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_문철영 목사]구원자 왕 (눅 23:33-43)

  • 입력 2025.11.20 23:16
  • 수정 2025.11.20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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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 전체 요약

1. 구원자 왕 (눅 23:33–43)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불법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군대도 없었지만, 유대인들의 시기와 빌라도의 정치적 계산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며 용서를 베푸시는 참된 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는 구원자 왕의 마음은, 우리도 왕의 백성답게 용서하고, 구원 요청에 귀 기울이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2. 화평을 이루심 (눅 23:23–43)

예수님은 무력해 보였으나, 십자가에서 용서와 자비, 화평이라는 가장 강력한 힘을 드러내셨습니다. 군인들, 유대 관원들, 강도들까지 모두 “왕이면, 그리스도면 내려오라”고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왕이 되셨고, 그분의 왕권은 죽음을 이긴 능력에서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오늘도 이 만왕의 왕 앞에 모여 경배합니다.

3. 성전의 회복 (렘 23:1–6)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거짓 예언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 백성을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가지에서 한 의로운 왕,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이 왕은 지혜, 정의, 공의로 다스리며 백성을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왕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언은 성취되었고, 무너진 성전과 백성의 삶을 회복하는 참된 왕이 오셨습니다.

4. 재림의 준비 (골 1:11–20)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며 장자이시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거룩한 왕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5. 평화를 위한 기도 (시 122편)

오랜 순례 끝에 예루살렘 성문에 도착한 시인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성전이 회복되고 제사가 회복되며, 백성의 평안과 나라의 평안이 회복됩니다. 예루살렘의 평화는 곧 백성과 나라의 복의 근원이기에, 시인은 성읍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역시 예배와 성전의 회복 속에서 왕이신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평화를 구해야 합니다.

 

✅ 핵심 요약 한 문장

왕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며, 우리를 화평의 길로 부르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1. 구원자 왕 (눅 23:33-43 찬송가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지난 번 북의 목선을 타고 북의 경계선을 넘어 남한 지역으로 내려온 두 사람을 즉시 북쪽으로 송환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이유인즉 그들이 탄 배안에서 16명의 선원을 살해한 살인범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문제의 논란이 되는 점은 3명이 배안에서 16명을 살해했는지입니다. 그리고 배안은 깨끗하게 물청소를 하여 증거물을 없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토에 들어와 귀순의 의사를 밝히면 그는 우리의 법에 의해 그에게 죄를 묻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바로 추방을 한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귀순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살인범이라는 단순한 결정으로 어떤 취조도 하지 않고 배 안에 모든 증거도 씻어 없애버린 채 강제로 돌려보낸 것에 대하여 인권단체들과 탈북자 단체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북쪽으로 송환되어 가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비록 고대사회이긴 하지만 더 심한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재판정에서 변호인도 없이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집행을 당하고 있는 인물을 보게 됩니다. 그가 사형을 선고를 받게 된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다름 아닌 우리가 구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시 유대나라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소송들은 유대법정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중형에 해당하는 사안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사건은 최종 법정인 로마법정에서 다루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판단아래서 유대법정은 판정을 사형언도에 해당하는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더 큰 중형을 언도해 달라고 유대법정은 판결을 내린 그날 아침에 로마법정으로 즉시 예수님을 넘겼습니다.

빌라도 총독을 최고의 재판관으로 하는 로마의 법정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재판과정에서 명절에 한 사람을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나 그것마저도 유대인들에게 물어서 유대인 무리들로부터 바라바를 사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결론을 얻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대한 반란죄를 적용하여 반란을 주도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패에다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달아놓고 모든 사람들이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정부에서 외형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킬 만한 어떤 점도 없었습니다. 반란을 선동한 왕이라고 한다면 군대가 있어야 할 것인데 군대도 없습니다. 그리고 추종자들이 모두가 흩어졌습니다. 로마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어떤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반란죄를 적용하여 “유대인의 왕”이라는 고 그 사형집행틀 위에 죄패에 기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법입니다. 불의한 자들에 의해 예수님은 불법적으로 재판을 받고 불법으로 사형언도를 받고 불법으로 사형집행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이 못질하는 망치로 그 손과 발이 못박힌 것입니다. 불구자들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던 그 손이 못박여서 불구의 손이 되었습니다. 억압받고 신음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체없이 달려가던 그 발이 못박혀 불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늘로부터 오신 왕이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 못박혀 주었습니다. 조롱과 비난으로 우리 대신 그 마음이 상하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편강도와 같은 마지막 한 사람과 같은 우리까지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참된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이 왕은 어떤 왕인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적들을 향하여 용서를 하시는 왕이십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까지도 용서를 하고 있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이후에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구경하는 백성들 그리고 백성들을 충동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장본인들인 유대인의 관리들과 군인들이 “네가 그리스도이면 너 자신을 구원하여 내려와 봐라‘라고 합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도 ”네가 그리스도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조롱받는 상황에서 어떤 대꾸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람이 자기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자기 잘못을 시인할 수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생각하고 나에게 억울한 어려움에 빠지게 한 사람을 생각할 때에는 입에서 욕설이 나가고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우리 사람들입니다. 사랑하여 결혼한 사이일지라도 아이를 출산할 때에 곁에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순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산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는 그들을 향해 어떻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있는가?

