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국교회의 문제 : 복음과 성례의 부재

  • 입력 2017.07.15 08:04
  • 수정 2017.10.1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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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을 충분히 공급할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시급하다.

고경태목사

2017년 동성애자들의 퀴어문화축제가 7월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시청 앞 광장 등에서 열린다고 한다. 18년 동안 진행되었다는 것도 놀랍고, 해가 갈수록 확산된다는 것도 놀랍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목사가 동성애자를 위한 사역을 하고, 조계종 승려인 효록 승(僧)은 부처의 사상과 잘 화합된다고 한다.(한계레, 2017.7.14., “‘성소수자 굿즈’ 단 목사·신부…스님도 “무지개 염주 만들래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기독교 내부에서 동성애에 대한 허용을 외치고, 종교계에서 허용을 외친다. 필자는 소수자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의식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필자는 동성애자들이 모든 부끄러움을 이길 수 있는 강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퀴어축제현장을 보면 더욱 그렇다. 거의 알몸을 광장에서 보일 수 있는 것은 정상을 초과한 의식 세계이다.

한국은 이슬람의 돌진에 직면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럽과 미국 전역에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아시아권역에서 한국, 중국, 일본에서 미진한 상태이다. 가장 유력한 거점이 한국인거 같다. 한국에 이슬람권의 경제차관, 연구자들,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제 할랄(HALAL) 인증표도 거의 일상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코셔(Kosher)는 이스라엘에 국한되지만, 할랄은 경제적 측면에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음식섭취를 종교적 규례로 갖는 집단은 유대교(코셔), 이슬람교(할랄, 라마단), 힌두교(소 육식 금지), 안식교(육식금지), 불교(육식금지), 천주교(사육제, 사순절) 등이 있다. 이슬람의 진격에 매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한국 교회의 태도에 우려가 있다. 그리고 이슬람의 적극적인 공세에 한국 사회가 이슬람화될 것에 우려가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 Re 500을 위해서 한국 교회에 주장하는 것 중에 하나는 “윤리 회복”이고, “자본주의, 실용주의”등 이다. 교회의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목사들이 독일과 유럽을 단체여행하는 프로그램을 갖기도 한다.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에 한국 교회에 주어진 과제는 500년 전에 확립한 이신칭의 교리를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17년 7월에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WCRC(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와 로마 카톨릭이 의화 이해에 합의했다. 1999년에 루터교, 2006년에 감리교가 구교(舊敎)와 화해했는데, WCRC가 화해함으로 거기에 참여하는 한국의 교단인 기장, 예장통합, 예장백석 등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즉 500년전 이신칭의 교리를 후대들이 포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4-5세기 고대 교리까지 포기한 것에 합의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남은자들은 고대 교리와 이신칭의 교리를 근거한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고 변호해야 한다.

2017년 한국 교회에는 동성애, 이슬람, 윤리, 경제 문제가 가장 큰 이슈인 것 같다. 한국 교회가 살기 위해서 동성애를 막아야 하고, 이슬람을 저지해야 하고,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일부분 정당성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의무를 소홀하게 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20세기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전쟁지지 선언을 함으로 거부를 선언했다. 즉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자유주의를 개혁한 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신-정통주의(Neo-Orthodoxy)이다.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를 개혁한 것이다. 자유주의가 표방한 인간 예수를 계승하고, 계몽철학이 주장한 교리 파괴를 철저하게 계승한 것이 신정통주의이다. 다만 자유주의 학자들이 서명했던, 전쟁지지 선언을 반대한다. 그래서 신정통주의에서는 평화와 평등이 캐논(Cannon)이 된다. 모두가 죄사함과 영생을 주는 복음에 관심이 없다. 기독교는 이 땅에 죄사함과 영생을 주기 위해서 주 예수께서 설립한 교회이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은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동성애를 저지하고, 이슬람을 저지하며, 목회자들의 윤리를 회복한다고 해서 한국기독교가 좀 더 좋은 기독교로 개혁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기독교가 된 것은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했기 때문이다. 한 교회(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교회가 세계 교회가 된 것은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 외에 다른 방법이 아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것보다, 생명의 양식을 충분히 공급할 방법을 찾는 것이 더 필요하고 절대적이다.

생명의 복음을 전할 사역자를 잘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고, 사역자들을 각성시켜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긴박하다. 주님께서는 들판이 희어졌는데 일군이 없다고 한탄하셨는데(마 9:38), 1세기나 21세기에 동일한 충격이다. 홍수에 마실 물이 없듯이 수 많은 교회당 속에서 복음을 들을 수 없고, 복음을 전하는 자도 없다. 그리고 동성애 반대니 찬성이니, 이슬람 금지니, 윤리 회복이니, 평등 사회 구축이니 등등을 외치는 사람만 풍성하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질문하셨던 것에 대답해야 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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