 자는 미혹하는 자들이지 재림하신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혼란의 시대에 신자들이 처신해야 할 바람직한 신앙자세는 무엇인가?
8절의 “분별하다”(“주의하라”-개역개정), 14절의 “놓다”(“명심하라”-개역개정), 그리고 19절의 “얻다”는 헬라어로 각각 명령형입니다. 그러므로 각각은 “분별하라(8절),” 마음에 “놓으라(14절),” 그리고 “얻으라(19절)”로 번역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잡고 분별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로써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을 급선무로 해야 합니다.
3. 유대인의 왕 (살후 3:6-13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이사야 56-66장은 앞의 책들과 달리 제 3 이사야에 속하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서론에 해당하는 1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점입니다. 1장 26-27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재판관과 모사들을 회복할 것이며 시온을 구속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점은 오늘 본문의 메시지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 30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수리나무에 비유했는데 65:22에서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불성실한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켜 오늘 본문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구속과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심판의 대상이던 백성들이 아무런 변화된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들에게 구속과 복을 주실 수 있는가? 이것은 백성들의 성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심과 동시에 백성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속과 복을 내리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된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은 자신들이 건축한 집을 남에게 빼앗기기 않고 그대로 살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손이 수고하여 일한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식이 일찍 죽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수한이 길어 장수할 것이고 질병이나 재난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복된 자손이 될 것이요 그 자손들도 그 복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거주하게 될 예루살렘은 울음소리가 그치고 기쁨이 넘치는 거리가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17-19)”
4.바울의 자비량 선교 (사 65:17-25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바울은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여 직접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선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자비량 선교의 실천적 모델을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자비량선교는 당시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부터 사도는 걸식전도자로서 하나님께서 먹여주시는 대로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알려져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단에서 파송받아 설교단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교단으로부터 선교비를 제공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교단 지도자들과 비교되어 사도성의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선교사의 생활비의 충당의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예수님의 입장과 충돌을 일으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이 메시지가 다수의 신자들에게 수긍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복음전파시에 선교사가 자비량 선교를 위해 일하여야 한다는 비울의 입장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시는 숙박을 공급받으라는 예수님의 선교입장과 충돌하고 있는가?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7-8)”
당시 초기 교회 선지자가 생겨났습니다. 교회는 그를 천사처럼 대접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였습니다. 문제는 1세기 후반에서 2세기까지 그 선지자들이 기독교 문서에 등장하지만 그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잠시 지나가는 자에 불과하였으나 일하지도 않으면서 목회자들과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남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들을 모델로 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교회 안에서는 일하지 않고 살겠다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오늘 그런 맥락에서 바울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질서하게 지내는 게으른 사람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9-12)“
5. 부활하신 만왕의 왕 (시 118편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오늘 시편에서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표현을 1-4절까지 각각의 절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동일 문구의 반복은 강조할 때 쓰는 용법입니다. 시인은 두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반복하므로써 매우 강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해야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강하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고통을 느끼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그것은 원수의 공격을 피하여 도망하는 처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오로지 가능한 길은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넓은 곳에 세움을 받았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원수들과 한 편이 되어 시인을 미워할 때에도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시인의 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6-7절).”
시인은 죽음의 위기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 사람이나 고관을 신뢰하기 보다 하나닌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라고 체험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절).”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시인을 구원하셨는가? 에워싸여 있는 원수들로부터 하나님은 오른 손을 들고 그리그 그 손의 권능으로 하나님이 시인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16-17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