이 분이 누구인가? 이 분이 왕이라면 왕같지 않게 십자가에 달린 왕인데? 왕은 왕인데 그렇다면 무슨 왕이신가? 만일에 그분이 용서를 하지 않았다면 그 뒤로 기독교 공동체가 성장해 갈 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한 이방인들 또한 그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용서를 하신 모범적인 선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때에 서로 예수님의 용서를 생각하면서 서로 용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교회가 갈등을 넘어서서 부흥하고 로마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입의 말씀이 백성들에게 법보다 더한 영향력과 권위있는 메시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죽으실 뿐만 아니라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 분이 한번으로 끝난 왕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을 왕으로 모시는 백성으로 부름받은 그 왕의 백성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왕의 정신을 몸에 지니고 행동으로 옮기는 백성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른편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님이 가는 나라에서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요청하는 강도의 부탁에 귀를 기울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여 그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왕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자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아까와 하지 말고 전할 수 있는 왕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화평을 이루심 (눅 23:23-43 찬송가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해골이라는 곳에서 다른 두 행악자들과 함께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히고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위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다른 행악자 바라바를 사면시키라고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왜 유다 총독 빌라도는 스스로 사면권을 행사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물어서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사면하게 되엇는가? 유다의 총독 빌라도의 최종적인 선언에 의해 예수님은 하루만에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사형집행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변호인도 없이 하루만에 재판과 동시에 처형을 받아야 하는가? 죄패에 쓰인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체포되어 즉결재판으로 처형이 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에게 로마제국을 위협할 만한 군대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시에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메시야라고 찬송하던 자들은 흩어지고 없습니다. 로마 당국에서 로마제국에 도전이 될만한 위협적인 행동을 예수님이 한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존재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로마 당국에서 볼 때 예수님은 장차 로마제국에 큰 도전이 될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유다 총독은 예수님의 운동이 확산하는 것에 대하여 장차 통제하기 어려울 때가 올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을 받을 만큼 입증할 만한 죄의 혐의는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유다의 총독 빌라도는 왜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처형을 하였는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무력하고 힘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힘이 없고 무력한가?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변호인 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채로 예수님의 나라에 갈 때에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는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자들조차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면”, “왕이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붙여서 고백적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관원들은 백성들앞에서 “만일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군인들도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네가 만일 그리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여 죽게 되었으나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 섰던 유다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관원들이 영원토록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왕되신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그 분을 경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흔적으로 가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3. 성전의 회복 (렘 23:1-6 찬송가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1-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장에 양떼들을 돌보도록 세움받은 목자에게 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목자가 양떼들을 흩어서 몰아내고 돌보지 않앗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목자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먼 나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 마지막 왕의 악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왕이 행한 악행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왕이 거짓 예언에 귀가 쏠려서 하나님의 참예언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판단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 왕은 지혜가 없고 공의롭지 못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왕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흩어 포로가 되어 먼 나라로 끌려가게 만든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왕을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내려옵니다. 그 희망의 메시지는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한 왕을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지에서 한 왕이 나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왕은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왕이 될 것입니다. 이 왕은 지혜는 물론 정의와 공의를 겸비한 왕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6절).”

이 왕이 오게 될 때는 언제인가? 그 당시에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포로기간 속에서 그 왕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해방의 날을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 성취되었는가? 다윗의가지에서 날 그 왕은 다윗의 계보를 타고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만백성을 구원하는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 우리가 주님의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재림의 준비 (골 1:11-20 찬송가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 왔습니다. 하나님 의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심판을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되었는가?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 중에 장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도 첫열매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분이 우리들의 죄를 속량하셨는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절).”

 

5. 평화를 위한 기도 (시 122편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오늘 시의 첫 구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긴 여행 끝에 최종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달한 순례자의 감회입니다.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집을 나선 지 수 개월 동안 산 넘고 강 건너는 사이에 불편한 잠자리 그리고 강도의 위험 등을 겪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생 끝에 예루살렘 성 가까이에 도착하였고 눈 앞에 성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보라 저기 여호와의 집이다. 여호와 집에 올라가자”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목적지에 도달한 그 마음에서 터져나오는 벅찬 감격의 기쁨을 시인은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성지 순례의 기간은 유대 백성들에게는 나라 잃고 수십년 간 이방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보낸 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까지 기간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이 촘촘이 잘 짜여져 건설되어 있고 아름답게 건설된 성전이 산꼭대기에 우뚝 솟아있는 것을 볼 때에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면서 이국땅에 몸을 묻었던 조상들을 생각하며 한동안 깊은 명상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시인은 자신 앞에 바라보이는 성전을 올가가기 전에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한번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겅험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오늘 시인의 눈앞에 전개되는 새로은 것은 회복된 성전의 기능입니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봉사자 레위지파들의 봉사의 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성가대는 성가대직을 각각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별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들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죄일에 하나님의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로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속죄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이 줄을 서고 제사장들이 제사임무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백성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위하여 기도부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과 온 성읍과 나라의 평안은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위해 기도부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과 온 성읍과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선의 복으로 형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긴 세월으로 기다렸던 순례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목적지에 도달한 감격을 맛보는 일입니다.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숱한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목적지를 위해 기다림과 인내의 날들이 복된 날로 바뀌는 순간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발이 최종의 목적지인 성문 안을 밟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가 최종목적지에 서있는 그의 발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안식을 맛보는 순간입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2-3절).”

문철영 목사, 연세댜 Ph.D. 장신대신대원, 수정교회 원로목사
문철영 목사, 연세댜 Ph.D. 장신대신대원, 수정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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