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종합편성채널(綜合編成, 종편방송)의 JTBC의 “싱어게인”과 TV조선의 “미스트롯(미스터트롯)”이 흥행을 냈다. TV조선의 미스트롯2는 30%의 시청률이라는 믿기지 않는 뉴스도 보았다. 그런 와중에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도 큰 인기를 끌었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트롯 경연 방송이 있지만, 종편방송의 흥행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경연대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노래 실력이 과연 대단할까? 우리 사회에 감춰진 보화를 찾을 경연대회가 될까? 우리사회의 대중가요 포로모션 체계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서 숨은 보석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보화들이 나오는 현상에서 시청자들이 감동하는 것이다.

대중가요 가수의 노래와 목사의 설교를 직접 대조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에게 인기 있는 스타가 반드시 노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후배 목사가 싱어게인 결승전에서 준우승한 참가자의 노래가 더 좋았다고 평가하면서 한 말이기도 하다. 경연대회에서 평가는 평가방법과 평가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판정하는 것이다. 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이 노래 능력이 아닌 대중의 선호에 따라서 1등과 2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대중이 반드시 노래 능력으로 선호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도 성도에게 혹은 대중에게 인기 있는 설교가 있는데, 그 선호도에 의해서 좋은 설교라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보였다.

우리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제시하는 것은 설교자의 기본 자기인식(정체성 인식)이다. 설교자가 자기 정체성을 파악하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언이다. 우리는 좋은 목사와 나쁜 목사의 구분은 추상적이지만, 그리스도인 목사와 넌크리스천 목사는 분별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내가 섬기는 목사가 넌크리스천 목사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넌크리스찬을 참 목사로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 크리스천 목사이지만 교회에서 관계 문제에 의해서 거부할 수 있겠지만, 넌크리스천 목사를 합당한 목사로 존경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크리스천 목사라면 좋은 목사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 때문에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역자들은 함께 사역했고 함께 위로했다. 사역자의 갈등이나 투쟁이 미움이나 분리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크리스천 목사가 인기 있는 설교를 못할 수 있고, 넌크리스천 목사가 인기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다. 크리스천 목사가 바른 설교를 못할 수 있고, 넌크리스천 목사는 바른 설교 흉내를 낼 수 있다. 넌크리스천 목사가 바른 설교, 바른 믿음 흉내를 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복음은 신비롭기 때문에 어느 방편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목사이면 모두가 존중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설교 문제에서는 넌크리스천 목사가 바른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해야 한다. 바른 설교는 크리스천 목사만 할 수 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으면 바른 설교를 수행하기 어렵다. 설교가 얼마나 어려운지 중세 교회에서 수행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지금도 설교 표절 문제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설교를 쉽게 생각하는 목사는 평가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설교를 “전제(설교자의 정체성) - 내용(설교자의 해석능력) - 전달(설교자의 수사(修辭)능력)” 구도로 구상하고 있다. 지금은 전제에 대해서, 즉 목사는 크리스천이고, 그 크리스천이 자기 주님께 몸된 교회의 사역자로 부르심(소명)을 받은 의식이 있어야 함을 주지시킨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연한 것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이다. 특수부대 군인들이 하는 중요한 훈련은 구보(驅步)다. 특수무기 핸들링 훈련이 아니라 매일 구보와 기초 체력 훈련이다. 목사의 기본은 자기 정체성 확립과 확증이다. 그것은 매일 훈련과 점검해야 할 필수 항목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뒤의 모든 사안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노래경연대회에서 노래하는 경연자들은 이미 유명한 노래를 부른다. 관객들은 이미 익숙한 노래를 듣기 때문에 첫 사람이지만 생소하게 여기지 않는다. 현장의 음향과 가정에서 듣는 음향은 전혀 다르다. 익숙함은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설교도 유사하다. 생소한 설교 내용은 설교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전혀 기쁘게 하지 않는다. 생소한 내용의 설교를 좋아하려면 상당히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학문 훈련을 수행해야만 가능하다. 판, 검사, 의사들도 체계적인 학문 훈련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자기 직종의 전문 지식이 고급 지식 정보를 요구한 것이고, 그 지식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지식인뿐이다.

노래경연자들이 부르는 유명한 노래를 익숙하게 만든 가수가 대단한 가수들이다. 그 생소한 음악과 가사를 대중에게 익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연자들이 그 가수보다 더 탁월하게 노래하기는 쉽지 않다. 관객이 그들의 노래에 열광하는 것은 익숙함과 응원과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그 인기는 인기가 아니라 격려이다. 그 격려를 인기로 이해하면 곧 침몰하고 말 것이다.

목사의 설교가 대중적이고 인기 있다면 거의 현재 트렌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태홍 목사(가조제일교회)는 현재 교회가 추구하는 트렌트를 관상기도(방언기도와 침묵기도), 절대타자, 심리학(자기 신성화, 도약), 인문학, 마스터(Master)로서 예수 등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요소를 벗어나서 인기가 있는 인기 있는 설교자가 우리나라와 세계 교회에서 누가 있을까?

복음은 아무리 익숙하도록 훈련해도 언제나 생소한 내용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는 육체이고 복음은 영(靈)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훈련으로 영의 유익에 이를 수 없다(딤전 4:8). 우리는 설교자가 자기 정체성을 정확하게 확립할 것을 제언하고 있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설교자가 좋은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대중이 선호하여 인기 있는 설교와 좋은 설교는 같지 않다. 크리스천 설교자는 좋은 설교로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도록 노력한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주의 이름이 온 세상에 가득할 그 날을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인기가 있으면 주의 이름이 온 땅에 가득하지 않다. 교회가 가득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이 아니다. 주의 이름을 가득하고 높여질 때에 교회의 숫자가 증가될 수 있기를 기대하자. 양이 질을 만들(Quantity becomes Quality)지만, 다량(多量)에서 양질(良質)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에서 양보다 질, 그것은 0:10으로 질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것에서 새로운 삼성이 나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크리스천 목사일지라도 양질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최소한 삼성이 수행한 노력과 견줄 수 있으면 좋겠다.

복음은 언제나 새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복음에 익숙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복음에 정진하는 크리스천 목사를 사모하는 크리스천이 모인 교회를 사모하면 좋겠다. 인기 있는 목사가 유능한 목사(세상에)일 수 있고, 유능한 목사(복음에)가 아닐 수 있다. 크리스천 목사라면 유능하지 않아도 존경할 수 있는 교회면 좋겠다. 금강석(金剛石)을 가공해서 다이아몬드가 되지만, 금광석(金鑛石)을 다듬으면 모래가 된다. 금강석(Hardest stone)은 다듬고 금광석(Gold ore)은 제련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 목사가 시골 교회에서 한 성도의 반응 때문에 자유주의에서 개혁신학으로 전향한 역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하시면 쓰실 것이요 버리시고자 하시면 버리실 것이다(렘 18장, 롬 9장).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패한 교회를 심판하실 가장 무서운 방법은 “악한, 양심이 없는, 넌크리스천 목사”를 허용하시는 것이다. 최소한 그 심판을 즐거워하는 크리스천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정말 인기가 없는 크리스천 목사의 설교를 이를 물고 들으며 인내하며 교회를 섬기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복(福)일 것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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